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주기도문에 대한 여성 신학자들의 불만 /펌
|
주기도문에 대한 여성 신학자들의 불만 주기도문에 대한 여성 신학자들의 불만 8월부터 한국교계에‘주기도문의 새 번역’에 대하여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그 핵심 내용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공동으로 21세기에 맞게 새롭게 번역한‘사도신경과 주기도문’에 대하여 일부 여성 신학자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이로 인해 지난 9월 총회에 가결하기로 한‘새 번역 안’이 이를 발제하고 주도했던 통합측과 합동측에서마저도 부결되고 1년간 보류되었다. 이에 따라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에 대한 번역문제가 정치적으로 난맥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그 문제점을 진단해보자.
주기도문의 새 번역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
일부 여성 신학자들의 주기도문에 있는 ''아버지''를 삭제시켜 달라는 주장 이들 여성 신학자들의 논조는 이렇다. 새번역의 주기도문에 강조된 ‘아버지’라는 문구가 시대착오적이며 남녀평등을 훼손하는가 부장적 표현이며, 심지어 기존의‘하나님 아버지’마저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억압과 열등화의 도구로 사용되어져 왔기 때문에, 차제에‘아버지’대신‘당신의’이나‘당신의 것’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대표인 한국염 KNCC 여성위원장은“특별위원회측이‘한국교회 120년만의 쾌거’라고 자부하는 이 새 번역안에 대해 기독교 여성들은 시대착오적이며 양성평등에 역행하는 개악이라고 판단”하며“여성들이 문제 삼는 것은 용어상의 문제와 과정상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잘못된 신학과 상황논리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될 한국교회
또한 새 번역에‘아버지’란 문구를 사용하는 것은“양성평등의 시대를 거역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라 했는데 그 근거로 여성 기독인이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이라 하니, 이는 다수의 포퓰리즘을 부추겨 보겠다는 의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여성 신학자들이 특별위원회에 포함되지 않고 그 의견이 새 번역에 채택되지 않았다고 하여 문제를 일으킨 것과, 자신들의 의견이 전체 기독교 여성들의 의견인 양 하는 태도도 지극히 인간적이다. 한 마디로 성경과 한국교회 120년의 전통을 무시한 상황논리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일부 여성 신학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페미니즘 신학과 상황논리이며, 이를 가지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은 사단이 한국교회에 놓은 함정이랄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의 언론과 신학자들이 무슨 큰 일이 난 듯이 이들을 설득하려 하고 화합하려는 것 자체가 벌써 그 함정에 빠져드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을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는 신학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시대나 상황을 운운하면서 전통을 무시하고 새롭게 하자고 시끄럽게 하는 것은 상황논리의 모순이다. 잘못된 신학과 상황논리는 지금까지 성경적이며 개혁주의 전통을 바르게 지켜온 한국교회가 대화를 하거나 타협을 할 대상이 결코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언제든지 성경에 뿌리를 두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지 시대에 맞추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금번에 문제가 된 주기도문의 새번역은 오히려 신학적으로 이질적인 집단과는 대화할 수 없음을 발견한 또 다른 발견이다. 더 이상 한국 교회가 저들을 포용하려고하는 함정에 빠져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의 재번역이 교계의 중대한 이슈로 떠올랐다. 그 중에서도 사도신경 재번역의 핵심은“지옥으로 내려가사”(hedescended into hell)라는 문구의 삽입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 문구는 과거 타락한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연옥설과 면죄부의 근거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사도신경의 고대 로마형과 공인된 원문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적 남용과 타락
이런 교리는 더 넓은 의미로 확장되어서 연옥설과 선조림보에 있는 영혼들을 위한 면죄부 교리에 악용되었다. 이런 교리의 악용과 남용은 만인구원설로 연결되었고 결국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때문에 교리적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엄청난 죄악을 자행한 것이다. 만일 사도신경에“지옥으로 내려가사”라는 이 문구가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삽입된다면, 그것은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막아야 될 일이다. 그렇게 주장하고 믿는 것은 구원을 좌지우지하는 교리적 이단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의 개혁과 한국교회
종교개혁 이후 가히 신조의 시대라 불릴 만한 17세기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44문답)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제8장 4절), 소요리문답(27문답), 대요리문답(50문답) 역시 이 표현을 그리스도께서 경험하신 비하의 극치로서의“사망의 권세에 얼마 동안 거하신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 개혁주의 조직신학자들인 찰스 핫지, 알렉산더 핫지, 루이스 벌콥, 그리고 한국의 박형용, 박윤선 박사도 모두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현재 미국장로교회(PCA)가 사도신경에서 이 문구를 사용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더 나아가서 이러한 종교개혁자들과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을 따라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이 문구를 삭제해서 고백하고 있다.
오해의 소지는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 그렇다면 굳이 신앙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소지를 주는 문구를 사용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 문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사도신경에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속죄사역이라는 대속적 죽음의 충분한 의미가 잘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부 한영 찬송가의 표지 안쪽에 있는 영문 사도신경은 이 문구를 포함하고 있고 한글 사도신경은 삭제하고 있어서 성도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 교단의 성도들은 앞서 언급한 이 문구에 대한 역사적 기원과 신학적 의미를 잘 숙지하고, 혹 있을지도 모르는 로마가톨릭의 연옥설과 이단자들의 만인구원론이라는 공격을 철저하게 배격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