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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평신도교회화` 되어가는 교회적 현상에 관하여 /이천우목사

baromi 2007. 12. 7. 08:51
전에 "목사를 세우지 않는 평신도교회, 참으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사색과 글 80번). 교회에 목사의 직분을 세우지 않는 것과 관련해서 쓴 것입니다. 그것은 평신도교회 일지라도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의 봉사를 통해서 교회를 섬기는 일을 '장로'란 직분을 통해서는 할지언정 굳이 목사란 직분의 호칭은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의 문제 의식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번에는 '평신도교회'란 말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평신도'라는 용어는 '성직주의'에서 나온 말이기에 그 사용이 부적합하며, 따라서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평신도교회'는 교회가 소위 목사의 권위가 로마 카톨릭교회가 갖는 성직자의 개념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을 의식한 속에서 말해지는 '성직자교회화' 되어 가는 것에 대한 반발과 그 상대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또한 잘못 사용하고 있는 용어일 것입니다. '성직자교회화'된 교회가 있을 수 없듯이 '평신도교회화' 되어 가는 것으로서의 '평신도교회'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편의상의 용어라고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평신도교회'를 주장합니다. 이런 모순이 있나요? 오늘날 교회가 '성직자교회화'로 잘못 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인해서 그것을 참으로 우려하는 시각 속에서 바라보는 쪽에서도 맞서서 함께 '평신도교회'란 잘못된 용어를 사용하며 평신도의 개념에 의해서 교회를 이루어가다니요.

평신도교회를 주장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목사의 직분을 세우지 않는 중요한 이유로 몇 가지를 듭니다. 우선 '목사'란 직분의 명칭을 문제삼습니다. 그들은 에베소서 4장 11절의 목사란 말의 원문(영어로는 pastors)은 목사가 아닌 목자라는 것을 이유로 듭니다. 그러기에 만일 호칭을 하려면 굳이 '목사'가 아닌 '목자'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목자를 목사라고 번역한다고 할지라도 그 뜻은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사(牧師)는 주께서 맡기신 양 무리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자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목사의 직분은 말이죠. 목자의 기능과 역할, 그리고 교사의 기능과 역할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맡기신 양 무리들을 돌보는 자인데 어떤 일을 통해서 하는가 하면, 가르치는 일에서라고 하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통해서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28-32)라고 권면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교회를 맡겨 부탁하기를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의해서 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에베소의 장로들이 양 무리들을 주의 말씀으로 잘 가르쳐서 그들이 흉악한 이리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시고 또한 " 내 양들을 치라"(요21:15-16)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목사는 주님이 맡기신 양 무리들을 돌보는 자인데 이는 주님이 주신 복음의 말씀을 가르쳐 주께 믿음의 뿌리를 내려 견고히 있게 하는 일에 있는 것입니다. 즉, 목사는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회중, 곧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하여서 가르치는 것으로서 그들이 주께 가지고 있는 복음 진리의 믿음에 더욱 굳게 세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는 다름 아닌 목자요 또한 교사입니다. 그러니 목사라고 직분을 호칭하는 것에 아무런 무리가 없으며 따라서 이의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목자라고 불러야 하지 목사라고 부를 수 없다며 목사의 직분은 없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억지인지요. 더욱이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서 세워진 개혁교회는 로마카톨릭교회가 구약의 제사적 의미를 가지고서 행하는 미사를 집례하는 자를 '사제'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하여 칼빈의 교회 직분론에서 가르치고 있는 '목사'를 교회의 직분으로 세워 예배 설교를 하게 하였던 바, 목사는 주 몌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설교하는 직임을 맡고 있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종교개혁 이후에 개혁교회에서 설교하는 직임을 맡은 자를 목사로 부릅니다. 따라서 'pastors'를 목자가 아닌 목사로 번역하여 부른다고 해서 번역이 잘못된 것이 아니며 목사직이 종교개혁 이후에 비로소 등장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 기록되고 있는 바,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 나타내주시고 있는 주의 말씀을 맡아 양 무리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자들에 대한 교회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목사의 직분을 부정적으로 여기며 거부하는 반응을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목사의 직분이 잘못 사용되고 있는데 대한 반발입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목사가 성직자라는 계급주의로 다루어지고 있는가 하면, 마치 박사 학위를 취득한 목사가 실력 있는 자인 것처럼 여겨져서 교회가 목사를 청빙하여 세울 때 경쟁하듯이 박사 학위를 취득한 자를 요구하는 데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교회 직분의 오용과 부패성은 목사의 직분에서만이 아닙니다. 장로의 직분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집사의 직분에도 언제든지 죄의 세력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장로의 직분도 거부하고 집사의 직분도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의 직분은 거부하면서도 장로의 직분이 목사의 직분을 대신하게 하다니요. 이는 큰 오해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직분이 사람을 부패시켜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죠. 곧 인간의 죄성에서 나오는 악한 욕망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 노릇을 하고 있듯이 많은 장로와 많은 집사들 또한 그렇습니다. 사실 가장 의로운 자로 있는 장로와 집사에게서도 그들의 선한 일을 도모하는 그 속에 악한 죄가 자리잡고 있으며 또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목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나는 목사와 같이 성직의 권위를 내세우는 악한 자로 있지 않습니다. 나는 평신도의 위치에서 장로로 말씀을 가르치는 선한 자입니다"는 그 은연한 생각 자체가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자기 의를 드러내는 악함인 것을요. 또한 평신도교회 내에서도 장로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로 말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가령 "나는 가르치는 장로입니다. 그래서 나는 가르치는 일을 하며, 따라서 다스리는 장로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습니다"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이 또한 성직주의 개념이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성직주의 개념은 목사를 세우지 않고 장로와 집사만으로 교회 직분을 세워 나가는 제도에서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장로와 장로 간에도, 그리고 장로와 집사 간에도 구별과 구분을 가져나가려고 하는 생각을 갖는 순간에는 이미 그러한 것입니다. 그것은 장로 간에, 그리고 장로와 집사 간에 그 직분이 독립된 직분이며 또한 상호 협력적 동등의 직분이란 것을 몰라서가 아닐 것입니다. 잘 알면서도 사람의 마음은 서로 간에 구별과 구분을 가져나가려고 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목사가 아닌 장로들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항상 악할 뿐인 죄성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적 타락한 사람은 전적 부패한 존재라는 것은 우리가 다 익히 잘 아는 바입니다. 죄에 오염되어 있으되 그 정도가 온전하다, 완전하다는 것이 '전적 부패'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의인은 없는 본성적으로 악한 존재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그렇다면 말입니다. 교회의 직분이 잘못되고 문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직분에 있는 사람이 문제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언제든지 죄가 있으며 그래서 죄의 활동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목사의 직분으로 있든, 장로의 직분으로 있든, 집사의 직분으로 있든, 또는 직분 없이 교회를 섬겨 봉사하든지 간에 말입니다. 그런데 목사의 직분을 거부하다니요. 그러면서도 장로와 집사로서는 교회를 봉사하여 섬기다니요.

평신도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를 내세웁니다. 그것은 목사이든 장로이든 집사이든 그것은 신분을 말하는 직분이지 호칭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형제"라고 호칭한다며 그것이 옳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어떤 직분의 역할을 하든지 간에 단지 그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인 것을 인식할 뿐이며 서로 부를 때는 "형제님"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 또한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며 또한 부자연스러운 것인지요. '형제'는 호칭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 8절에서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랍비라고 불려질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렇게 불려지는 것을 원하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존경받기를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의 의'를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다 형제이다"라는 것은 서로의 관계성을 말한 것이지 서로가 서로를 형제로 호칭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하나된 몸인 교회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들입니다. 그러니까 한 형제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한 가족인 관계성에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 그렇기 때문에 너나 나나 할 것없이 서로를 "형제님"하면서 호칭하라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아버지에게는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며, 어머니에게는 어머니라고 불러야 하며, 형에게는 형님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동생에게는 아우라고 부를 것이구요. 그런데 그러한 가족의 관계성을 이루고 있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입니다. 가족도 있고, 이웃도 있습니다. 아버지도 있고 아버지 뻘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때 아버지에게는 아버지라고 부르면 되지요. 그러나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아버지에게, 그리고 아버지 뻘 되는 어른에게 "형제님"하면 되겠습니까? 아버지는 아버지로, 그리고 아버지 뻘 되신 분에게는 아무개 아버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르신 된 분에게 '형제'라고 호칭한다면 이는 우리나라의 문화적 관습의 관계에서는 참으로 몰상식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듯이 같은 연배의 사람에게 "형제님"하면 되겠습니까? 아이가 있는 아버지나 어머니이면 아무개 아버지 또는 아무개 어머니 하면 될 것입니다. 형제란 호칭은 말입니다. '형과 아우'란 뜻입니다. 형에게 형제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고 아우에게 형제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란 형과 아우의 관계에 있다는 관계성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형제라고 호칭하다니요. 다른 사람이 교회의 식구들을 볼 때 "저 사람들은 모교회의 믿음의 형제들이야!"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또는 믿는 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말할 때 "우리는 아무개교회의 믿음의 형제들입니다"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서로를 호칭할 때 "아무개 형제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참으로 가당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를 호칭화 한 것의 영향은 '형제단'(형제교회), '지방교회'에 의해서이며, 별 의문 없이 믿는 자들의 의식에 깊이 뿌리내려져 있어서 이제는 마치 믿는 자들 간에는 서로를 '형제(자매)'로 호칭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언어적 관습화 되다시피 굳었습니다.

평신도교회가 믿음의 형제간에 서로를 부르는 것을 형제로 호칭할 것으로 하고 있는 것은 교회의 직분을 어떻게 호칭으로 삼을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교회의 모임 속에서 목사의 일을 하고 있고 장로의 일을 하고 있고 집사의 일을 하고 있는 분에게 목사로 장로로 집사로 호칭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적 관계 속에서 서로가 만나고 대면하며 그 관계에 의해서 함께 믿음의 생활을 해나가는 가운데서 서로를 호칭할 때 직분을 사용하는 것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들이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란 것을 '예배당'이란 공간에만 한정해서 제한적으로 가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드러내는 모든 영역에서 가져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서로를 부를 때 직분을 사용하여서 부르는 것은 주 안에서 함께 형제된 그 믿음의 형제들 간에서 각각 하고 있는 주의 일에 대한 인식 속에서 호칭되고 있는 것이지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자들에게 부르는 것이 아니며, 또한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믿는 자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서로 부르는 것도 아닙니다.

성직자 중심적인 교회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고 루터, 쯔빙글리, 칼빈 등 그 외에 많은 개혁가들이 있었으며, 또한 그 후에도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존재하여 왔지만 성직자 중심적인 교회인 로마카톨릭교회는 건재하며, 오늘날에는 로마카톨릭교회에 국한하지 않고 개신교 전체에 확산되어서 그 세(勢)가 더욱 커져 참으로 거대한 왕국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거짓 교회가 존재하는 것을 통해서 주님의 참된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러기에 世末(세말)까지 로마카톨릭교회를 비롯하여서 성직자 중심적인 교회는 존재할 것입니다. 그렇듯이, 평신도교회도 끝까지 주장하며, 그래서 고집스럽게 세말까지 유지해 나가려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성직주의에 의한 교회, 곧 성직자 중심적인 교회가 있을 수 없듯이, 이 성직주의에서 나온 평신도라는 말도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 평신도주의에서나 가질 수 있는 평신도 중심적인 교회인 평신도교회란 것도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현하에 교계에서는 마치 유행의 흐름을 타듯이 평신도교회가 이곳 저곳에서 적지 않게 생겨나고 있으며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의하며 조심할 것을 경고로 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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