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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상 모든 악의 근원 2 (창3:1-3)/존 칼빈/ 펌

baromi 2008. 4. 24. 09:22

이 설교는 지난 1559년 10월 4일 수요일에 행한 것이다. 설교에 붙여진 소제목과 괄호 및 주는 원문에 없는 것으로,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첨가해 번역, 편집했다.


우리가 어제 다룬 것에 이어서 사탄의 책략에 놀라지 않으려면, 그것을 멀리 바라보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단번에 공개적으로 우리를 공격해 오지 않고 땅 밑에 지뢰를 설치하여 그가 우리에게 꾀하는 악행을 일견 모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계략 - 암암리에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면서 조그만 틈도 놓치지 않음


우리에게 작은 틈새를 발견하는 즉시 그는 이미 전투를 이겼다는 것을 알며, 따라서 그는 이미 우리를 점령하고 우리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탄이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할 때 우리가 보는 내용입니다. 앞서 그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이 너희가 이 나무 열매를 못 먹게 하신 일이 가능할까?” 그는 의심하고 대담히 하나님에게 도전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이 하와를 두렵게 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흔들리며, 또 마땅히 저항하는 일에 있어서 그렇게 확고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것을 보고 사탄은 하나님과 전투를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더할 나위 없는 엄청난 신성모독이 있습니다. 여자는 그의 말을 차분히 들었습니다. 비록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가 보여주듯이 [얼마간] 동조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단번에, 마땅히 가져야 했던 굳센 태도로, 사탄의 악의를 물리치지 못한 데서 기인합니다. 또한 그녀는 [동조했다는] 이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굳건히 서도록 주의하여 사탄이 온갖 술책을 사용하여 우리를 말씀에서 돌려놓으려 할 때 확고한 믿음으로 말씀을 고수합시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탄은 우리를 결코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입구라도 그에게 보여준다면, 그는 분명 언제나 더욱 대담하게 하나님에 대한 격한 반역으로까지 우리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이는 모든 불의의 시작이란 인간들이 강퍅해지고 더 이상 [악으로 인해] 괴로워하지도 않게 될 때임을 우리가 보며, 그리고 솔로몬이 “악한 자가 서로의 많은 죄를 쌓아놓고 나서는 하나님과 모든 권면을, 즉 모든 경고를 멸시하며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1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 바울은 이점을 더 잘 표명하는바, 우리가 이것에 대해 이전에 언급했거니와,2 그것은 사탄에게 사로잡힌 유기(遺棄)된 자들이 더 이상 감정이나 양심의 가책도 없으며, 너무도 얼이 빠져서 더 이상 푸념도 없으며, 그들의 악을 느끼지도 않기 때문에 신음하고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의 본질


1. 표면적인 이해와 적용: 식욕과 금식


이제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죄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압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그들이 자신들에게 금지된 것을 먹음으로써 하나님에게 죄를 범한 그들의 식욕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3 하지만 이 설명은 너무도 보잘것없고 유치합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금식 신봉자들이었습니다. 물론 바른 목적으로 된 금식 그 자체는 칭찬받을 만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많은 고대인들이 잘못을 범했듯이,4 금식을 커다란 미덕으로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보다 우리는 성 바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로 이끌어가는 것은, 거룩함의 본질을 깨닫기에는 그다지 유익하지 않습니다.5 사실 금식이 우리를 하나님께 기도할 마음을 갖게 하며, 우리의 육적 기질을 길들이고 억제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그의 자비를 얻는다는 증거가 된다면, 그때 금식은 유익할 것입니다. 우리가 냉랭하고 굼뜨며 나귀처럼 자극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금식이 이런 우리를 돕는다면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유익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비교하면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미신이 거부된 이상, 아담과 하와의 죄가 금지된 열매를 탐하여 게걸스레 먹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크고 엄청난 악이 있었음을 우리는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것을 사탄의 말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묵상할 수 있습니다.


2. 근본적인 이해와 적용: 신성모독에서 온 불순종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함


아담과 하와의 죄는 어디에 기인합니까? 그것은 사탄에게 동조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그들을 죽음에 밀어 넣은 시험의 종류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첫째로 사탄이 거짓으로 그들을 의심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는가?”라고 말입니다. 다음으로 사탄은 하나님을 명백히 거짓말쟁이로 비난했습니다. 더 이상 넌지시 말하지도 술책을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목청껏 모독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아담과 하와를 정도 이상으로 높였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을 갖게 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그들이 하나님과 전쟁을 벌이고 그의 보좌를 찬탈하고자 한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탄의 모든 의도 가운데서 우리가 보는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죄가 이 열매에 대한 식욕이 아니라, 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에 불과하다고 여김으로써 하나님의 순종에서 이탈한 것이라고 결론지어야 합니다. 마치 창조주가 그들을 시기하기나 한 듯이,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충분히 고상하고 영예로운 교육을 전혀 시키지 않은 듯이, 그들은 그들의 창조주에게 이런 모욕을 행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명심해야할 내용입니다.


이런 신성모독은 광대같은 이들이6 아담과 하와의 죄를 경감시키고자 했을 때 충분히 퇴치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쩨쩨하게 하나님이 인간들에 대해서 이처럼 진노하고, 우리가 모두 파멸하며, 죽음과 저주가 모든 인류에게 확대되며, 우리가 하늘 유산을 빼앗기며, 우리가 저주받아 사탄의 폭군적인 지배를 받아야 했던가?” 바로 이것이 불경한 인물들이 멍에를 내려놓고 이미 그들에게 예비 된 정죄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의] 박차에 맞서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최초의 조상들의 죄가 어떠한지를 제대로 알 때 하나님을 모독할 근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 유의합시다.


그런데 우리가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엄청난 죄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동시에 그들의 사례를 따라 조심하도록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영원한 원수이기 때문이며, 오늘날 우리와 전투를 벌이면서 동일한 무기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악의 기원과 근원이란 우리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서 이탈하는 것임을 유념합시다. 바로 이것이 사탄이 시작한 목적입니다. 우리가 목을 숙여 자발적인 순종을 하나님께 드리는 한 만사형통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심을 망각하고 우리 멋대로 방탕하는 즉시, 이전에 천사였던 우리가 완전히 그에게서 멀어져 끝이 없는 심연으로 들어가는 황당함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우는 것, 바로 이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나아가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말씀에 믿음을 덧붙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야말로 순종의 어머니요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안에 하나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이 올바르다는 확신이 없다면, 그의 약속에 의지하여 거기서 우리의 모든 안식과 만족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위협에 떨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무도 변덕스러울 것이며 필경 사탄이 멀리서 승리의 손짓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만일 인간이 내가 말한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인간 정신만큼 경박하고 변덕스런 것은 없습니다. 내가 말한 것이란 즉 하나님께 그에 합당한 영예를 돌려드리는 것이요, 하나님이 의롭고 선하며 성실하시다는 사실에 따라 그의 말씀에서 확실하고 무오한 진리를 발견하며 찬양할 수밖에 없는 정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양심의 평화와 안식은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우리 자신을 맡기는 데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행복과 구원에 바람직한 모든 것을 그의 말씀을 수단으로 우리에게 제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씀에서 우리는 오직 찬양할 것만을 발견하며, 우리의 복과 구원을 추구함에 있어서 우리의 기대가 결코 좌절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는 믿음이 순종의 뿌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3. 문제의 원인은 곧 해결의 출발점: 말씀에 머무는 귀와 겸손한 마음


어떻게 죄가 인간에게 들어왔는지, 어떻게 사탄이 하와와 아담을 불의에 습격을 했는지 살펴봅시다. 사탄의 음성을 받아들이는 두 개의 창문 즉 두 개의 귀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으로 사탄은 온 인류를 장악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악은 동일한 수단으로 치유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두 개의 귀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로 들어가는 민첩한 통로를 가져야 하며 말씀은 거기서 기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귀를 갖추어 사탄이 어떤 통로도 갖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사탄이 인간들에게 영향력을 갖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이 두 저주받은 창문 내지는 문, 즉 두 개의 귀를 통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치명적인 독을 씻어내야 하며 사탄에게 대항하기 위해 방어를 굳세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우리 귀에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그 음성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입구를 내어줄 때 이 일은 이뤄질 것입니다. 사탄이 어떤 계책을 펴고 온갖 술책을 동원하여 우리를 유혹하러 오더라도, 우리는 그의 음성에 주의하여 그것에 확고히 머물러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아담 안에서 잃었던 것을 되찾는 방법입니다. 또한 바로 이것이 사탄과 대적하여 굴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비록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와 전투하고 무한한 술책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게다가 동시에 우리가 언급한 불신과 반역에 교만이 결합되어 있음을 유념합시다. 아담이 그토록 무서운 존재이신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여기기까지 미혹된 것은 본성의 감각 자체가 하나님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담은 어리석은 야심과, 더 높고자 하여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단계를 오르고자 하는, 그래서 목이 잘릴 수밖에 없는, 이 방탕한 욕망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그에 합당한 영예를 돌려드릴 때 믿음은 우리로 하나님을 복종하게 해줍니다. 또한 여기에 겸손이 결합됩니다. 사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어디입니까? 믿음은 우리를 완전히 죽이고, 우리의 복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과 그 안에서 외에 우리를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안에 있는 궁핍을 인정하고 우리에게 아무런 선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 외에, 우리에게 제시되는 은총을 받을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무언가를 가졌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분명 바람으로 가득하며 하나님의 은총에 결코 접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품은 공상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사실이지만, 어찌됐건 바람은 좋은 술이 병에 담기는 것을 방해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피막에 바람이 가득할 경우 피막은 커지고 부풀어 오르며 그러면서도 속은 비어 있습니다. 속에 내용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속는 모든 어리석은 자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도 부풀어 올라 하나님의 은총이 새어나가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교만으로 강퍅해져서 돌이나 바위와도 같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만큼 비를 내린다 해도, 단 한 방울도 거대한 바위를 침투하여 그것을 적시거나 무르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바위는 너무도 단단하여 비도 소용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이 그의 은혜를 우리 위로 흐르게 할 수 있으나, 우리가 교만과 자만에 사로잡혀있는 한, 그 은혜는 말라버리거나 땅으로 떨어져 우리가 전혀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겸손과 분리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처럼 그에게 우리가 추구해야할 복이 있으며 우리가 갖기를 바라는 모든 것이 그의 순전한 후덕함과 무상의 은혜임을 알면서, 우리는 굶주리고 헐벗은 가난한 거지처럼 하나님께 텅 빈 채로 나와야 합니다.

4. 요약 및 부연: 신앙, 겸손, 복종


바로 이것이 모세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이야기에서 묵상해야할 내용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머물겠다는 그런 존경심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사탄에게 대적하기 위해 제대로 무장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예를 얻으시는 방식입니다. 위선자들은 그럴듯한 주장을 하며 의식들과 기이한 것들을 갖고 있습니다. 요컨대 그들에게는 참된 신자들보다 더욱 호사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 외에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열정이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대담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합니다. 내가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는 상상될 수 있는 온갖 모양의 거룩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분명 우리는 그의 존엄을 경멸하는 자들이거나, 아니면 그를 헐뜯고 모욕하기에 이를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경멸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이처럼 무엇보다도 신앙이 우리에게 소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과 더불어 겸손과 복종이 있습니다. 겸손으로 말하면, 우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며, 우리에게 없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칭송받고 높이 평가받는 것을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저주받은 야심은 흔히 생각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역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야심이 우리의 마음을 중독 시켜서는 안 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상태로 만족함으로써 오직 그가 영화롭게 되기만을 구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그의 은혜로 덧입지 못할 정도로 헐벗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현자는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지 않으며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하지 않으며 부자는 그 부를 자랑하지 않는다7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인간들을 수치와 당황 가운데 내버려두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부연하십니다. “누구든지 자랑하고자 하는 자는 나를 자랑하고 나 여호와가 의와 긍휼과 심판을 행하며 진실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8 바로 이곳이 우리가 이르러야할 곳입니다. 즉 확실한 참 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유념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꺾고 하나님의 위대함과 고귀함을 드높여서 그곳에서 우리의 영광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가 이처럼 겸손해질 때 우리는 멍에를 매어야 한다는 것과, 우리로 짐승처럼 방황하게 하고 우리의 감각과 욕구를 규제와 절제 없는 맹렬함으로 만드는 이 저주 받은 자유를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에 의해 통치 받는 것 외에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읍시다. 우리에겐 단 한 방울도 바른 지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야 하며 그가 우리를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는 절제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속박하며 지배하며 평온하게 조치해 주어야 하며, 우리의 규칙인 그의 의지만이 있어야 합니다. 요컨대 이것이 우리가 명심해야할 내용입니다.


의심의 귀가 가져온 결과


1. 눈 뜸인가, 눈 멈인가: 억압과 무지에서의 해방인가, 방종과 반역인가?


이제 모세는 여자가 나무를 본즉 탐스럽고 기뻤다고 첨가합니다. 그것은 그 맛 때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사탄의 약속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하와가 단순히 군침이 돈 것이 아니라 더 멀리 바라봤음을 알게 됩니다. 즉 그녀는 남편과 더불어 하나님의 보좌와 같은 곳에 있어 그보다 열등하지 않는 그런 존엄에 이를 수 있다면 행복하게 되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끔찍하게도 눈이 먼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이성과 지성을 심어주셨습니다. 마치 하늘에 있는 태양이 땅을 비추는 식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태양 빛을 모두 갖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튼 사방에 퍼지는 빛을 통해 그것을 누립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은 아담과 하와 위에 비치는 빛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밝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선을 바랄 수 있을 정도의 정직과 온전함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하나님이 그들(아담과 하와)을 시기했으며 그들을 속였다는 식의 그토록 가증스런 모욕적인 말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머리털을 곤두세우게 하는 일입니다. 불변의 진리이신 하나님이 거짓으로 아담과 하와를 속이고, 그들의 유익과 구원을 마련해주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시기 때문에 그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고, 그에게 무슨 동반자가 생길까 두려워 이 나무 열매를 못 먹게 했다면 이것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와가 이렇게까지 미혹되었음을 볼 때 우리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 치명적인 타락 이전, 태초에 있었던 상태에 비해 우리가 처한 상태가 어떤지 생각해 봅시다. 아담과 하와는 지상 낙원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온갖 쓰레기 더미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오물뿐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악취 나는 곳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처한 이 무서운 심연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런 무질서에 있는 한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지상 낙원에서 넘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그들의 모든 지각에서 온전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떠났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몸과 영혼에 있는 부패함을 봅니다. 아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이런 사실들은 우리를 일깨울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필사적이 되어 우리 하나님의 날개 아래 숨으며 그에게 우리를 인도해달라고 기도하고, 우리가 처음 조상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날 정도로 행했던 방종을 갖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 함께 범죄한 아담: 처음 타락의 관점에서 본 남녀 사이의 질서


나아가 확실한 것은 비록 여기에서는 하와에 대해서만 언급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이 사탄의 모든 속임수와 그가 토해놓은 모욕적인 언사에 동조했으며 따라서 그의 아내와 더불어 앞서 우리가 취급한 모든 것에 대해 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 바울은 디모데전서 2장에서 남자가 속지 않고 여자가 속았다고 말합니다.9 하지만 이것은 아담이 이 유혹에서 면제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 바울 자신이 아담을 통해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고 말하고10 이어서 아담이 불순종하고 반역했다고 말함으로써11 모순되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와가 미혹되었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이것은 비교법으로서 죄와 모든 악의 시작이 여자에게서 기인했다고 말한 셈입니다. 바울은 여자들에게 정숙하라고 권면하고, 지배 받는 것을 고통스러워 말라고 권면합니다.12 그는 여자들이 그들의 조상 하와에 이르기까지 지나치게 높아졌음을 지적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너희(여자)는 하와가 남자의 멸망의 원인이었음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희 위에 [남자를] 머리로 세우신 것이 그의 올바른 책벌임을 유념하라. 너희는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너희에게 책임이 있는 과오를 경고하셔서 그에게 용서를 구하고 회개의 마음을 갖게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이 복종을 너무 슬퍼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성 바울의 의중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담이 무죄하다거나 사탄의 제안을 전혀 몰랐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악이 여자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찌됐건 아담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에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보세요, 아담은 우리와 같습니다. 만일 아담이 부당한 위대함을 탐내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이 그에게 그런 수치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와가 먼저 공격당한 것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여러 계책 가운데서 여자를 장악한다는 계략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사탄은 남자보다는 오히려 여자에게 말을 걸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남자 역시 오염되었으며 둘 다 사탄의 속임수와 현혹에 동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복종에서 이탈했으며 동시에 그의 말씀을 거절했고, 심지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와 시기하는 자로 여기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요컨대 이것이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즉 사탄의 이 유혹에 미혹되고 넘어가서 패배하지 않는 남자와 여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전염병이 온 인류에게 퍼져있으며 그것을 느끼지 않는 남자나 여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는 두 성 모두 이렇게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마음(야욕)에서 온 왜곡된 지각


이제 모세의 말을 주목합시다. 그는 여자가 본즉 열매가 탐스러웠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녀에게 전에는 이 나무를 바라볼 눈이 없었다는 말입니까? 그녀가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호칭된 것을 몰랐단 말입니까? 그녀는 이전에는 먹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먹고 싶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순수하고 온전했습니다. 그녀의 눈이 미혹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이 오염되지 않은 상태로 있는 동안 그녀는 하나님께 범죄할 까닭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의하기에 합당한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 사악한 탐심으로 미혹되지 않고서는 위로나 아래로나 그 어떤 것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여인을 바라보면서 음욕이 동할 것입니다. 이 추잡한 눈짓은 어디서 올까요? 또 어떤 이들은 목장, 땅, 밭, 자산 등 무언가 좋은 것을 바라보면서 필경 “저것이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 “이 재물이 왜 내 것이 아니지…?”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눈이 우리를 유혹하는 방식입니다. 어떤 이들은 호색으로, 또 어떤 이들은 탐욕으로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모든 시선은 타락했으며, 따라서 우리는 죄를 범하지 않고서는 이것저것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의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듣든지 간에, 그것은 우리를 악으로 이끌 것이며 우리를 자극하여 하나님께 범죄할 계기로 삼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감각은 부패했습니다.


이제 이것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살펴봅시다. 악이 눈과 귀에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더욱 먼 곳에서 옵니다. 그것은 마음이 타락하고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감각은 내면에 감춰진 것을 드러내주는 전달자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너무도 약하여 세상과 사탄의 유혹에 의해 속아 넘어가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의 영혼이 부패했기 때문임을 깨달으며, 또한 그 오염이 너무 심해 그 결과와 열매들이 도처에 드러나 있음을 깨달읍시다. 바로 이것이 하와의 눈길이 바뀐 이유입니다. 이전에 그녀는 나무를 보았고 하나님의 금지령을 받고 순종 가운데서 그것을 지켰습니다. 그녀를 자극하여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아야한다”고 말하게 할 자극제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녀가 알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이런 고삐로 우리를 붙들어 두고자 하셨기 때문에 그의 권위를 해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를 빚어 만드시고 우리에게 후하고 인정 넘치게 자신을 드러내시며, 우리는 그로부터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모든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하와는 하루에도 십만 번 이 나무 앞을 지나갔지만 결코 먹고 싶은 마음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의심하기 시작하고 사탄의 독, 즉 하나님이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품으며, 결국 자신이 죽지 않으리라는 생각과 하나님이 거짓을 말했다는 생각이 들자, 야심이 그녀를 부추기어 방황케 하고 “비록 하나님과 본성에 어긋나지만 왜 이것이 우리에게 금지되었는지 알아봐야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던 것입니다. 그녀가 마음에 이런 독을 품었을 때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그녀는 독을 터뜨렸고 그리하여 악이 나와 그 모습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순수해진 마음을 갖는다면, 어떤 탐욕에도 동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바라볼 수 있고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며, 우리를 감동시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사실에 유념합시다. 나아가 우리가 세상의 모든 재화를 볼 때, 비록 우리는 가난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그래도 우리의 보잘것없음 안에서 그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온 세상에서 행해야 하는 방식이며,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껴야 하는 방식입니다. 한편 아무것도 아닌 것을 정도 이상으로 바라기 위해 독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런 순수함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 그가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려야 하며, 그를 닮으려는 마음 외에 다른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며, 우리의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그에게 두는 것이 우리의 모든 갈망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하와가 나무를 보았다고 기록된 말씀에서 우리가 명심해야할 내용입니다. 무슨 내용 말인가요? 추잡한 시선, 부패된 시각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마음이 이미 그녀가 품은 야심으로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계를 넘은 지식


1. 원죄의 출발점: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 이상의 지식 추구


이런 이유에서 또한 이 나무가 지식으로 인해 그녀를 기쁘게 했다고 기록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거니와,13 여기서 우리는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아는 것이 참된 지혜란 사실을 강조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 이상으로 알려고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안다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것이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바르게 아는 참된 규칙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면, 분명 우리의 모든 생각 모든 갈망을 지식에 몰두하는 것이란 훌륭한 행위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우리 조상 아담이 그의 아내와 더불어 실패했으며, 우리 역시 그의 본을 좇아 매일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참된 지식을 정의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아는 것은 훌륭한 일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방황에 빠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런 구실을 사용하며 우리로 하여금 필요 이상으로, 그리고 하나님이 권면하는 것 이상으로 사색하게 만듭니다. 바로 이것이 사탄이 빛의 천사로 가장하는 방식입니다. 성 바울이 이렇게 우리에게 경고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14 이것은 매우 유념해야할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슨 아름다운 명성과 외관을 갖추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옳다 인정되고 사면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판단하신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어떤 이들은 아담과 하와가 지식을 추구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동정 받을만한 요인이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지식 추구가 하나의 미덕이 아닙니까? 이 욕구가 칭송받아야 되지 않습니까?15 사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짐승과 구분하셨음을 그들이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성과 지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이[이성과 지성] 증가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우리 안에서 증가되고 더욱 더 증대되어 가야하겠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흔히 주장되는 내용이며 그래서 하와와 아담은 무죄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식으로 처리하고자 할 때 그것은 헛되고 하찮은 핑계로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정죄를 배가시킬 뿐입니다.


이와 같이 사탄이 그럴듯한 구실을 내세워 종종 우리를 미혹하며, 그에게 사면된 우리는 하나님께 정죄되지 않고 우리의 악행도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는 사실에 주의합시다. 왜냐하면 우리를 속이는 무슨 그럴듯한 외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는 인간들의 참된 지식, 참된 이론, 참된 지혜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만큼 깨닫는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라고 말했던 것이며, 이제 그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대로 우리 조상 아담이 스스로를 높이고자 했을 때 바로 거기서 넘어진 것입니다. 이후 우리는 아담이 가졌던 지식을 살펴볼 것이며 그의 자만이 그를 어디로 이끌고 갔는지 살필 것입니다. 이 문제는 보다 길게 설명될 것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할 교훈은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는 경우 외에 무언가를 알고자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바른 학생이 됩시다. 그러면 우리는 지혜의 완전함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이 [지식욕에] 안달할 경우, 사탄이 우리를 자극한다는 사실을 깨달읍시다. 자극받은 우리가 이성과 절제를 잃고 경계를 넘어서 망나니짓을 하도록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명심해야할 내용입니다. 즉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을 온전한 절제로 깨닫고 그 이상은 알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 하와가 미혹되고 그 결과 우리 조상 아담이 미혹된 것을 보면서 우리가 조심해야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보다 더 지혜롭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망각하고 사탄의 알랑거림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보는 대로 그들은 부패하게 되었고 동시에 그들의 모든 감각은 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모든 그들의 후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2. 원죄의 범위와 깊이


그러므로 우리가 아담과 하와 개인에게서 사탄의 이 독에 전염되었음과 한 사람의 죄와 반역으로 우리 모두가 죽었음을 유념합시다. 이는 우리가 그 안에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원죄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태에서 이 유산을 갖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선을 지향해야할 우리의 모든 감각을 밝고 바르며 조화 있게 비추기는커녕, 우리는 한쪽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모든 의지와 욕구는 부패하여 죄악으로 가득합니다. 어떤 이들은 파렴치에 빠져 있어 야수처럼 방탕하는 일에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또 어떤 이들은 사기와 위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몸과 우리의 영혼에 순수함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경험이 입증하듯이, 우리의 감각은 부패했습니다. 이것이 어디서 기인할까요? 우리는 그것을 유산으로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죄가 우리 모두를 멸망시켰으니 악이 그에게만 전가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하나님께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렇게 흔들리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 이미 원죄의 일부인 것입니다.


우리는 눈이 멀면 아무 것도 식별할 수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소송을 제기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소송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철학자들은 인간들이 그토록 부패했음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약간의 결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에게 모종의 이성이 있으며, 자유의지로 바르게 행동하고 처신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상상한 이유는 그들의 눈이 감겨있고 어둠에서 더듬거리는 소경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우리의 불평으로 사면된다고 믿는다면, 확실히 우리는 우리의 머리 위에 이미 너무도 커져버린 저주 속으로 더 깊이 빠져버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 안에서 우리 모두가 부패했음과, 악이 승리하고 오늘날 우리의 본성이 죄로 오염되어 그 결과와 영향이, 흔히 말하듯, 발끝까지16 나타날 정도임을 깨달읍시다. 그런데 여기서 이 죄는 누군가가 말하듯 모방에서 올 뿐만 아니라17 우리 안에 뿌리박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아담을 비교할 때 명백합니다.18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결의 거울이요 수호자가 되어 우리로 그를 따르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단순히 이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끌어가고자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주 직무가 우리 삶의 성결과 완전함이 무엇인지를 보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 그는 우리가 잃었던 생명을 소생시킨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인이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9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 되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그를 따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성령으로 우리를 중생시키고 그의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서 하나님 앞에서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고 우리가 그에게 합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실진대, 악을 온 후손에게 퍼뜨렸던 아담 안에 은밀한 능력이 있었음을 깨달읍시다. 실제로 다윗이 그가 죄 중에 있다고 말하고, 심지어 모태에서도 죄인이었다고 말하는 그의 고백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20


어린아이들이 아담의 방식대로 죄를 짓기 위해 나쁜 본을 따를 수 있을까요? 이것은 너무도 심한 빈정거림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죄 중에 있었으며, 잉태되자마자 죄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부모를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세상에 낳기 전에 이미 저주의 판결을 받았고 자신 안에 사악함뿐이었음을 말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성 바울도 우리가 진노의 자녀라고 말합니다.21 그의 의도는 우리 조상 아담에게 선포된 이 무서운 정죄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우리가 합당하지 않는 한 우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찌된 것일까요? 아직 선악을 행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죄인으로 정죄되어야 하다니요? 비록 죄가 단번에 나타나지 않고 그 열매를 맺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무튼 이 저주의 판결은 그들에게 있으며 그들은 독으로 가득한 새끼 뱀들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충분히 독을 드러냅니다. 이런 식으로 죄의 오염이 우리에게 임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로 돌려지며 우리가 그에게 미움 받아 마땅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우리를 향해 보복을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엄청난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었다면, 심지어 땅도 우리에게 열매를 가져다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우리는 하늘과 땅과 만물의 적대감을 받아 마땅하며,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유죄케 하기 위한 탄원자들과도 같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내려야할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엄격한 판관이 되는 것을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사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판관이 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를 긍휼로 받아들이고 온갖 죄를 우리에게서 면제시킬 준비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 이야기는 우리 눈앞에 놓여, 우리로 하여금 매일 아담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그가 넘어진 이 무서운 심연과 혼란으로 우리를 끌어들인 이후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마치 하나의 이미지처럼, 바라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이제 우리의 선한 하나님의 존엄 앞에 부복하여 우리 죄를 인정하고 우리가 그 죄를 느끼되 그것을 싫어할 정도로, 그리고 참된 회개로 그에게 나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준비된 처방을 구할 정도로 느끼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비록 우리에게 숱한 약함과 악함의 책임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가 무한한 선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실 것을 소망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물론 우리가 그 약함과 악함에서 벗어나고자 애쓰고, 우리의 악한 욕망과 싸우면서 날마다 노력한다는 조건 하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의 은력으로 항상 이기되 우리가 바라는 승리를 얻기까지 계속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이제 다 함께 고백합시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늘 아버지시여…”



주(註)

1. “악한 자가 이를 때에는 멸시도 따라오고”(잠 18:3 - 한글개역).
2. 앞의 창세기 설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1558년 봄에 행한 에베소서(2:2) 9번째 설교(CO, LI, 346)로 추정된다. 이중예정의 유기자들에 대해서는 「기독교강요」(I, xiv, 18; II, iv, 1; III, xx, 46)를 참조할 것.
3. 이것은 그레고리우스 대제와 그의 견해를 따른 피터 롬바르두스의 입장이다.
4. 예를 들어 테르툴리아누스와 히에로니무스.
5. 비교적 가까운 성구는 딤전 4:8이다.
6. 이 말로 칼뱅은 심령주의 리베르탱파를 암시한다. 그는 1545년 “리베르탱파 논박”(「칼뱅작품선집」 5권, 총신대학교출판부, 1995, 참조)에서 이들을 비판했다.
7. 렘 9:23.
8. 렘 9:24.
9. 딤전 2:14.
10. 롬 5:12.
11. 롬 5:18~19.
12. 딤전 2:15 참조.
13. 13번째 설교 참조.
14. 고후 11:14.
15. 이것은 Jacob Ziegler의 입장임.
16. 본문은 jusques au bout des doigts(손끝까지)이다.
17. 펠라기우스의 입장을 말함.
18. 롬 5:12 이하.
19. 롬 5:19.
20. 시 51:5.
21. 엡 2:3.[object TEXTAREA][object TEXTAREA][object TEXTAREA]

박건택 교수 번역
로이드존스연구사이트에서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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