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조나단 에드워즈의 교회사적영향
조나단 에드워즈의 교회사적영향
정확히 10월 3일은 에드워즈 탄생 300주년 기념일이다. 이 주간 미국 워싱턴 국회도서관에서는 에드워즈 탄생 300주년을 축하하는 국가적 심포지엄이 예일대학 주최로 열렸다. 지난 4월에는 에드워즈가 제3대 학장으로 있었던 프린스턴신학교 주최로 에드워즈 탄생 300주년 학회가 열렸었다. 금년 여름 미시간 주의 그랜드 래피즈에 있는 칼빈대학에서 연구하고 있던 필자는 어느 날 교내 게시판에 붙은 한 포스터를 보았다. 내용인즉 그 도시에 있는 어느 대형 서점에서, 최근 예일대학 출판부를 통해 에드워즈의 전기 결정판을 펴낸 미국 최고의 복음주의 교회사학자 조지 말스덴을 초청해 그 책 사인회를 연다는 것이었다. 필자도 그 모임에 참석했다. 약 30분간의 책 소개를 겸한 강연에서 말스덴은 미국이 세계에 가장 많이 수출하는 것 세 가지를 유머러스하게 소개했다. 그것은 물질주의, 섹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기독교라는 것이었다. 말스덴은 미국이 세계 최대의 기독교 선교국이 된 것은 다름 아닌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포함한 그의 복음주의적 저술 덕분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많은 미국인들이 벤자민 프랭클린을 미국의 국부라 생각하지만 사실 미국의 영적 국부는 조나단 에드워즈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에드워즈는 현대에 들어와 점점 더 위대한 인물로 재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본인 당대나 사후 200년 동안 에드워즈가 항상 그러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요즘 말로 하면 목회생활 20여 년 만에 자기 교회에서 배척당해 쫓겨난 목회자였다.
노샘프턴 교회에서의 해임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에 처음 도착했던 청교도 조상들(Puritan settlers)이 주장했던 “가시적 성도다움”(visible sainthood)을 회복하기를 원했다.1 청교도들 사이에서 “가시적 성도다움”이란 “가시적 거룩성”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그것은, 에드워즈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대한 신앙고백과 그것에 상응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가시적 성도성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적어도 코네티컷 골짜기(Connecticut Valley)에서는 거의 잊혀진 이슈였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성찬 참여 지원자가 복음의 핵심 교리에 대한 신앙과 그리스도인됨의 본질에 대한 충성의 각오를 공적으로 고백하고 현재로서 그 고백에 부합되는 인격과 생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성찬에 허입되는 필수 조건이라 주장했다. 그러므로 조건은 단지 기독교의 근본 진리에 대한 지식을 입증하는 것이나, 정회원권을 얻으면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생활의 본질을 구현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서약하는 것만도 아니었다. 현재로서 지원자는 자신의 신앙과 삶에 있어 기독교인됨의 본질을 소유하고 나타내는 자라야 했다.
그러나 교인들은 대부분 에드워즈의 견해에 반대했다. 그들은 이미 그의 외조부가 확립해 둔 느슨한 교회원권의 조건 및 성찬 참여 자격을 엄격한 에드워즈의 그것으로 대치하기를 원치 않았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오랫동안의 격렬한 갈등을 낳았고 그 결말은 에드워즈의 해임이었다. 23년간 노샘프턴에서 자기 생을 바쳐 그 곳을 정통과 갱신된 영성의 센터로 만들었던 에드워즈는 46세의 나이에 아내와 일곱 자녀를 데리고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측량할 수 없는 신적 섭리
에드워즈가 교회에서 나와야 했던 것은 그 자체로서는 유감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돌이켜 볼 때는 그게 자신과 하나님의 교회에게는 축복이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에드워즈의 증손자인 세레노 드와이트(Sereno Dwight)가 그들 중 하나다. “명백히 악의적인 외양을 가진 어떤 한 사건도 뉴잉글랜드 교회들의 개혁을 위해 그처럼 많은 기여를 한 것은 없다”고 그는 주장했다. 노샘프턴을 떠남으로써 에드워즈는 그처럼 오랫동안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교회 안팎의 적대적 인물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목회 말기의 여건으로 인해 에드워즈는 너무나 시달리고 사기가 저하되어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없었다.
또 하나 노샘프턴교회에서 해임됨으로써 생겨난 긍정적 결과는 에드워즈가 자신의 사상을 글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됐다는 것이었다. 노샘프턴은 크고 바쁜 목회를 요하는 교회였다. 그는 매주 두 세 개의 본격적 설교 준비 외에도 수행해야 할 수많은 목회적 책임에 둘러싸여 있었다. 반면 스톡브리지는 사실상 두 개의 독립된 회중들(영국인과 인디언들)이었지만 시간과 정력이라는 면에서 보면 훨씬 부담이 적은 곳이었다. 그는 전에 준비해 두었던 설교들 중 일부를 사용할 수도 있었고 인디언들을 위해서는 그것들을 아주 간단하게 축약할 수 있었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매주 설교를 완전히 새롭게 준비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수월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대표적인 신학 저술들을 집필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스톡브리지에서의 몇 해는 사실상 그의 생애에서 가장 생산적인 시기가 되었다. 그의 「자유의지론」(Freedom of the Will), 「원죄론」(Original Sin),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 「참 미덕론」(The Nature of True Virtue) 등의 대작이 이 시기에 나온 글들이다.
저술들의 영속적 영향
에드워즈는 비록 활발히 저술하고 활동할 수 있는 나이에 죽었지만 비교적 짧은 그의 생애동안 그가 이룬 업적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가 재구축한 개혁주의 정통은 1세기 이상 미국의 회중교회와 장로교회 신학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 침례교도들도 에드워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에드워즈의 책을 읽은 그들은 1784년부터 부흥을 위한 기도회로 모이기 시작했고 1789년에는 「비상한 기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분명한 의견 일치와 가시적 연합을 증진하기 위한 겸허한 시도」를 다시 찍어내었으며 1793년에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를 인도로 파송했다.
사실은 그보다 훨씬 전에 영국에서 에드워즈의 책을 보급한 사람이 있었다. 다소 뜻밖이지만 그는 존 웨슬리였다. 비록 교리적으로는 크게 달랐지만 웨슬리는 에드워즈의 영성과 부흥론에 심취했다. 그래서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 「뉴잉글랜드의 현재 종교 부흥에 관하여」, 「종교적 정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등 에드워즈의 최선의 작품들 중 몇 권을 요약 혹은 발췌 형태로 다시 출판했다. 에드워즈에 대한 웨슬리의 존경은 물론 그의 신학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웨슬리는 칼빈주의적 신념이 전도와 양립할 수 없다고 공격했다. 조지 휫필드가 칼빈주의자로서 그것이 그렇지 않음을 입증했지만 에드워즈는 글을 통해 그러한 공격을 가장 강력하고 성공적으로 반박했다. 에드워즈가 편집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만큼 선교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킨 책은 없다. 찰스 스펄전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예로 들면서 칼빈주의 교리가 부흥에 불리하다는 비난을 반박했다.2
뉴잉글랜드의 제2차 대각성은 약 40년 간 지속되었는데 이 기간 중에 에드워즈의 책들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그리하여 1808~9년에 매사추세츠의 우스터에서 북미 최초로 에드워즈의 전집 8권이 출판됐다. 당시 부흥의 특징이었던 “교리적, 체험적, 열정적” 설교가 일반 교인들로 하여금 에드워즈의 책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던 결과였다. 당시의 지도급 설교자들은 베넷 타일러(Bennet Tyler), 아사헬 네틀턴(Asahel Nettleton), 라이먼 비쳐(Lyman Beecher) 등이었는데 그들이 설교했던 진리들은 에드워즈의 그것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3 1836년 라이먼 비처는 자기가 “40년 이상을 에드워즈에 심취해” 살았다고 고백했다. 그뿐 아니라 1830년에는 목회 준비를 하고 있던 자기 아들 조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경 다음으로 에드워즈를 읽어라”고 권하고 있다. 신학 수업을 하다 보면 감정이 메말라지기 쉬운데 그는 꼭 그렇게 될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에드워즈를 모범으로 제시했다. 에드워즈는 “왕성한 지성, 사고의 폭, 논증의 힘, 성경 지식”을 “거룩”과 겸비한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었다.4
에드워즈 신학에 대한 가장 믿을 만한 해석은 거의 모두 프린스턴신학교의 학자들, 즉 찰스 핫지, 사무엘 밀러, 앗워터(Atwater)로부터 나왔고 1921년에 죽은 워필드에게까지 이어졌다. 19세기 초 영국 침례교의 지도자들은 에드워즈에 대한 공공연한 지지자들이었는데 존 라이랜드 같은 사람이 대표적 인물이다. 웨일즈의 칼빈주의적 감리교도들도 에드워즈를 부흥에 대한 성경적 관점의 가장 탁월한 옹호자로 간주했다. 스코틀랜드에서 에드워즈의 영향은 보다 직접적으로 발견된다. 19세기 최고의 전도자인 존 맥도날드는 에드워즈의 책을 읽다가 회심되었다. 토마스 찰머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수업 시간에 가장 많이 언급하는 신학자는 조나단 에드워즈다. 나는 오랫동안 그를 최고의 신학자로 평가해 왔다.” 그는 “심오하게 지성적”이자 “영적이며 거룩”하기 때문에 목회자요 철학자로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찰머스의 많은 제자들은 국내외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했는데 그들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에드워즈의 영향은 괄목할 만하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예는 아마 로버트 머레이 멕체인(Robert Murray M’Cheyne)의 사역일 것이다. 사역을 시작한 초기부터 부흥을 설교하고 믿었던 맥체인은 에드워즈의 작품들을 아주 깊이 연구했는데 1840년대 던디에서 그가 목회할 때 일어났던 각성은 노샘프턴의 부흥과 아주 유사했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후 에드워즈의 작품들은 대서양 양편에서 다시 무시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에드워즈에 대한 가장 유명한 저술가들 중 아더 쿠쉬만 맥기퍼트(Arthur Cushman McGiffert) 한 사람만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1911년에 출판된 「칸트 이전의 개신교 사상」이라는 저서에서 그는 에드워즈의 신학은 “시종 인간을 겸손케 하고 그의 전적 부패와 죄에 대한 절대적 노예 상태를 깨우쳐줌으로써 인간들을 안일한 무관심과 자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1932년에 출판한 「조나단 에드워즈」에서는 “하나님의 아버지되심(fatherhood)에 대한 사카린(saccharin)적 감상주의”를 비난했다. 마틴 로이드 존즈는 1929년 맥기퍼트의 첫 번째 책을 읽고서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후 에드워즈 전집을 발견하게 됐다. 존 얼스킨, 토마스 찰머스와 함께 로이드 존즈는 새 세대의 독자들이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50년에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생겨난 청교도 컨퍼런스에서 에드워즈는 반복적으로 토론과 발표의 주제가 되었다. 1957년 배너사(Banner of Truth Trust)가 웨스트민스터 채플과 함께 출판을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출판한 책들 중에는 「조나단 에드워즈」 선집 세 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배너사가 창립된 같은 해인 1957년 그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예일대학 출판부가 에드워즈의 결정판을 내기 시작했다. 예일은 강단과 그리스도인들보다는 대학 철학과와 미국 독립 전의 역사를 연구하는 미국 사학도들을 위해 에드워즈의 미출판 원고들을 포함하여 그것을 기획했다. 편집 총책임자인 페리 밀러가 제1권 ‘편집자의 말’에서 그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에드워즈의 교리들이 부활돼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은 본 편집의 의도와 전혀 거리가 멀다.” 20세기 미국에서 청교도주의 연구의 르네상스를 주도했음에도 아이러니컬하게 무신론자였던 밀러로서는 당연한 말이었다. 그 후 몇 년마다 한 권씩 출판된 예일 출판부의 에드워즈 전집은 지금 21권까지 나와 있다. 제1권은 「자유의지론」이요 제2권은 「종교적 정서」이다. 제3권이 「원죄론」이고 제4권이 「대각성」에 관련된 그의 글들이다. 제5권이 묵시록적 글들, 제6권이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글들, 제7권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 제8권은 윤리적 글들, 9권이 「구속 사역사」, 12권은 성찬 참여 자격에 관한 교회론적 논문들, 16권은 편지와 일기, 결심문 등의 개인적 글들이다. 연대별로 그의 대표적인 설교들을 모은 설교집들 4권(1720~23, 1723~29, 1730~33, 1734~1740 등)과 그의 심오한 묵상을 담은 “잡문들”(miscellanies)도 두 권, 성경을 읽으면서 달아 놓은 주석도 그 시리즈에 포함되어 있다.
약 2년 전 필자가 예일대신학대학원에 있는 에드워즈 연구소의 본 프로젝트 담당자를 만나 들었던 바로는 본래 이 기획은 50권까지로 되어 있었으나 대학 출판부에서 그것이 너무 길므로 27권에서 종료해 달라고 부탁해 왔기 때문에 28권부터는 인터넷에 온라인으로 올릴 것이라 한다. 물론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 대학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 고려됐겠지만 예일대 출판부 같은 곳에서 어떤 한 인물의 저서를 서른 권 가까이 출판하는 것은 아마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사실 그동안 에드워즈를 연구하는 것에 한계가 많았다. 왜냐하면 그의 주요한 대부분의 글들이 출판되지 않은 상태로 예일대학의 바이네키 도서관 같은 곳에 희귀 자료로 소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예일대 출판부의 노력으로 에드워즈의 가장 주요한 글들 대부분이 세상에 확실하게 그리고 신뢰할만한 방식으로 선을 보이고 있으므로 에드워즈를 연구하는 것이 훨씬 쉬워졌다.
에드워즈의 탁월성
에드워즈의 가장 큰 탁월성은 신앙에 있어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점에 있다. 깊은 경건과 예리한 지성이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경우라는 것이다. 대체로 냉철한 지성의 소유자는 가슴마저 싸늘하기 쉽고 감성이 발달된 신자는 지성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양면 모두에 있어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 이점에서 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흠모할 만한 모범을 제공한다. 그는 천부적 지성으로써 신학적 영적 진리들을 해부했다. 참으로 그는 면도날같은 분석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신학적 작업을 단지 이성의 능력만으로 행하지는 않았다. 그의 저술과 설교의 대다수는 자신의 깊은 영적 체험의 산물이었다. 자신이 직접 맛보고 깨닫고 감동받은 체험의 뒷받침 속에서 그는 성경의 계시와 진리들을 가르치고 제시했다. 그는 어떤 사역자들처럼 자신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나 “느끼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나고 느끼고 누린 그리스도를 가장 명석한 사고와 정확한 언어로 표현했다. 바로 그점이 에드워즈의 독보적인 탁월성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양면성 때문에 그의 사역은 당대에 폭발적인 능력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후대 교회에 영속적인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그가 죽은 지 3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전집 수십 권이 예일대학을 비롯한 세계 최고의 대학들에서 출판되고, 그의 생애와 저술들이 저명한 대학들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뿐 아니라 정상급 학자들의 연구 주제로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영성과 지성 양자 모두에 있어 비범한 경지에 도달한 에드워즈의 독특성 때문이다.
일관성 있는 일생: 체험적 신앙의 설교자
에드워즈의 평생은 일관성이 있다. 그는 20세 무렵에 자기 뉴잉글랜드 조상들과 같은 “단계와 방식”을 따른 회심을 체험하는데 평생의 주안점을 두기로 결심했다. 즉 단순히 교리를 수락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다른 말로는 구원을 얻고 그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 자기 생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우선순위를 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단호한 결심과 진지한 노력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의 비범한 종교적 깨달음 혹은 은혜의 체험은 그가 쓴 「개인적 진술」에 담겨 있다. 회심을 체험하고 구원을 확신한 후 그는 이제 목사로서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체험적 신앙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체험적 회심을 설교했다. 이점에서 기독교 교리적 지식과 그것에 대한 동의, 특별한 흠 없는 생활, 성례의 참여라는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면 구원받은 것으로 보던 칼빈이나 자기 외조부 솔로몬 스타다드와는 생각이 많이 달랐다.5 그는 많은 설교를 통해 “구도의 교리”를 가르쳤다. 일면 “준비론”이라고도 불리는 이 견해는 인간이 회심의 은혜를 받기 전에 죄를 확실히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낮아져야 한다는 것을 그 핵심으로 삼고 있었다.
에드워즈는 단지 복음에 대한 이론적 지식만으로 참된 믿음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믿었다. 그는 그 지식, 혹은 교리 위에 성령의 빛이 비칠 때 비로소 그 지식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복음을 믿기 위한 가장 일차적인 조건은 자신이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인간이 죄인이라는 명제에 동의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정말 멸망 받을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정죄하시는 것이 하나님으로서는 정의로운 행동임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명제를 덤덤하게 수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참으로 믿을 수 있으려면 “신적 초자연적 빛”이 그의 영혼에 비치어 그가 구주임을 “볼” 수 있는 시야가 열려야 한다. “영적 눈”이 열려 복음의 진리를 “감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지적 이해가 아니라 “영적 이해”이며 사변적 지식이 아니라 “영적 지식”으로 일종의 “체험”이라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영적 감각 혹은 “마음의 감각”에 의해 감지되는 은혜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현대 복음주의 교회들도 회심이 지적 동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지만 19세기 이후 복음주의의 보편적 추세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에 대한 의지적 수용이 구원 얻는 믿음이라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복음에 대한 지적 동의에 덧붙여 그것을 의지적으로 수락한 것조차도 구원 얻는 믿음이라 보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캘빈주의적 신봉자로서 인간이 구원의 은혜를 자기 결단에 의해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영적 “개안”의 체험 없이 단지 “결단”만으로 복음을 믿을 수 있다는 알미니안적 교리를 에드워즈는 부정했다. “그냥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복음의 진리는 사람이 “믿고 싶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게 해 주시는” 은혜, 즉 신적 빛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초청이나 영접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근거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자면 그리스도의 신성과 대속이 참으로 믿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믿는 것은 자기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오직 신적 초자연적 빛이 비취어야 사람이 그 사실을 믿을 수 있고 그 빛은 하나님이 오직 “은혜로” 그리고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단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지적이고 의지적인 요소 외에 감정적 요소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즉 복음에 대한 전인격적인 이해와 수용이 회심의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감정적 이해는 바로 영적 “체험”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전도와 선교에 대한 영향
에드워즈의 심오한 영성 신학의 영향으로 일어난 대각성과 부흥은 구령의 열정과 연결된다. 영혼에 대한 사랑과 전도의 열심은 19세기 미국의 세계 선교를 가져왔다. 경험적으로 말해서, 체험적 신앙이 없고 단지 교리적 정통만 있는 곳에서는 선교에 대한 열정이 발견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유럽 대륙에서는 17세기에 개혁주의 정통이 상당히 자리를 잡았지만 거기서는 선교의 열심이 나타나지 않았다. 정통이 단지 사변적 진리로만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학은 머리로는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 주었지만 그것을 마음으로 깨닫고 체험하는 것을 돕는 데는 실패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복음이 “말로만” 사람들에게 이르렀지 “성령과 능력과 큰 확신으로”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사변적 합리주의 신학은 자유주의의 이성주의적 신학 앞에 맥을 추지 못한다. 18세기의 정통주의가 19세기의 자유주의 앞에 무릎을 꿇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 감정이 배제된 신앙으로는 부흥이 있을 수 없다. 실존적 체험이 없는 신앙은 무능력하다. 감격과 헌신이 없이 미지근하고 습관적인 신앙생활만 남을 뿐이다. 확신이 없는 데 투신이나 헌신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선교도 어렵다.
후대의 사역자들이 본받아야 할 점들
모든 인간이 다 마찬가지지만 에드워즈의 성경해석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도 청교도 신학의 한계나 약점을 간직했을 수 있다. 청교도의 가장 위대한 대변인이라는 밝은 면의 반대쪽 면은 청교도적 한계나 약점을 공유하는 것이다. 중생의 표준을 지나치게 높인 측면이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설사 에드워즈에게 부분적으로 신학적 약점이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에드워즈의 경건과 높은 영성은 우리가 흠모하고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은 단지 그의 신학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순수한 열정과 헌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열심, 복음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를 사용하셨다. 에드워즈가 주장하는 바 “체험”이 없다고 해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영적 “체험”을 겸비한 신앙은 단지 교리에 대한 이성적 이해만으로 이루어진 신앙보다 차원이 훨씬 깊고 높음에 분명하다. 복음에 대한 전인격적 이해는 단지 지성적 이해나 의지적인 수용뿐인 신앙보다 더 온전하고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드워즈의 높은 영적 차원에 도전을 받고 그가 제시하는 높이를 우리의 목표로 삼고 추구하는 것이 잘 하는 일이다. 에드워즈의 구원론을 불신자를 위한 회심의 기준으로써가 아니라면 최소한 신자가 추구해야 할 성화의 목표로 삼고 추구한다면 우리의 영성과 경건에 큰 유익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에드워즈의 신학을 구원론으로서보다 성화론의 교과서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개인과 한국교회에 말할 수 없는 큰 축복이 될 것이요 하나님의 교회에 새로운 위대한 역사가 펼쳐질 것이다.
주(註)
1. 혹자는 에드워즈가 생각했던 것이 사실상 1662년의 중도 언약(Half-way covenant)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에드워즈는 1747년에 출판된 「종교적 정서」에서 자기가 주장하는 바가 이전의 청교도들의 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그 전의 청교도 신학자들은 교회원권 지망자들에게 그들의 특별한 회심 체험의 과정과 방식(the particular steps and method)을 진술하는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한 영혼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 성령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신 순서와 방식(order and manner)을 진술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 믿었다. 그는 신앙고백자를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그 체험의 결과, 즉 거룩한 삶이라는 열매가 더 결정적이라고 보았다. Jonathan Edwards, Religious Affections(Yale University Press, 1959), ed. John Smith, pp.416, 418∼419.
2. C. H. Spurgeon, Autobiography : 2. ‘The Full Harvest’ 1973, p.46.
3. 라이먼 비처는 1799년에 롱아일랜드의 이스트 햄프턴 교회 목사 사무엘 뷰얼의 후임으로 임직한 설교자였는데 뒤에 언급되는 바대로, 뷰얼은 에드워즈의 문하생이었고 제1차 대각성 중에 에드워즈 교회에서 한 달 이상 설교하여 노샘프턴 교회 부흥을 가속화시켰던 인물이었다.
4. The Autobiography of Lyman Beecher, Ed. B. M. Cross, 1961, vol. 2: pp.177∼78.
5. 그러나 어떤 때는 캘빈도 단순히 외적 교리적 동의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인상을 준다. 이를테면 믿음을 논하는 장에서 그는 믿음이란 “내적 확신”이며 “성령의 증거”를 요하는 것이란 점을 강조함으로써 단순한 교리 체계에 대한 수락과 동의, 즉 지적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굳이 그것을 조화시키려면 외적 요소들은 단지 지상 교회의 멤버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생각했고 내적 확신 내지 성령의 증거는 구원에 이르기 위한 요소들로 생각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시적 교회의 회원이라고 해서 모두 구원받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면 캘빈의 주장과는 아무 상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