[스크랩] 회심/해롤드 바커
<본문은 C. A. 밀러와 H. P. 바커가 나눈 회심에 관한 질문과 대답을 묶은 것임>
한 가정의 가장(家長)이라면 누구에게든 자기 집에 들어오라거나 또는 들어오지 말라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권리를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 역시 하늘나라에 들어갈 허락을 주 예수님께 분명히 받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8:3에서 주님은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하늘나라를 소망할 수 없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것은 회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 주제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회심치 않고는 아무도 복이나, 끝없는 기쁨, 하늘나라를 얻을 수 없습니다.
회심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성경에서 답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6장을 보겠습니다. 이교도들 가운데 널리 퍼진 여러 가지 부도덕한 행위들을 언급한 후에 사도 바울은 11절에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회심에 대한 멋진 정의입니다. 이제 에베소서 2:13을 보겠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이것이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회심을 나타내고 있는 방법입니다. 다음으로 베드로전서 2:25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이 모든 구절들이 회심이 무엇인지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베드로전서 2:9보다 더 아름답게 설명하고 있는 구절은 없을 것입니다.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 성경 구절들은 회심이 영혼에 작용하는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변화 즉, 어두움과 위험, 멀리 떨어진 데서 빛으로, 구원으로 그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변화임을 아주 분명하게 해줍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겉옷을 갈아입으려고 침실에 들어갔습니다. 방이 어두웠지만 다른 겉옷을 걸어둔 곳을 알고 있었기에 불을 켜지 않고도 쉽게 갈아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겉모습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나는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좋은 옷을 갈아입었지만 방안에 있는 동안 내내 어두움 속에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이 사람들의 생애 가운데에도 종종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감동을 받게 되면 악한 친구들을 떠나게 되고, 악한 습관을 그만두게 되어 더 나은 삶을 살게 됩니다. 늘 들르던 술집 대신 예배당에 가게 되어 근실하고 존경할 만한 시민이 됩니다. 이 모든 일과 이보다 더 나은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시간동안 그들은 여전히 어두움 속에 그냥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풍성한 사랑과 능력으로 그들의 영혼에 빛을 비춰주는 구주를 나타내는 하늘의 빛이 없습니다. 모든 면에서 사모할만한 외적인 변화가 일어났지만 그들의 영혼은 위험에서 안전으로 또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개과천선은 회심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고쳐먹는 것과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특별한 꿈이나 놀라운 경험 그리고 종교적인 느낌을 갖게 되면 회심에 이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심은 그 중 어떠한 것보다도 더 심오한 것이며, 우리를 넉넉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줍니다(요 5:24).
침례를 받고 어떤 큰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도 회심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별 것 아닌 죄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죄는 흉악하고, 어떤 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쉽게 간주하지만 모든 죄는 다 하나님께 가증한 것입니다. 아주 가벼운 죄일지라도 살인죄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범하는 자에게는 하늘 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로 갚아 달라고 크게 외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행한 것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자인가 하는 것 때문에도 회심이 필요합니다. 이점에 있어서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모두 죄를 직고할 것이고, 모두 심판을 받게 됩니다. 성경은 "차별이 없느니라"라고 아주 확실하게 선언합니다. 침례를 받고, 문벌이 좋으며, 세련되고, 온화하고 종교성이 강한 숙녀라도 천국에 들어가려면 마치 욕쟁이나 술 취한 차, 강도와 같이 회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원할 때 회심할 수 있나요?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때를 선택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때는 언제나 현재입니다. "지금은 구원의 날이요",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문제를 미루고자 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아주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러한 기회가 또다시 주어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크시며, 주님의 은혜가 아직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다시는 그런 기회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나 성령님의 탄식을 무시해 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벼락 밑에서 노는 것이 더 안전할 것입니다.
회심은 얼마나 오래 걸리나요?
지난 금요일 저녁에 우리는 한 젊은 아가씨가 보낸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 아가씨는 범죄한 죄인으로서 그녀가 구하던 그 은혜를 단번에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아가씨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났습니다. 그 죽어가는 강도가 회심하는데 얼마나 걸렸나요? 잔인한 박해자였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땅에 엎드러져 그 입으로 "주여!"라고 외치는데는 얼마나 걸렸나요? 지진으로 인해 깨닫고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던 무정하고 복음을 미워하던 빌립보 간수가 그 해답을 알게 되는 데는 얼마나 걸렸습니까?
물론 일반적으로 회심하기까지 여러 번 시행을 거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이 수주 또는 수년이 걸린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영혼이 구주와 그 흘리신 보혈로 인해 죄가 사해졌으며 정결케 되었음을 단번에 확신하게 되는, 그 시행의 절정에 도달하는 한 분명한 순간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것은 긴 과정이 아니라 한 순간의 행동입니다.
만일 회심한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또다시 회심해야 하나요?
이 질문은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물어오는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한 죄인이 회심하게 될 때 그가 모든 것으로부터 의롭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정확히 이해한다면 그러한 질문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죄를 짓게 될 때마다 반복해서 회심해야 한다면 아마도 하루에 스무 번 이상 반복해서 회심해야 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단 한 구절도 그러한 개념을 나타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전 3:14)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한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셨다는 것이기에 그것은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한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면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에 이는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아버지도 자녀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 속한 그리고 영원한 관계가 하나님과 믿는 성도들과 사이에 맺어진 관계입니다. 혹 그 자녀가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은 그를 나무라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벌하실 지라도 자녀와의 관계를 끊지는 않으십니다.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해야할 일은 교제를 회복하고 바른 길로 가는 것이지 또다시 반복해서 회심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가운데 누가복음 22:32이 기억납니다. 아마 그보다 이전이 아니라면 베드로는 주님의 발 앞에 매달려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던 주목할 만한 순간에 참으로 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슬프게도 죄에 빠졌고 주님을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를 위해 기도했노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죄에 빠지기도 전에 그의 회복을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네가 회복된 후에"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은 번역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 없는 죄인의 회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에 빠진 성도들이 회복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내 친구의 예를 한가지 들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군에 입대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는 군 생활에 싫증이 나 기회를 엿보다가 탈영을 했습니다. 그는 이제 탈영병이 되어 발각될까봐 늘 두려움에 떨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부대에 돌아가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의 부대는 최전선에 배치되었는데 그는 기꺼이 그 부대에 합류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 부대에 다시 배치될 수 있을까요? 그는 신참병사처럼 군복을 입어보지 않았던 사람이 아니라 탈영병이었기 때문에 다만 돌아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는 합당한 과정을 거쳐 부대장에게 자신을 보고하고서 자신에게 맞는 벌칙을 받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잘못을 범한 하나님의 자녀도 그와 같습니다. 그는 부대에서 탈영한 자이므로 신참 병사처럼 입대하지는 않습니다. 방황하는 자가 돌아올 때 그는 재판관에게 무죄선고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큰 것만큼 회복시키시는 은혜도 큰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범죄한 죄인을 받아주신다면 방황하는 자식은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자녀가 돌아갈 때에는 회심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회복이 필요하며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확실히 회복될 것입니다.
회심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인이 되는가요?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위대한 사역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 누가 자기 삶의 여정을 마치고 하늘로 떠나갈 준비를 할 때까지 자신을 합당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사람이 있겠느냐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믿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물으면 아마도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어느 누구도 어떠한 노력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군인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그가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입대하기만 하면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입대하는 순간 그는 군대 사령관과 동일한 군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 번도 전쟁터에 나가본 적이 없고, 어떤 사람은 백전 노장의 베테랑일지라도 그들은 동일한 군인입니다.
회심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인들의 회심에는 네 가지 주목할만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9, 10에서 이 특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회심한 사람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된 자입니다. 하나님을 피하는 자가 아니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라고 고백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엄격한 주인이요 두려운 심판자가 아니라 사랑하시는 아버지입니다.
(2) 그들은 우상을 버렸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이들은 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을 섬기던 이교도에서 나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 영혼 안에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권세를 부리는 모든 것은 다 우상이며, 장래에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하는 것은 모두 우상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도덕적인 삶을 살고, 기도하며, 서원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것들이 우상입니다. 당신의 그 행위들이 당신과 하나님의 은혜 사이에 서 있는 것입니다. 회심한 사람의 한 가지 특징은 그가 전에 소망을 두고 쌓았던 자신의 노력과 결심, 그리고 하나님과 그 사이에 놓여진 모든 것들을 바람에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3) 그들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과 사단을 섬기지만, 회심한 사람은 그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애를 씁니다. 그는 할 수 있다면 모든 것들을 다 바꿀 것입니다. 그가 포목상인이라면 그가 옷감의 길이를 정확히 재서 판매하려고 애쓸 것이며, 그가 우유 상인이라면 우유는 우유이지 우유와 물이 섞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이 모든 일들이 그가 이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증거해 줍니다.
(4)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서 강림하심을 기다렸습니다. 인기, 명성, 성공, 부는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이 추구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는 예수께서 장래 노하심에서 그를 구원하실 자임을 알기에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모든 중심이 되시는 그 빛난 세상에 자기의 소망을 둡니다. 그는 주님을 기다리며, 그의 가장 간절한 바람은 그가 주님이 계신 곳에 그도 영원히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 네 가지 특징이 우리 모두에게서 더욱 분명하게 보여지기를....
회심한 사람은 모두 자기가 회심한 날짜를 알고 있나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그들은 달력의 한 날을 짚으며 "이 날이 내 영적 생일이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며 그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회심한 것이 분명하다면, 당신은 죄의 그늘에서 벗어나 은혜와 자유의 밝은 곳으로 나온 것이며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당신이 회심한 정확한 날을 말할 수 없다고 해서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회심은 언제나 죄에 대한 깊은 애통을 동반하게 되나요?
나는 자책감 없고 죄에 대한 애통이 없는 회심에 대해서는 크게 의심합니다. 누가복음 8:13에서 나오는 사람처럼 "말씀을 기쁨으로 받은" 사람을 보는 것은 별로 기쁘지 않습니다. 그들에 대한 다음 말씀은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잠깐" 믿을 뿐이고 곧 "배반하게" 됩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회심을 고백한 후에 즉시로 무릎을 꿇고 친구를 위해, 복음 전도자를 위해, 전쟁터의 병사들을 위해, 바다에서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보았지만 그 다음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 값으로 희생하셔야 했던 자기들의 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거기에는 양심을 깊이 갈아엎는 것도, 완악한 마음에 대한 고뇌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는 회개한 죄인의 두 뺨에 흐르는 뉘우침의 눈물을 보고,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와 부서진 마음으로 외치는 소리를 듣기를 원합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도 역시 이것을 가치 있게 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뉘우쳐 우는 소리를 듣기 원하시네
눈물이 젖은 두 눈을 보기 원하신다네
영혼의 깊은 탄식을 읽기 원하신다네.
그렇지만 "잔잔한 물이 깊다"는 말도 사실입니다. 종종 너무도 깊은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그들이 받은 느낌들을 아주 천천히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가 보든지 거기에는 깨어지고 뉘우치는 영혼의 모습과 죄에 대한 심각함과 두려움을 깨달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왜 지나간 과거에 비해 오늘날에는 그렇게 회심하는 사람을 보기가 어려운가요?
그것은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많은 부분에서 회심이 더 이상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많은 설교들이 회심을 언급하지 않은 채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회심함으로 시작해야만 한다는 것 대신에 "그리스도를 따르라",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밟으라"는 말로 권고받습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우리 가운데 회심의 필요성을 믿고 있는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슬프게도 냉담하며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주께 범죄하였을 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시편 51편에서 우리는 그의 인내를 보게 됩니다. 다윗의 말을 들어봅시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다윗의 마음이 냉랭했을 동안에는 회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즐거움의 회복이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을 끼치는 것이었습니다. 죄인들은 회심해야 합니다. 형제들이여, 우리가 다만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우리의 마음만 더 따뜻해지고, 더 민감해지는 것으로 끝난다면 우리는 회심이 적다고 해도 결코 슬퍼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회심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도와줄 수 있나요?
나는 사도행전 3:19을 보여 주겠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라". 나는 그에게 참된 회개는 구주께 돌이키는 것이라고 말해 주겠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6:31을 읽게 하겠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구원에 대해 그분을 의지하는 회개한 죄인은 회심한 것입니다. 그는 죄에서 주님께로 돌아선 것입니다.
우리의 대화는 여기에서 마쳐야 하겠습니다. 이제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나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회심한 사람입니까?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당신이 주님과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죄를 인정하십시오. 변명하지 마십시오. 돌이키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당신을 구원하실 것이며 당신께 복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회심하였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