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물자료

[스크랩] 죤 오웬(1616~1683)

baromi 2007. 11. 11. 21:02

오웬은 의심할 바없는 청교도 운동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는 옥스퍼드주 스트라드햄프톤(Strdhampton)에서 시골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살에 옥스퍼드 퀸스 대학(Queen's College)에 입학하였고 1632년에 문학사(B.A), 1635년에 문학석사(M.A)를 받았다. 오웬의 40여권이 넘는 책 중에 여러 권은 2절판 되었으며 대부분 학식과 그 시대의 중요한 특징을 담고 있는 책을 오웬이 저술하였다. 그는 유명한 신학자였으며 삼십대 후반에 매주 이천 여명의 청중을 푸른 초장(草場)으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하찮은 설교자는 아니었다.

 

이 두가지 요소를 갖고 있었던 오웬은 토마스 구드윈(Thomas Goodwin)과 마찬가지로, 당시 독립교회파의 일원이었다. 전 시대를 통털어 청교도주의의 영광을 나눈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 신학자는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논박할 수 없었던 칼빈과 종교 개혁의 모든 전통적인 개신교 교리를 옹호했다. 이 설교자는 가장 숭고하고 현실적인 신성함과, 헌신적인 봉사에 대하여 4절판짜리 중요한 책을 썼다.

 

이러한 경력 때문에 오웬은 조그마한 에섹스(Essex)의 은둔지로부터 차례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올리버 크롬웰의 전속 목사와 옥스퍼드의 그리스도 교회(Christ Church, Oxford)의 수석 목사와, 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부총장이 되었다. 크롬웰의 매우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모든 사태와 상황이 변했다.

 

뒤이은 왕정 복고 시기에 오웬은 대부분의 시간을 공적인 일에서 은퇴한 채로 보냈다. 그러나 이 때에 런던의 목사와 설교자로서 오웬은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저술을 통하여 그는 동 시대와 그 후대의 개신교 비국교도에게 의심할 바 없이 큰 영향을 끼쳤다.

 

 

 

죤 오웬은 '청교도의 왕자'라고 불린다. 맞는 말이다.그의 전집(Works)은 건전한 가르침을 추구하는 자들이라면 제일 먼저 택해야 할 책들이다. 현재 그의 글들은25권으로 나와 있다. 그의 전집은 영어로 된 신학서의 최대 보고이다. 오웬은 '청교도들의 다윗 왕'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전반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당시의 도전과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책을 썼다. 그러나 그의 모든 글에는 힘과 일관된 사상이 있고 항상 성경의 권위에 충실하다. 오웬의 가르침의 균형과 예리한 통찰에 있어 맞설 자가 없다는 것은 여러 실례로 증명될 수 있다. 예로써 『성령의 인격과 사역』(The Person and Work of the Holy Spirit-Works, vol. 3), 『그리스도의 영광』(The Glory of Christ), 『죄의 억제』(The Mortification of sin, vol.6) 등이다. 그의 『양심의 자유』(Liberty of Conscience, vol13)는 당시처럼 오늘날에도 적실성이 있는 저서이다.

 

오웬은 웨일즈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너무도 머리가 좋아서 12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10년 간 공부하였다. 그는 투창 경기를 즐겼으며 롱 점프 선수였다. 또는 플투트도 불었다. 그는 학자의 기질이 있어 밤에 4시간의 수면만 취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일과는 올림픽 챔피언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웬은 친구들과 함께 런던을 방문하는 동안 유명한 에드먼드 캘러미(Edmund Calamy)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 그런데 캘러미 목사가 오지 않고 한 시골 목사가 대신하여 실망하였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 방문 목사를 사용하여 오웬이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역사하셨다.

 

오웬의 첫 목회지는 에섹스의 포드햄(Fordham)이라는 마을이었다. 그때 그는 메리 루크(Mary Rooke)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의 가정 생활의 슬픔은 현대 의학의 혜택을 입고 사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비극이었다. 그들은 1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딸아이 하나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고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딸의 결혼도 깨어져서 친정에 돌아와서 산 지 얼마 안 되어 결핵으로 사망했다.

 

오웬은 1646년 주일에 출석 교인이 2천 명인 런던의 한 교회에 초빙되었다. 1648년 6월에 페어팩스(Fairfax) 장군은 콜체스터(Colchester)를 포위하였다. 그때 오웬은 군인들을 위한 설교 초청을 받았다. 그는 많은 장교들과 친분을 맺었는데 그중에는 올리버 크롬웰의 사위인 헨리 아이어턴(Henry Ireton)도 있었다. 오웬의 은사는 곧 소문이 퍼져 의회에 초청을 받았고 의회에서 가장 선호하는 설교자가 되었다.그는 올리버 크롬웰의군종으로도 임명되었다.

 

1652년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부총장이 되었다. 이 직책은 각종 행정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그는 6년 간의 재직 기간에 신학, 설교, 교리문답, 기도를 중심으로 살았다. 옥스퍼드의 질서는 약한 편이었다. 오웬은 관대하면서도 확고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행정을 할 수 있었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토론 때 한 학생이 상스런 말을 하였다. 그는 경고를 받았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오웬 자신이 그 학생을 힘으로 강의실에서 밖으로 내쫓았다고 한다!

 

1658년 오웬은 회중교회의 목회자 모임에 나갔다. 이 모임은 런던의 사보이 팰리스(Savoy Palace)에서 열렸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기초한 고백서를 준비하기 위해서 토마스 굿윈, 필립 나이, 윌리엄 브리지,윌리엄 그린힐, 조셉 카릴과 함께 대표로 임명되엇다. 이것이 나중에 알려진 사보이 선언(The Savoy Declaration)이다.

 

오웬은 1676년 훌륭한 그의 아내를 잃었다. 18개월 뒤에 그는 부유한 여자와 재혼하였다. 그런데 이때쯤 해서 그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러나 그는 좋은 마차를 타고 여행을 다니는 편의를 돈많은 아내 덕분에 제공 받았다.

 

오웬의 글은 그가 분석적이고 조형적이며 통이 큰 두뇌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그의 글은 모두 그가 심오하게 이해한 은혜의 교리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오웬의 문장 스타일은 현대인들에게는 쉽지 않다. 다행히도 로(R.K.K. Law)의 수고에 의해서 오웬의 대표작들에 속하는 『성령론』(The Holy Spirit), 『하나님과의 교제』(Commuinon with God), 『복음으로부터의 배도와 그리스도의 영광』(Apostasy from the Gospel and the Glory of Christ)이 요약되거나 현대어로 고쳐져서 나왔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