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자료

[스크랩] 박형룡 박사의 “본질과 위격”이승현

baromi 2008. 4. 15. 10:16

박형룡 박사의 “본질과 위격”


                              이승현 (조직신학 Th.M 2007301013)


제 1장 서론


1. 연구 목적과 방법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1) 중에서, 삼위일체의 핵심인 위격과 본질에 관하여 이해하며 이를 통하여 삼위일체의 교리를 다시금 정립하고자 한다, 박형룡 박사 외에 다른 신학자들, 즉 칼빈2)과 벌코프3)와 찰스 하지4)의 저서에서 나타난 위격과 본질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고, 동시에 박형룡 박사와 제 신학자 사이의 연구를 비교하고 차이점을 조사해 봄으로서, 박형룡 박사의 신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박형룡 박사를 위시한 제 신학자들의 위격과 본질에 관한 교리를 요약하고 나서, 각각의 신학자들과 박형룡 박사를 비교한 후에 결론을 짓는 방법을 택하였다.

   

 

제2장 박형룡 박사의 ‘위격과 본질’


 위격과 본질은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이므로, 박형룡 박사의 삼위일체 교리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삼위의 각론에도 산재해 설명이 되고 있다. 따라서 따로 분리시키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 글에서는 전반부의 교리적 진술에서 위격과 본질이 포함된 부분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1. 유일불가분적 본체


 신적 존재에 유일하고 불가분적인 본체가 있다.  하나님은 그의 본체적 존재 즉 본질적 본성에서 하나이시다.

1) 본체의 말뜻 : 본체(실체)란 ‘우리가 대하여 말하고 있는 그 무엇’ 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실체는 하나님이 되어 계실 바 그 무엇(whatever it is to be God) 이다.

2) 유일불가분성

신적 본체의 유일성은 하나님의 유일성이 함의하는 진리이다. 하나님의 유일성은 단수성과




단순성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신적존재에 유일 불가분적인 본체가 있다고 서술하게 된다. 즉 신적존재의 본체는 수적으로 유일이며 내면적 품질적으로 유일이어서 분할될 수가 없다.

 

2. 삼위(位) 혹 삼실재(三實在)


 한 신적 존재에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인격) 혹 삼개체적 실존들(subsistences)이 있다.

1)위의 말뜻

 헬라저술가들은 일반적으로 ‘휘포스타시스’5)라는 명사를 사용하고 라틴 학자들은 ‘페르소나’혹은 ‘수브스탄티아’ 라는 명사를 사용하였다. 전자는 그릇 인도하기 쉽고 후자는 애매한고로 스콜라 학자들은 ‘수브시스텐시아’(실존)6)라는 말을 새로이 만들었다. 여러 가지 명사들이 사용된 사실은 그것들이 항상 적당하지 않게 보였다는 것을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위’(person) [위,품위,격위,신위,인격]라는 말은 그 관념의 불안전한 표현이라고 인정된다. 보통 언사에 있어서 이것은 자의식을 가지고 모든 변화 중에서 자기의 동일성을 의식하는 이성적 도덕적 개체를 가리킨다.

2) 위의 구별

 하나님 안에 삼개체가 열립되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오직 신적 본체 안에 위(인격)적 자아구별이 있으며, 그것은 종속적으로 하나일 뿐 아니라 또한 수적으로  하나이다. 하나님 안에 세 실상(휘포스타시스)이 있으며, 사벨리우스가 가르친 것과 같은 현현의 세 양식이 아니라, 존재 혹 실존 (existence or subsistence)의 세 양식이 있다.

신적 존재 안에서 서로 간에 인격적 관계를 맺으신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안에는 사람 안에 발견되는 것보다 매우 다르고 독특한 형식의 인격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이 세계의 생명의 단계적 계단에 있어서 단순한 형식으로부터 복잡한 형식으로 승진하는 도중에 수많은 종류의 양태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3) 유일성과 조화

 신격의 삼 인격(위)적 구성은 이성의 재량을 초월하여 초자연 계시만을 통해서 우리에게 확인이 될 찌라도, 성자 성령이 유일신이라는 제언에는 모순이 없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속성들이라고 칭하는 모든 신적 완성들을 구성하는 영원한 자존적 신적 본체는, 동일한 의미와 정도로 모든 위들에게 공통이다. 이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이시다. 그러나 이 신적본체는 인격(위)적 특성들에 의하여 구별되는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영원히 존재하신다. 이 의미에서 그들은 셋이다. 우리가 이것을 믿는 것은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신  때문이다.




3. 각위에 전본체


 1) 수적 유일성

 하나님의 분리되지 않은 전 본체가 삼위의 각자에게 동등으로 속한다. 이것은 신적 본체가 삼위에게 분배된 것이 아니라 , 그 모든 완성들을 가진 전체로 삼위의 각자에게 있어서 그들이 본체의 수적 유일성을 가지게 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적 성질이 인적 성질과 구분되는 점은 하나 이상의 인격(위)안에 ‘전체적으로’ 또는 ‘불가분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사람 가운데 세 인격은 성질 또는 본체의 종류적 유일성을, 즉 같은 종류의 성질 또는 본체를 가질 뿐이나, 하나님 안에 삼위(인격)는 본체의 ‘수적’ 유일성을 즉 한 개의 본체를 소유하신다. 신적 본체는 수적으로 하나이고 같으며 따라서 위들에 있는 본체의 유일성도 수적 유일성이다. 동일한 신적 본체가 삼위로 동시에 존재함이 가능함은 그것은 영적 본체이기 때문이다. 물질의 경우에는 세계의 동시적 형체들은, 필연적으로 세계의 상이한 물건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마음 또는 비물질적 본체인 경우에는 동시적인 세 형체 또는 양태가 필연적으로 상이한 세 마음이나 세 본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각위는 전 실유7)와 동일하고 다른 두 위를 합한 것이나 세위를 다 합한 것과도 같다.

 삼위의 각 위가 수적으로 동일한 본체를 소유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몇몇 성구들을 다음과 같다  골2:9,요10:30,요14;11,고후5:19

2) 병립이 아니다.

 신적 본체는 삼위와 병립한 독립적 존재가 아니시다. 삼위를 떠나서 그 밖에 존재하신 것이 아니다. 만일 신적 본체가 삼위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신다면 참된 유일성은 있을 수 없고, 사신론으로 끌어가는 분할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삼위의 신적 본체와의 관계를 묵상할 때 모든 유추는 실패로 돌아가고 삼위일체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가는 신비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신격의 이해될 수 없는 영광이다.

 인적 성질이 단일 개인에게 체현8)되기에는 너무 풍부하고 충만하여 오직 인류 전체에서만 상당한 표현에 달하는 것 같이 신적 존재도 오직 아버지, 아들, 성령의 삼양실존9)에서만 그 자신을 충분히 펼쳐 보이시는 것이다.


4. 일정한 순서


 신적 존재 안에 삼위의 실존과 공작은 일정하고 명확한 순서를 가지고 있다.

1) 본체적 삼위의 순서

 본체적 삼위일체(ontological Trinity)에 일정한 순서가 있다. 위적 실존에 있어서 성부는 제 일이요, 성자는 제 이요, 성령은 제 삼이시다.

 성경은 성삼위의 명칭을 항상 이 순서로 진술한다.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명칭들은  위적 실존의 이 순서를 지시한다.

 이 순서는 시간이나 본체적 존위의 선후를 가리킴이 아니라, 위적 명칭들이 함의하는 인출(derivation)의 논리적 순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성부는 다른 위에게서 발생되거나 발출(proceed)하지 않으시고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적으로 발생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부터 발출하신다.

 이 발생(generation)과 발출(procession)은 신적 존재 안에 있는 것으로, 위적 실존의 양태에 관한 어떤 종속을 의미한다.(신적 본체의 지위에 관한 한에는 종속이 없다)

2) 외적 관계의 순서

 이 본체적 삼위일체와 그 고유적 순서는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의 형이상적 기초이다. 그러므로  본체적 삼위일체에 존재한 순서가 보다 더 특수하게 각 위에게 돌려지는 것은 외향적 사역(opera ad extra)에 반영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경은 이 순서를 만물들이 성부‘에게서’ 낳고, 성자로 ‘말미암고’ 성령‘안에’ 있다고 표현하였다. 고전 8:6,요1:3,14 같은 구절들이 예증으로 인용된다.

 신격의 피조물에 관한 외적 관계의 순서를 말하면 a) 성부는 영원한 로고스, 혹 하나님의 말씀, 성부위의 명확한 형상이신 성자 안에 보여지신 대로만 상당히 계시되셨다. (요1:18) 그리고 b)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통해서만 피조물 위에 인격적으로 동작하신다.

  “성부는 불가견, 무형하여 아무 사람도 일찍 보지 못하였고, 능히 볼 수 없는 신격의 전적 충만이시다.” “성자는 현현된 신격의 전적 충만이시다." "성령은 피조물 위에 직접적으로 동작하시며 그리하여 성자의 형상 안에 또는 자기의 권능을 통하여 성부를 나타내시는 신격의 전적 충만이시다.”


5. 상이와 구별


 삼위가 구별되는 일정한 상이들이 있다. 성경 계시에 의하면 삼위의 위적 특성들은 현저하고 특수하여 서로 상대적이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 실존의 양식에서 서로 판이하여 동작의 질서에서 서로 달라 그 한 위에서 돌려질 수 있는 동작의 질서가 다각 위에게는 돌려질 수 없다.

1)실존의 상이

 성부는 스스로 존재하시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발생을 통하여 존재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을 통하여 존재하신다.

2) 사역의 상이

 이 존재의 양식의 상이들은 동작의 상이들을 포함한다. 즉 하나님의 실존의 양식의 상이를 사역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사역의 상이인 것이다.

a) 내향적 사역

 이 서로 다른 사역들은 신적 실유의 내부에 있는 사역이고 피조물을 목표로 하지 않는 고로 내향적 사역이라 칭한다. 이 사역들은 삼위 합작에 의하지 않고 비공동적인 각위 자신적 사역이다. 발생은 성부만의 동작이요, 아들됨은 독점적으로 성자에게 속하고 발출은 성령에게만 돌려진다.  제 일위는 제 이위를 발생하고 그를 통하여 사역하시며 제 일위와 제 이위는 제 삼위를 내어보내시고 그를 통하여 역사하신다.

b)외향적 사역 

 내향적 사역으로서의 앞에 기록한 일들과 구별되어 삼위일체가  외계적으로 현현하는 활동 이나 그 결과는 구별된다. 이 외향적 사역은 한 위의 독점적 사역이 아니라, 항상 신적 존재 전체의 사역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경험에 있어서 하나님의 어떤 사역은 더 특수적으로 한 위에게 돌려지고 어떤 것은 다른 위에게 특별히 돌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 사역들은 비록 삼위 합작의 사역이지만, 창조는 주로 성부에게, 구속은 성자에게, 성화는 성령에게 돌려진다. 신적 사역에 있는 이 순서는 하나님 안에 있는 본체적 순서를 지시하는 것이니,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지는 바의 기초를 구성한다.

3) 본체적, 경륜적 구별

 앞에 기록한 하나님의 실존과 사역의 상이에 밀접하여 본체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구별이 있다.

 본체적 삼위일체란 영원부터 신격 안에 실재한 대로의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그들의 본체적 내면적 생활에서 성부, 성자, 성령은 실체에서 동일하시고, 속성과 본권에서 동일하시고 따라서 영광에서 동등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세계와의 관계를 떠나 그의 본체적 존재에 대하여 설명함이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세계와의 관계에 나타난 대로의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사역의 관점에서 보면 내향적 사역은 본체적 삼위일체에게 귀속되고, 외향적 사역은 경륜적 삼위 일체의 일이다.


6. 동등과 종속


 삼위는 본체적 실유에 관한한 절대적으로 동등이요, 따라서 위적 존위에 차이가 없다. 그러나 위적 실존의 양태, 사역에 관한 순서와 관계의 종속이 있다.

1) 동등

 하나님의 분리되지 않는 전 본체가 삼위의 각위에게 속한다는 진리에 따라오는 결론은, 하나님 안에 한 위와 다른 위 사이에 본체적 존재에 관한 종속이 없으며, 따라서 위적 존위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삼위는 영광과 권능에서 피차 동등이시어 그 한 위가 다른 어느 위보다 크거나 작거나 함이 없으시다. 이같이 차이들이 있을 수 없음은 각 위가 신적 본체의 전부를 소유하고 일부만을 소유하지 않으신 때문이다.

2) 종속

 고대 철학자들은 성자의 성부로부터의 영원발생과 성령의 성부, 성자로부터의 영원발출은 본체의 인출을 포함한다고 주장하였다. 니케아 신경에 성자를 정의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하나님,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라고 한 것은 이 뜻을 포함한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삼위의 본체의 수적 단일성을 강조함에 의하여 종속의 관념을 완전히 배제하였다. 그러나 성자의 발생과 성령의 발출은 위적 실존의 양식에 관한 어떤  종속을 함의하는 것이며 그것에 따라 사역의 순서에 종속이 있는 것이다. 경륜적 삼위일체의 사역에 있어서, 구속의 사역과 세계의 일반적 정치에 일정한 절차가 있으니 성부의 창조와 세계를 위한 일반적 계획의 사역은 기초적이요, 성자의 세계 구속의 사역은 성부의 사역에 종속하고 의존하며 성령의 구속 실시의 사역은 성부와 성자의 사역에 시간적으로 뒤서고 종속하고 의존한다. 하나님이 이 세계에서 행하시는 가장 크고 중요한 구속의 사역에 있어서 논리적 순서가 있으니 성부의 사역은 제일이요, 성자의 사역은 제이요, 성령의 사역은 제삼이다.


7. 신비하나 진리


 삼위일체의 교리는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라고 교회는 고백한다. 우리는 시인과 함께 부르짖어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시139:6) 하게 된다. 삼위일체는 사람이 능히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되기 쉽게 설명하지 못할 진리이다.  이 신비를 설명하기 위하여 시도된 노력은 신학적이라기보다 사색적이어서 삼신론이 아니면 일신삼현론을 유치하여, 신적본체의 유일성을 부인하거나 또는 그 본체 안에 위적 구별의 실재성을 부인하거나 하였다. 교회는 도무지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았고 다만 이 교리를 작성함에 있어서 이것을 위험에 빠지는 오류를 방어하도록 노력한 것뿐이었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앙모할 때의 느낌은 마치 정오의 태양을 우러러 볼 때의 그것과 같다. 유한자는 무한자를 이해하기 곤란하니 성부 성자 성령의 신기한 품위는 교회의 최대한 신학자들의 모든 연구에도 불구하고 깊은 신비로 영원히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해와 설명이 곤란하다고 하여 진리가 진리됨을 중지하거나 신앙할 가치를 상실하지는 않는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비를 제출하나 모순을 제출하지는 않는다. 이 교리는 하나님은 본체 혹은 실체라는 점에서 하나이시라고 단언하고, 일위신론(유니테리안)입장과 세 하나님이 있다고 단언하는 삼신론을 반박함에 유리하다.


8. 다양유추의 예증


 교회의 초대로부터 여러 가지 원천에서 인출된 유추에 의하여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가 모순이 없음을 밝혀 보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이 유추들은 다 불완전하나 삼위일체의 논의에 얼마의 가치를 가졌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사람의 심리구조에서 인출된 유추들의 경우에 명백한 사실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실에 비추어 추상하면 삼위 일체적 생활의 어떤 종적들이 피조물에 있는 때에 그 가장 명료한 종적들이 사람 안에 발견될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10)



제 3장 칼빈의 위격과 본질 이해


 기독교강요의 내용은 그 특성상 각 주제에 따라 내용을 완전하게 나누기가 어렵게 느껴진다.  주제별로 다시 정리하여 제목과 순번을 붙였지만 확실하게 분리된 것은 아니다.  


1. 하나님의 본질11)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하시며 영적이시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는 일반 대중의 망상을 일축할 뿐 아니라 세속 철학의 교묘한 이론을 논박하기에 충분하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잣대로 그를 재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며, 또한 그가 영이시라는 사실은 그에 관한 어떤 세속적이며 육신적인 상상에 빠지지 못하도록 만든다.


2. 성경만이 논의의 근거12)


 하나님 자신이 자기 자신에 대한 유일한 정당한 증인이시며 또한 하나님 자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를 알 수가 없는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대로 그를 생각하며, 오직 그의 말씀만을 근거로 해서 그에 대해 탐구한다면 그것이 바로 그 지식을 하나님 자신께 맡기는 것이 될 것이다.


 3. 위 개념의 의미13)


  “위”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의 한 “실재”(subsistence)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실재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교통한 수 없는 특성에 의하여 저들과 구별된다. 우리가 의미하는 실재라는 말은 본질이라는 말과는 다른 무엇을 뜻하는 말이다.

 만일 “말씀”이 다만 하나님일 뿐 아무런 특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면,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1:1)라고 한 요한의 말은 부당한 말이 될 것이다.

 그 즉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고 첨가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우리에게 본질의 단일성을 상기시켜 준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성부 안에 계시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함께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실재의 관념이 명백해진다.  즉 실재는 본질과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어 본질과 구별될 수는 없지만, 그러면서도 본질과 구별되는 특수한 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 실재는 상호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에 의하여 서로 구별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여기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단순하게 또는 막연하게 언급할 때에는 이 말은 성부에 못 지  않게 성자와 성령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4. 삼위일체나 위 등의 용어 사용의 정당성14)


 어떤 이들은 이 위(person)라는 용어는 사람의 생각이며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이유로 거부한다. 성경과 ‘이질적인’ 용어들로 인해 분란과 논쟁이 되게 하는 것보다 우리의 사고와 용어까지도 성경의 테두리 안에 제한시키자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고 그 단어들을 ‘이질적’이라고 한다면 성경에 나타나 있는 단어들로 표현되어있지 않은 모든 성경 해석들을 다 정죄하는 그런 부당한 법칙을 부과하는 것이며, 성경에 우리가 이해하기 곤란한 난해한 내용이 있을 경우에 그것들을 좀 더 명확한 언어로 설명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쉽고 진리를 명확하게 하는 해주는 것이다.


5. 한 본질, 세 위격


 단일한 한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 언급 없이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는 경우는 언제나 성부는 물론 성자와 성령도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각 위마다 고유한 특성들이 있으므로, 그들 내에서 하나의 순서가 있게 되는데, 성부에게 시작과 근원이 있어서, 성부가 성자를, 혹은 성부와 성령을 함께 언급할 때 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특별히 성부에게 적용된다.  하나님의 본질이 하나이며, 따라서 성자와 성령이 낳은바 된 것이 아니지만, 성부께서 순서상 첫째가 되시고 또한 그가 친히 그의 지혜를 낳으셨으므로 성부를 가리켜 신성 전체의 시초요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우리는 위격을 본질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고 각 위들이 그 본질 내에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서로 구별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6. 삼위의 구별15)


 성경은 성부와 말씀, 그리고 말씀과 성령을 구별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규명함에 있어서 얼마나 경건하고 신중해야 하는가를 그 신비의 중대성이 경고해 준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즉시 삼위의 광채에 둘러싸이지 않고는 단일성을 상상할 수 없다. 또한 곧바로 단일성을 상기하지 않고는 삼위를 분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사고를 혼란하게 만들어 하나로 즉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식의 위의 삼일성을 상상해서는 안 된다. 실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말을 실제적인 구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을 통하여 여러 가지로 지시되는 이 하나님의 명칭들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별이지 분할이 아니다.

 성부와 성자가 대조될 때에는, 언제나 각자의 특성에 의해 상호 구별되는 것이다. 각자에게 고유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부에게 속한 구별의 표지는 성자에게 속하거나 성자에게 옮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는 본질의 단일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일종의 분배 혹은 경륜이 있다고 하는 터툴리안(Tertullian)의 정의를 올바르게만 이해해야 한다


7. 삼위의 관계16)


 성부가 전적으로 성자 안에, 성자가 전적으로 성부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이 다양성의 원인을 아주 명백하게 설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며 성부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성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성부가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성자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에는 성부라고 불린다. 성자에 대하여 성부라고 불리는 한 그는 성자가 아니며, 성부에 대하여 성자라고 불리는 한 그는 성부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불린 분과 자신에 대하여 아들이라고 불린 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부와 아무 관련 없이 단순히 성자에 대해서만 말할 경우 그를 가리켜 자존하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타당한 주장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그분을 유일하신 근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절제를 사랑하며 믿음의 분량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알아 두면 유익한 것을 다음과 같은 간단한 형식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자. 즉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며 단일하신 본질로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 또는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특수화함 없이 언급될 떄 이 명칭은 성부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 또한 지칭한다.

그러나 성자가 성부와 연합될 때 양자는 상호 관계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위들의 사이를 구별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각 위의 특성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예를 들면, 성부에게 시작과 근원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 혹은 성부와 성령이 동시에 언급될 때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언제나 성부에게 특별히 적용된다.

 이와 같이 하여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되고 그 정당한 순서가 유지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조금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여호와라고 증거한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사도들이 주장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항상 본질의 단일성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17)

 그러므로 성자를 가리켜 성부와 다른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증스러운 신성 모독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단일 명칭은 어떠한 상관 관계도 허락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런 하나님이다 혹은 저런 하나님이다 하는 식으로 불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구별되어 있다는 것은 완전한 단일성의 모순이 아니다. 각기 자기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보유하시면서 각 본체(위격)안에 온전한 신적 본성이 거하시는 것이다.18) 성부께서는 온전히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온전히 성부 안에 계신다. 삼위의 구별을 나타내는 이름들은 삼위들이 서로 간에 갖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지, 그들이 하나를 이루고 있는 본질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한분 하나님이신 반면에 성경은 구별된 삼위의 존재를 증거 한다. 그러나 이것은 구별이지 분할이 아니다.


8. 성자와 성부의 구별19)


 성경은 성자가 성부와 구별된 성격을 지니고 계심을 보여준다. 성자께서 자신을 증거 하시는 이가 따로 계시다고 말씀하시며 구분 짓고 계신다. 이 땅에 강림하신 것도 성부가 아닌 성자이셨고, 성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자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이미 위에서 인용한 말씀들은 성자가 성부와 구별되는 특성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말씀이 성부와 다른 분이 아니라고 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실 수 없으며, 따라서 말씀이 성부와 구별되지 않는다고 하면 성부와 더불어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자는 자신을 성부와 구별하여,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성부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하셨는데, 이 또한 같은 말씀을 하려는 데 있다. 말씀과 구별되지 않고서는 성부는 이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지상에 오신 분은 성부가 아니라, 성부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은 바로 그 분이시다. 성부는 죽지도 아니하시고, 부활하지도 아니하셨고, 다만 성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었다. 이러한 구별도 성육신 때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에 앞서 “아버지 품속에 독생하신 하나님” 이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성자가 인성을 취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기 전에는 아버지의 품속에 들어가지 않으셨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벌써 그 이전에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으며, 자신의 영광을 아버지와 더불어 누리셨던 것이다.


9. 성부와 성령의 구별20)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 이라고 하심으로써 성령이 성부와 구별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가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다른 곳에서도 자주 그렇게 말씀하신 때처럼 성령을 “다른 분”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성령이 자기와 구별된다는 것을 암시하셨다. 곧 성부는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이시며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으며,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10. 삼위의 순서와 사역21)


 실로 하나님은 지혜와 권능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으시며, 또한 영원에 있어서는 “먼저”니 “나중”이니 하는 것을 찾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성부의 영원성은 또한 성자와 성령의 영원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부가 먼저 생각되고 다음으로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을 생각하게 될 때에 삼위의 순서를 고찰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먼저는 하나님을, 다음으로부터 나온 지혜를, 그 다음으로는 그 계획의 작정을 수행하시는 능력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자는 오직 성부에게서만 발생되며 동시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생된다고 말한다. 이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지만, 로마서 8장보다 더 분명하게 진술된 곳은 없다. 더욱이 이 구별은 하나님의 가장 단순한 단일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자는 성부와 더불어 같은 영을 소유하시기 때문에, 성자가 성부와 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따라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성부, 성자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증명해준다. 왜냐하면 그 모든 신적 성품이 각 실재 안에서 이해되며 따라서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난 사실은 이것이다. 모든 활동의 시작과 모든 일의 근원과 원천은 성부께 있고, 또한 모든 지혜와 경륜과 모든 일의 질서 있는 시행은 성자께 있으며, 그 활동의 능력과 효력은 성령께 있다는 것이다.


11. 삼위와 세례22)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하여 자신을 한층 더 명백하게 계시하셨으므로, 삼위에서 더욱 친밀하게 자신을 알리시게 되셨다. 그러나 많은 증거들 중에서 우리는 이 한 가지만으로 만족할 것이다. 그 이유는, 바울이 하나님, 믿음, 세례 이 세 가지를 그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추리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이 하나이기 때문에, 주도 하나이며, 또한 그는 세례가 하나이기 때문에 믿음 또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세례를 통하여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종교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면, 우리는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하신 분이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실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19) 라고 하신 이 엄숙한 명령에서 주님께서는 신앙의 완전한 빛이 현현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셨다는 사실에는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아주 명백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주 명백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한 하나님으로 알려진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12. 삼위는 공통적으로 신격23)을 소유함


 우리는 성경에 입각해서,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성자, 성령의 본질이 비발생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부는 순서상 처음이시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으로부터 자기의 지혜를 낳으셨기 때문에, 모든 신성의 기초가 되시며 원천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무한정적으로 볼 때에 발생하신 분이 아니시며, 성부 또한 위라는 점에서는 발생된 분이 아니시다

 이와 같이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세 하나님이 본질로부터 유래 된다고 상상이나 한 듯이, 삼위일체를 구성함에 있어서 본질이 협력 하였는가 아니하였는가라고 묻는 그들의 그 무익한 질문에 대답이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없이도 삼위일체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저들의 답변 역시 똑같은 우매함에서 나온 말이다. 왜냐하면 본질이 삼위일체의 부분 혹은 한 성원으로서의 구별을 짓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위들은 본질 없이 혹은 본질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성부는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부가 될 수 없으며, 성자 또한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격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존하신다고 우리는 고백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존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이요, 그의 위에 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실로 그가 성자인 이상, 우리는 그가 성부로부터 오셨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그의 본질에는 기원이 없으나 그의 위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다. 옛날의 정통적인 저술가들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언제나 이 명칭을 오직 위에만 적용시켰다. 왜냐하면 본질을 이 구별 안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어리석은 과오일 뿐만 아니라 가장 큰 불경건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가 본질 성자 성령의 셋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분명히 성자, 성령의 본질을 멸절시키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여러 부분은 서로 혼동하여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구별은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성부와 하나님이라는 말이 동의어라고 하면, 성부는 이때 신격의 원작자가 될 것이며 성자에게는 그림자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과 두 피조물을 결합한 것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13. 성자의 본질이 하나님이심2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멈추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한다고 할 것 같으면, 성부, 성자에게 공통된 하나님의 유일하신 본질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확실히 그리스도는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높이 올리셨으며 동시에 자신이 성부와 하나이신 까닭에 우리를 자신에게 까지도 들어 올리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성부에게만 한정시키고 성자에게서는 이를 배제 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며 부당한 일이다. 이것 때문에 요한은 그리스도 께서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였는데(요 1:1;요일 5:20) 이것은 아무도 그리스도를 성부보다 못한 제 2류의 신격을 소유하신 분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이들 새 신들의 날조자들이 그리스도를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즉시 그를 성부의 신격에서 배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심스럽다.


14. 본질이 삼위에게 계심25)


 우리는 순서와 지위에 있어서 신성의 근원이 성부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치 성부가 성자의 신격의 원작자 이기나 한 것처럼 본질이 성부에게만 고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고 단정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에 본질이 다양하게 되든가 아니면 저들이 그리스도를 다만 이름만의 상상적인 “하나님”으로 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성자가 하나님이지만 성부 다음가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성부에게 있어서는 비발생적이고 비창조적인 본질이 성자에게 있어서는 발생적이고 창조된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1:26) 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한 모세의 글에서 우리는 위의 구별을 짓는데, 이에 대하여 많은 비난자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 안에 위가 여럿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면 모세의 이 언급이야말로 얼마나 무의미하고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 되겠는가를 경건한 독자들은 알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부가 말씀하고 계시는 분들이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 곧 이 하나님 한분 이외에는 창조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창조의 권능과 명령할 수 있는 권위가 성부, 성자, 성령에게 공통되게 속한다는 것을 저들이 인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서 그와 같이 말씀하지 않으시고 외부의 다른 행동자 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 될 것이다.



제4장 위격과 본질에 관한 벌코프의 이해


1. 신적인 존재 안에 있는 유일의 구분할 수 없는 본체

 

 신적인 존재 안에는 유일의 구분할 수 없는 본체가 있다. 하나님은 그의 본체적 존재나 존재나 본질적 본성에 있어서 하나이시다. 초대 교회의 어떤 교부들은 ‘실체’라는 말을 ‘본체’와 동의어로 사용하였으나, 후대의 저자들은 라틴 교회에서 수브스탄티아가 우시아뿐만 아니라 휘포스타시스로 번역되어 사용됨으로 해서 의미가 모호해진 사실을 고려하여 수브스탄티아를 사용하기를 피했다. 현제 ‘실체’와 ‘본체’라는 두 용어는 종종 교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들이 약간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이것을 반대할 이유는 결코 없을 것이다. 쉐드는 이 용어들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본체는 에세에서 유래하며 역동적인 존재를 나타낸다. 실체는 수브스타레에서 나왔으며 존재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의미 한다. 본체라는 용어는 하나님을 무한한 속성들의 총화로 묘사하며 실체라는 용어는 하나님을 무한한 활동들의 기초적인 근거로 묘사한다. 전자는 비교적 능동적인 단어이며, 훈자는 수동적인 단어이다 전자는 비교적 정신적인 용어인 반면 후자는 물질적인 용어이다. 우리는 물질적인 본체보다는 물질적인 실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유일성에 관한 이러한 명제는 신 6:4  약 2:19 과 같은 구절들과, 하나님께서 자신의 속성들과 동일시되고 있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2. 세 위격들 또는 개별적인 실체들

 

 이러한 한 신적 존재 안에는 세 위격들 혹은 개별적인 실체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존재한다. 이것은 삼위일체론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언급되는 다양한 저자들이 일반적으로 휘포스타시스 라는 용어를 채택하였던 반면 라틴의 저자들은 페르소나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였고 때로는 수브스탄티아를 사용 하였다. 전자는 오해를 낳기 쉽고, 후자는 모호하기 때문에, 스콜라주의 학자들은 수브시스텐시아라는 말을 새로 만들었다. 이러한 다양한 용어들은, 이 용어들이 언제나 불충분한 것으로 느껴졌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인격’이라는 단어는 단지 이러한 관념의 불완전한 표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다. 통상적인 어법에서 그것은 자의식을 소유하고 있으며, 모든 변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의식하고 있는 각각의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개체를 나타낸다. 경험에서 우리는 인격이 있는 곳에 별개의 개체적인 본체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모든 인격은 별개의 그리고 단독의 개체로서 그 안에 인간적 성질이 개체화되어 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는 서로 병립되어 있거나 분리되어 있는 세 개체자는 없으며 단지 신적인 본체 안에 위격적인 자기 구별만이 있을 뿐이며 그것은 속적으로나 수적으로 하나이다 .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세 위격들을, 사벨리우스가 가르쳤듯이 현현의 다른 세 양식이 아닌 존재나 혹은 실족의 세 가지 다른 양식들로 언급하기를 좋아했던 건이다. 따라서 칼빈은 “하여간 인격이란 말을 쓸 때 나는 신적 본체 안에 있는 실존을 의미하고 있다.” 라고 말하였다. 이 의견은 완전히 용인할 수 있으며, 오해를 피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는 신적 존재 안의

 자기 구별들이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나’ 와 ‘너’ 그리고 ‘그’를 함축하여 서로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3. 본체가 삼위에게 동등하게 속함


 하나님의 나누어지지 않은 전 본체(질)가 삼위의 각자에 동등하게 속한다. 이것은 신적 본체가 삼위에 분배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속성을 가지고서 각 위들 안에 전체적으로 있으며, 따라서 그 삼위는 본체의 수적 유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신적 성질은 그것이 전체적으로 혹은 불가분리적으로 한 위격 이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적 성질과 구별된다. 사람 가운데 있는 세 인격은 성질 혹은 본체의 ‘종’의 유일성, 즉 같은 종류의 성질 혹은 본체를 가질 뿐이나, 하나님 안에 있는 삼위는 본체의 수적 유일성을 즉 한 본체를 소유하고 있다. 인간의 성질이나 본체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개체적 부분의 한 종류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에, 종적 유일성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적 본체는 나누일 수 없으며 따라서 신성의 삼위 속에서 하나다. 신적 본체는 수적으로 하나이며 동일하다. 그러므로 삼위들 안에 있는 본체의 유일성은 수적인 유일성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신적 본체가 삼위와 병립된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그것은 삼위의 바깥에 분리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사실이 그러하다면 참된 유일성이란 있을 수가 없으며 사신론으로 이끄는 분할만이 있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것처럼 이것은 세 가지의 실체 양식을 가지고 있다. 앞 장에서 말한 것에서 추론할 수 있는 또 다른 결론은, 다른 위격에 대한 신성의 한 위격의 본체적인 존재에 관해서는 결코 종속이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위격적 위엄에 있어서 차등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오리겐이나 다른 초대 교회의 교부들 그리고 알미니우스 주의자들과 클라크와 다른 성공회 신학자들의 종속론에 대항하여 주장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종속은 순서 및 관계와 관련된 종속이다. 삼위와 신적 본체의 관계는 신성의 불가해한 영광이다.


4. 삼위의 순서


 신적 존재 안에 있는 삼위의 실존과 활동은 분명하게 정해진 순서로 표시된다.

존재론적 삼위일체에는 분명한 순서가 있다. 위격적 실존에 있어서 성부는 첫째요, 성자는 둘째, 성령은 셋째이다 이 순서는 시간이나 본체적 엄위에서의 어떠한 선후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단지 기원의 논리적 순서에 있어서만 그러하다. 성부는 어떤 다른 위격에게서 태어나시거나 발원하지 않으시며,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 발생과 발출은 신적 존재 안에서 일어나며 또한 위격적 실존의 방식에 관한 어떤 종속을 의미하지만 신적 본체의 소유에 관계되는 한 아무런 종속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그 고유한 순서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형이상학적인 기초가 된다.


5. 삼위의 사역


 삼위가 구별되는 어떤 위격적인 속성들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또한 내향적 사역이라고 불리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신적 존재 안에 있는 사역들이어서 피조물에 관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위격적 사역들이며 삼위가 공동으로 하지 않으며 또한 나누어 줄 수 없는 사역이다. 발생은 성부만의 행위이며, 아들 됨은 독점적으로 성자에게 속하며, 또한 발출은 오직 성령에게만 돌려진다. 하나님의 사역들은 모두 삼위의 공동적인 사역들이지만, 창조는 일차적으로 성부에게, 구원은 성자에게, 성화는 성령에게 돌려진다. 신적 활동들 속에 잇는 이러한 순서는 하나님 안에서 본체적인 순서를 지시하며, 또한 일반적으로 경륜적 삼위일체로 알려져 있는 것의 기초를 형성한다.


6. 삼위일체의 신비


 교회는 삼위일체를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로 고백한다. 삼위일체는 이전에는 감추어졌다가 이제 계시된 진리라는 성경적인 의미에서만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이해 할 수 없으며 또한 이해시킬 수 없다는 의미에서 신비이다. 삼위일체는 현현의 어떤 관계들이나 양식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본체적인 성질에 있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적인 어려움은 신성 안에 있는 위격들이 신적 본체나 서로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에 있다. 교회는 결코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며, 단지 그것을 위태롭게 하는 오류들을 막는 정도에서 삼위일체의 교리를 체계화 하려고 노력하였다.


제5장 위격과 본질에 관한 찰스 하지의 이해


1. 신적 존재


 살아계시고 참된 유인하신 하나님, 즉, 하나의 신적 존재가 있다. 성경의 종교는 무신론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다신론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표명한다. 성경은 모든 곳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6:4)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5)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약2:19). 유대교와 기독교의 도덕적, 종교적 규례의 기초인 십계명은 그 첫 번째, 최고의 계명으로서 “너희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지니라”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계시종교와 자연종교를 막론하고 어떤 교리도 이 제일차적 진리와 모순되는 것은 참일 수 없다.


2. 동등한 명칭과 속성


 성경에서는 모든 신적 명칭들과 속성들이 똑같이 성부, 성자, 성령에게 귀속된다. 신적 예배가 그분들에게 똑같이 드려진다. 삼위 한분은 다른 분들과 똑같이 경배와 사랑과 신뢰와 헌신의 대상이다. 성부가 하나님이신 것은 성자가 하나님이신 것보다 더 큰 증거도 아니고, 성부와 성자의 신성이 성령의 신성보다 더 분명하게 계시되는 것도 아니다.


3. 세 인격으로 존재하심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용어는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차별이 없다. 그 말들은 이와 같은 관계를 표현하는 창조자, 보존자, 그리고 시혜자라는 말과 유사하지 않다. 성경의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1) 성부도 나 (I)라고 말씀하고, 성자도 나(I)라고 말씀한다.

2) 성부는 성자에게 당신(Thou)이라고 말씀하고, 성자는 성부에게 당신(Thou)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똑같이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지칭하는데 있어서 그(He, Him)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한다.

3)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고, 성자는 성부를 사랑하며, 성령은 성자에 관해 증거한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자에 대해 주체이자 객체이다. 그분들은 행위하고 동시에 행위를 받는 곧 행위의 대상들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은 구별된 인격(person:위격)들이라고 말해질 때, 이 사실들에 대해 덧붙여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인격은 나라고 말할 수 있고, 당신으로 말해질 수 있고, 또 행위할 수 있고 행위의 객체가 될 수 있는 지성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상기(上記)의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그것은 하나이신 신적 존재는 세 인격으로 존재한다는 명제 속에 표현되어 있다. 이 명제는 그 사실들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사실들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1) 신적 존재는 하나만이 존재하신다.

2) 성부, 성자, 성령은 신적 존재이다.

3) 성부, 성자, 성령은 방금 진술한 의미에서 보면, 구별된 인격들이다.

4) 성경이 속성들은 본질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한 속성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씀할 때, 그분들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말씀하고, 만일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면 그분들은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도 동등하시다.


4. 존재 양식과 인격양식에 관한 인격의 종속


 성부, 성자, 성령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고,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따르면

1) 성부가 제일위격, 성자는 제이위격, 성령은 제삼위격이다.

2) 성자는 성부에게 속하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 속해있다.

3) 성부는 성자를 보내시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보내신다.

4) 성부는 성자를 통해 작용하시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통해 작용하신다.

 이러한 진술들의 역(逆)은 발견되지 않는다. 성자는 성부를 보내시거나 성부를 통해 작용하는 것으로 말씀하지 않고, 또 성령이 성부나 성자를 보내시거나 그분들을 통해 작용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이 진술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들은 성 삼위일체 안에는 존재양식과 활동양식에 관해서는 인격들의 종속이 있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이 명제 역시 그 사실들 자체에 아무것도 부가시키지 않는다.


5. 인격의 구별


 성경에 따르면, 성부가 세상을 창조하셨고, 성자가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성령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성부는 만물을 보존하시고, 성자는 만물을 지탱하시며, 성령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시다. 이 사실들은 삼위일체의 인격들은 외부로부터의 모든 행위들에 있어서 협력하신다고 말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저하게 어떤 행위들을 성부에게만, 또 어떤 행위들은 성자에게만, 그리고 또 다른 행위들은 성령에게만 돌려진다. 성부는 창조하고 선택하고 부르시고, 성자는 구속하고, 성령은 성결케 하신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삼위일체의 한 인격에 대해서만 서술되고, 다른 인격들에 대해서는 서술되지 않는 어떤 행위들이나 조건들이 있다. 따라서 발생(generation)은 오직 성부에게만 귀속되고, 아들됨(filiation)은 성자에게만 귀속되고, 발출(procession)은 성령에게만 귀속된다. 이것이 성경 속에서 다루어지는 삼위일체 교리의 형식이다. 그것은 단순히 이 주제에 관해 담고 있는 분명히 게시된 사실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것은 그 교리가 항상 그 종교적 신념들과 경험의 한 부분으로서, 교회의 신앙 속에 들어와 있는 형식이다.

 이 교리는 불가해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계시적 진리나 과학적 진리를 막론하고 어떤 다른 위대한 진리만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 아주 광범하게 확산되어 있고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어온 그 철학양식에 따라ㅡ,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단 하나의 무한한 실체가 지니고 있는 무사한 형식들 가운데 하나라면, 그리고 한때 사상계를 지배했던 실재론자들에 따라 모든 인간들은 총칭적 인간 (generic humanity)으로 불리는 그 동일한 실체의 개체화된 형식들이라면 - 확실히 비합리적이다.



제6장  박형룡 박사와 각 신학자의 비교


 박형룡 박사와 각 신학자의 비교는, 지면상 그리 자세하게 하지는 못하며 다만 특징적으로 보이는 부분만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1. 벌코프와의 비교


 박형룡 박사의 위격과 본질에 관한 설명은, 그 구성 및 언어 사용에 있어서 벌코프의 ‘삼위일체론에 관한 진술’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서로 상이한 부분을 조사해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발견되어진다.

1) 성경의 가르침

 삼위일체의 예증을 든 후에 결론을 지으면서,  박형룡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전연 없으니 삼위일체의 설명을 우리 주위의 자연계나 우리 자신의 정신적 구조에나 찾아보는 것은 허사다. 삼위일체의 진리는 이성에 의하여 발견되기 불능하니 마치 이성에 의하여 증명되기도 극란하다.”

 여기에서 보면  먼저 성경 구절을 필두로 하여 삼위일체의 설명을 자연계나 정신적 구조에서 찾아보는 것이 허사임을 밝힌 후 최종적 결론을 한 문장으로 단정 짓는다. “우리는 이 진리를 성경에 가르친 고로 받는 것이며 성경에 가르친 그대로 받는 것뿐이다.”

 즉 단순히 사변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으로 매듭짓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성경 절대 의존주의를 보여주고 있으며, 최종 근거의 논리와 증명을 철저하게 성경에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2) 그리스도의 기도

 위격과 본질의 관계에 대한 박형룡 박사는 벌코프와 다른 독특한 예증을 들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그리스도의 기도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에서 그의 제자들의 불완전한 통일을 삼위일체의 완전한 통일과 비교하셨다. 즉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11,21,22)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결코 신자들의 통일과 삼위일체 신격의 본체적 통일이 어떤 방식으로 본체론적으로 같다는 것을 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불완전한 통일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완전한 통일 사이에 유추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역시 성경 자체의 예증을 주의 깊게 살핀 결과로 인하여 나오는 독특한 예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즉 각 주제에 대한 조직적이고 논리적인 서술을 하면서도, 항상 그 토대를 성경 속에서 찾아서 구성하고 조직하며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박형룡 박사를 단순히 신학의 해석자로 머무르게 하지 않고 후대의 사표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삼위일체 교리를 신비로서 표현하면서 박형룡 박사는 또한 “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6)라고 인용한다.  먼저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삼위일체에 대하여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교회의 고백이 존재해 왔음을 언급한다.   삼위일체는 역사 이래 최대의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깊은 신비를 간직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최종적으로 “그러나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없다고 하여 진리가 진리 됨을 증거 하거나 신앙할 가치를 상실하지는 않는다” 는 명언을 남기고 있다.

2. 칼빈과의 비교


 칼빈의  위격과 본질에 관한 서술은, 그 주제에 대해 단락을 짓고 정확하게 분리하여 구성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즉 전체적인 주제를 잡고서 그 내용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서술해 나가는 형식으로 사상을 전개해 나가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문장 중간 중간에 위격과 본질에 대한 분명하고 확고한 표현을 통해 우리에게 그의 주장을 각인시키고 있다.

1) 삼위의 사역

기독교강요 2권13장 18번에 보면 칼빈은 삼위의 사역에 대하여 독특한 정의를 내리는 듯하다.

 “성부는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이시며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으며,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오늘날에는 칼빈의 언급에 따라 우리가 익히 아는 내용이지만, 칼빈에 의하여  명확하게 정리된 삼위의 사역에 관한 서술이다. 그 이전의 신학자들에게서 이와 동일한 표현을 찾아보았지만 필자가 조사한 한도 안에서는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성경에 언급된 각 위격의 고유한 사역을 분명하게 정리하여 표현한 내용인데, 박형룡 박사는 이것을 외향적 사역으로 서술한다, 성부가 일의 시초와 원천되심을 성부의  창조 사역으로, 성자의 사역을 구속사역으로, 성령의 사역을 성화사역으로 돌린다. 또한 삼위 합작의 사역이면서도 각 위격의 독특한 영역으로 봄으로서 경륜적 사역의 기초로서 받아들인다.  벌코프와 비슷한 언급이지만 박형룡 박사가 이를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므로, 역시 박형룡 박사의 의견으로 볼 수 있다.  

2) 예증

 칼빈은 위격과 본질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하여, 보이는 형체나 사회 현상을 통하여 구체적인 예증을 드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는 그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성품과 논리의 정연함을 전개시키는 과정 가운데에서, 예증으로 들 만한 것에 수많은 논리상 허점이 있는 이유로 인한 것이거나,  칼빈 당시 시대의 풍조가 이러한 예증을 즐겨 사용하지 않는 이유로 인함인 것으로도 여겨진다.

이에 반하여 박형룡 박사의 예증은 지극히 풍부하다. 물질계에서 취해온 예증만으로도, 나무의 뿌리, 줄기, 가지의 유추가 있고, 물의 운동에 샘물, 시내, 강과 습기, 구름, 비, 눈, 어름이 있으며, 물질에 고체, 액체, 기체와 태양에 빛, 열, 발사와 곤충의 알, 유충 ,나비 또한 토끼풀의 예를 들고 있다.  정신계에서 취해온 예증으로서 지, 정, 의의 심리적 합일, 정, 반, 합의 논리적 합일, 주관 객관, 주객관의 형이상학적 합일을 들고 있다. 심리학적 합일 속에서 다시 이를 몇  가지로 나누어 정교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의식과 마음의 복합성과 법인 인격과 그리스도의 기도를 그 예로 들고 있다. 이는 벌코프의  예증이나 유추보다 더욱 상세하고 구체적인 예로서 표현되고 있다. 박형룡 박사가 후학들을 오랫동안 지도하면서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감 있는 예증을 개발한 결과로 보여 지며, 더욱 명확한 이해를 고취시키기 위한 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3. 찰스 하지와의 비교


 찰스 하지는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의 역사를 폭넓게 서술하고 있는 데,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상황과 신조, 그 논점에 대하여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니케아 공의회에서 제정된 교회교리와  그 교리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본질과 위격에 대한 

설명이 다루어지고 있다. 하지 자신이 본질과 위격에 대해 서술한 내용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으며, 앞에 기재한 제5장의 내용이 중심이 되는 듯하다.

1)삼위의 사역

 찰스 하지에게서 삼위의 사역에 대하여 독특한 이해가 발견되어 진다.

 “성자는 성부를 보내시거나 성부를 통해 작용하는 것으로 말씀하지 않고, 또 성령이 성부나 성자를 보내시거나 그분들을 통해 작용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이 진술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들은 성 삼위일체 안에는 존재양식과 활동양식에 관해서는 인격들의 종속이 있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즉 “성부는 성자를 보내시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보내신다.”는 진술의 역(逆)이 발견되지 않음에 의하여 성부의 발생과 성자의 아들 됨과 성령의 발출을 설명하는 것이다. 수학적 정리와 같은 논리이나, 우리가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한층 더 깊이를 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형룡 박사는 이 사역을 내향적 사역으로 규정하고, 신적 실유의 내부에 있는 사역으로서 삼위 합작에 의하지 않고 비공동적인 각 위 자신의 사역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실존의 양식이 서로 다른 것을, 사역의 관점에서 보아 사역의 서로 다름으로 표현한다. 

2) 위(preson)의 인격성

 찰스 하지는 위의 인격성을 설명하는 내용의 한 부분으로서 사랑의 관계를 들고 있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고, 성자는 성부를 사랑하며, 성령은 성자에 관해 증거한다” 주체이자 객체인 성부, 성자, 성령의 인격성을 사랑과 증거의 관계로 설명함으로서 우리에게 또 다른 이해의 관점을 보여준다.

 박형룡 박사는 이와는  다르지만 인격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신적 실유 안에 자아 구별들은 “나” “너” “그”를 함의하여 그들이 서로 인격적 관계를 맺으신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않도록 주의 하여야 한다.”


제7장 결론


 위격과 본질에 관한 박형룡 박사의 글은, 기존의 정통신학 교리의 정리와, 명확한 이해를 위한 논저라고 할 수 있다.  박형룡 박사의 위격과 본질에 관한 서술은 벌코프의 글의 구성과 문장을 빌렸지만, 나름대로의 독특한 성격을 드러낸다. 즉 모든 이론의 토대와 근거를 철저히 성경에 의존하는 신학관을 보여주면서  이성적, 논리적 신학의 중심에는 역시 성경이 최종적으로 판단한다는 입장을 확실히 한 것이다.  진리를 성경에서 가르쳤기에 받는 것이며, 오직 성경에서 가르친 그대로만 받는 것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현대 사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것으로 치부하며 경험과 상식 속에서만 진리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논함에 있어서도 철저한 성경의 근거와 이유를 말하고 있다. 또한 위격과 본질에 관한  예증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어떤 신학자들보다 더욱 다양한 예증을, 상세한 설명과 함께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단순한 사색의 학문이 아니고 수많은 후학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조금이라도 더 명확하게 가르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박형룡 박사의 이러한 소원은 후학들에게 실제적 열매를 맺고 있으며, 이후로도 더욱 놀라운 결실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 참고문헌 ]


<한서>

김길성,「개혁신학과 교회」,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1998

김길성,「개혁신앙과 교회」,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2001

박형룡. 「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Ⅱ 교의신학 신론」,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1988

박용규 엮음,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1996

<번역서>

벌코프, 루이스.「조직신학」,권수경․이상원 공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1988.

칼빈, 존.「기독교강요」,김종흡.신복윤.이종성.한철하 공역, 생명의 말씀사,1988)

핫지, 찰스.「조직신학」,1권, 김귀탁 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2002.

그루뎀, 웨인.「성경핵심교리」, 김광열,곽철근 공역, 서울:CLC, 2004

바빙크, 헤르만「하나님의 큰일」, 김영규 역,1999.

<원서>

Bavinck, Herman, Reformed Dogmatics, edit. John Bolt, MI: Baker Academic, 2004.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