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신학자료

[스크랩] 복음주의~개념의 정의(김효성목사님)

baromi 2007. 12. 5. 10:33

자유주의 신학이 역사적 개신교회들 속에 들어와 교회들을 부패시키고 변질시켰던 20세기 중엽 이후, 복음주의적 교회들은 두 입장과 진영으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포용적인 신복음주의의 입장이며,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의 단절을 주장하는 근본주의의 입장이었다.

 

물론, 오늘날 교회 안에 '신복음주의'라는 말에 대한 개념도 서로 다른 것 같다. 많은 보수적 목사들은 신복음주의를 신학적 탈선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성경 무오성을 부정하는 것이나 유신론적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것 등을 신복음주의의 특징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신복음주의는 역사적으로 그런 신학적 탈선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었다. 신복음주의의 본질적 성격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1920년대의 소위 근본주의(보수주의)와 현대주의(자유주의) 간의 논쟁 혹은 갈등에서 외형적으로 현대주의가 승리하고 근본주의가 패배한 이후, 1930년대에 성경적 교회들이 자유적 혹은 포용적 대교단들로부터 분리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1940년대에 와서 그 분리된 교회들 가운데서 '신복음주의'라는 한 새로운 경향이 일어났다. 그것은 진리를 위해 끝까지 싸우기보다 평화와 안정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었다. 그런 입장을 주창했던 이들은 성경을 그대로 믿는 보수적 교회들 간의 교제와 협력보다 자유주의 교회들에 속한 자들을 포함하는 폭넓은 교제와 협력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성경적 분리의 명령을 따르기보다 교제와 화합을 좋아했다.

 

이런 입장을 처음으로 대변했던 인물은 미국의 풀러(Fuller) 신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해롤드 오켕가이었다. 1948년 그는 풀러 신학교 강연에서 '신복음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는 1930년 보수적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지만, 1936년 교회 분리시 메이천을 따르기를 거부했었다. 그러나 재능과 인품이 탁월한 그는 1942년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NAE)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이 되었고, 1947년 풀러 신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그는 33년간 보스톤의 파크 스트릿 교회의 담임목사로 봉사했고, 25년간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의 이사장이었다. 그는 빌리 그레이엄의 절친한 친구이며 신학적 조언자이었다.

 

오켕가는 풀러 신학교장 취임시 분리를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을 비난하면서 자기 신학교는 대교단들 안의 목회자들을 훈련시킬 것이라고 선언했었다(William Ashbrook, Evangelicalism: The New Neutralism, p. 5). 그는 1957년 한 소식지에서 "신복음주의는 그 전략을 분리에서 침투로 바꾸었다"고 말했다(위의 책, 4쪽). 또한 그는 후에 "신복음주의는 분리를 거절함에 있어서 근본주의와 달랐다"고 회고하였다(Foreword to Harold Lindsell's The Battle for the Bible).

 

신복음주의 기관들로서, 1942년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가 조직되었고, 1947년 풀러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또 1951년에는 20개국의 복음주의 협의회들이 모여서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WEF)를 형성하였다. 1956년에는 신복음주의 대변지인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지가 창간되었다.

 

신복음주의는 그 용어를 처음으로 만들어냈던 해롤드 오켕가의 생각대로 근본주의의 분리의 입장을 반대하는 것을 본질로 하였다. 대교단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그 '넓어진' 교회들을 '배교'라고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변론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1920년대의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갈등은 여하튼 외형적으로는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고 그 결과 역사적 대교단들은 '넓어진' 교회들이 되었고 그 이후 대교단들 안에서는 더 이상 자유주의를 배제하려는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 때, 분리되어 나온 소수의 보수적 교회들이 참된 기독교를 계승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부정적 대답을 가졌다. 오켕가의 말대로, 그들은 분리의 입장을 포기하고 그  대신 넓어진 대교단 속으로 들어가는 소위 '침투'의 입장 혹은 전략을 가지며 그 입장을 정당화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대교단들 속으로 다시  들어가 그 교단들을 개혁시키고 회복시키기를 원했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볼 때 신복음주의는 자유주의자들과의 분리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시작된 운동이었고, 그것이 그 입장의 본질적 내용이었다.

 

그러나 신복음주의자들이 근본주의라는 말을 싫어하고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전유물처럼 사용하게 되었을 때, 복음주의는 다른 현대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신복음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던 각국의 '복음주의자 협회'(NAE)나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WEF)는 '복음주의'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죠지 말스든의 말과 같이, 신복음주의자들은 점차 자신들을 단순히 복음주의자로 부르기 시작했고 신복음주의는 오늘날 흔히 단순히 '복음주의'로 불리운다(George M. Marsden, "fundamentalism," in New Dictionary of Theology, p. 268). 이와 같이, 오늘날 '복음주의'는 신복음주의와 거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고, 신복음주의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몇몇 논평가들의 견해 검토

윌리엄 애쉬브룩의 정의

윌리엄 애쉬브룩은 오늘날의 '복음주의' 혹은 신복음주의를 근본주의에 대해 혹평하며 자유주의에 대해 동정적인 '신중립주의'로 묘사하였다(William Ashbrook, Evangelicalism: The New Neu- tralism). 그 증거들로 그는 이 입장의 주창자 해롤드 오켕가의 반(反)분리주의적 발언과 행위들을 든다. 또 그는 오켕가가 대중적 수준에서 신복음주의의 확신과 이념의 대변자로 제시한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방침의 변경을 다른 한 증거로 든다.

그에 의하면, 빌리 그레이엄의 본래의 입장은 건전하였다. 빌리 그레이엄은 1951년 4월 파일롯(Pilot)지의 글에서 "우리는 어떤 형태의 현대주의도 너그럽게 보거나 교제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1952년 6월 3일자 선배 부흥사 밥 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현대주의자들은 어디에서나 우리를 후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린스보로와 슈립포트 외에 어느 도시에서나 교회 협의회(NCC)의 후원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 후 빌리 그레이엄은 자신의 입장을 변경하였다. 그는 뉴욕,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컬럼버스 등의 전도 집회에서 공공연히 자유주의적 교회 협의회의 후원을 받았다(Ibid., p. 9).

애쉬브룩은 또한 자유주의에 대해 복음주의의 포용적인 증거의 추가적인 예들로 크리스챤 라이프지 1957년 4월호가 넬스 페레, 라인홀드 니이버, 해롤드 피 등의 자유주의자들을 정통 기독교인과 거리가 멀지 않은 자들로 묘사한 것이라든가, 에드워드 카넬이 칼 바르트에 대해 매우 동정적이라는 것 등을 들었다.

 

촬스 우드브릿지의 정의

촬스 우드브릿지는 신복음주의를 자유주의자들의 포용과 그들과의 협력을 주장하는 입장으로 정의하였다(Charles Woodbridge, The New Evangelicalism <1969>, p. 15). 그는 그 증거들로 신학교 영역에서 풀러 신학교가 프린스톤 신학교의 전교장인 신정통주의자 죤 매케이를 강사로 초청하는 것과 같은 빈번한 일들, 기독교 문서 영역에서 크리스챤 라이프, 무디 먼슬리,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이터니티 등이 자유주의자들의 책이나 집회 광고를 싣는 일, 교회연합 영역에서 자유주의적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일, 그리고 전도의 영역에서 빌리 그레이엄의 협력 전도와 같이 포용적 방법을 채택하는 것 등을 들었다.

특히 마지막 문제에 관한 예로서 빌리 그레이엄이 미국 로스 앤젤레스에서의 전도집회시 제랄드 케네디 감독을 명예대회장으로 임명했는데, 케네디 감독은 그의 책 하나님의 좋은 소식에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명확히 부정한 자라고 지적하였다(Ibid., pp. 34-39). 우드브릿지는 또한 이러한 타협적 태도의 결과로서 성경의 정경성, 완전 영감, 무오(無誤)에 대한 회의와 진보적 창조 개념의 수납 등의 신학적 변질과, 춤, 영화 등에 대한 개방적 태도에서 볼 수 있는 윤리의 세속화도 지적하였다(Ibid., pp. 47-57).

 

개리 코우언의 정의

개리 코우언은 신복음주의의 입장을 전도활동의 측면에서 정의하기를, '자유주의자들이 이단이 아니고 견해가 다른 형제들이며 따라서 그들을 주님의 일, 특히 전도의 일에 참여시킬 수 있다는 입장' 즉 자유주의자들과의 협력적 전도를 주장하고 정당화하는 입장이라고 하였다(Gary G. Cohen, Biblical Separation Defended, p. viii).

 

박형룡 박사의 정의

박형룡 박사는 "신복음주의는 미국에서 20세기 초에 자유주의가 득세(得勢)하고 근본주의가 실세(失勢)한데 대한 반발로 어떤 보수주의 신학 교육을 받은 소장 신학자들이 자유주의 신학과 타협을 감행하기로 발족한 새 신학 운동"이라고 언급한 후, 다음과 같은 요지로 논평하였다(기독교 현대신학 난제 선평 <1975년>, 445-471쪽.)

 

첫째로,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에 대해 학문성 결여, 반교파주의, 세대주의, 부정주의 등의 말로 가혹히 비판한다. 그러나 근본주의에 대한 가혹한 비평은 비평자의 정통성을 의문케 한다.

둘째로, 신복음주의는 신정통주의와 타협하는 경향이 있다. 신정통주의는 성경의 파괴적 비평을 받아들이는데, 과연 어떤 신복음주의자들은 성경 무오(無誤)를 부정하고 성경을 파괴적으로 비평한다.

셋째로, 신복음주의는 유신론적(有神論的)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이적 부인의 경향을 띤다. 어떤 신복음주의자들은 천지 창조와 인간 창조에 대해 진화론적 개념과 긴 지질학적 연대를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의 교리를 중요치 않게 여긴다.

넷째로, 신복음주의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사회 복음 운동에 따라간다. 오켕가는 말하기를,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가 회피한 사회적 난제들을 취급하기를 의욕함에서 근본주의와 다르다. . . . 개인 복음과 사회 복음 사이에 이분설이 있을 필요가 없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구원의 개인적 초자연적 경험과 사회 철학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신복음주의자들은 민권 투쟁, 빈민 행진 등 과격한 사회 정치 활동에 참여한다.

다섯째로,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우호적, 협력적 관계를 가지고 배교적 교단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 머문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신학적 대화를 원하고 그들을 강사로 초청한다. 또 빌리 그레이엄의 경우와 같이,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과 협력하여 전도 대회를 연다.

 

음주의 혹은 신복음주의에 대한 이상의 진술들은 오늘날의 복음주의 내지 신복음주의가 자유주의자들과 분리하지 않고 그들을 포용하고 그들과 교제하고 협력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확증한다. 우드브릿지나 박형룡의 지적대로 신복음주의가 신학적 탈선들의 문제점을 보이고 있으나, 그것은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와 협력에서 생긴 당연한 결과들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자유주의자들로부터의 분리를 반대하고 그들을 포용하고 그들과 교제하고 협력하는 입장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복음주의에 대한 이런 정의에 입각하여 근래에 수집된 사례들을 모아보고 그 문제점을 확증해 보자.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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