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물자료
[스크랩] 요한 웨슬레 ( John Wesley, 1703~1791)
baromi
2007. 11. 9.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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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웨슬레 ( John Wesley, 1703~1791) ① |
경건 인물 시리즈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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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사무엘 목사 / 미주 프린스톤한인장로교회
요한 웨슬레는 영국의 감리교 창설자이다. 그는 88세의 생애 동안 50년 가까이 말을 타고 40만km 이상 전도여행을 하였고(매년 평균 8천km), 4만2천회에 달하는 설교(1년에 평균 1천회 설교)를 하였으며, 2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였다. 요한 웨슬레는 아버지 사무엘 웨슬레 목사와 경건한 신앙의 소유자 어머니 수잔나 사이에서 19명 자녀 가운데 15번째 아들로 태어났다(찬송가 작가 찰스 웨슬레는 17번째 아들).
요한은 가정에서 교육(Home School)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어머니 수잔나가 성경, 인문학, 과학 및 철저한 경건훈련을 직접 지도하였다. 1720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그의 청년 시절에 가장 큰 감화를 끼친 것은 어머니의 경건생활과 엄격한 교육이며, 그에게 영향을 끼친 저서는 영적 수도사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생활>, <거룩한 죽음>, 윌리엄 로우의 <거룩한 삶에로의 부름>과 <크리스천의 완전> 등이었다.
이런 영향으로 그는 결국 복음전도에 완전한 헌신을 결심하게 되었으며, 그의 평생동안 일기는 26권으로 제본되어 보존되어 있다. 요한은 동생 찰스와 함께 옥스퍼드대학 시절에 4명의 회원으로 ‘성신 클럽’(Holy Club)을 조직하여 경건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들은 엄격한 규칙을 만들어 실행했으며, 매일 성경을 읽고 한 주일에 이틀씩 금식하였고, 주일 밤엔 신학서적을 읽고, 경건한 생활을 했기에 주변의 친구들이 이들을 ‘Methodist’(규율가)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결국 이것이 후에 요한 웨슬레가 일으킨 감리교 운동의 시작이요 산실이 된 셈이다. 그들이 살던 당시, 영국의 도덕생활은 말할 수 없이 부패하여 퇴폐했고, 빈부의 차이가 심하여 사회는 혼돈 속에 있었다.
영국의 어린아이들은 “우리는 우리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할 만큼 부녀자들의 성도덕은 엉망이었다. 18세기 이전의 영국 사회를 평하여 ‘영혼은 죽고, 밥주머니만 활발한 시대’라고 했다. 그런 속에서 일으킨 웨슬레의 경건 운동은 영국교회를 건질 뿐만 아니라 영국 국가 사회를 건져내었다. |
1735년 웨슬레는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미국 조지아 주 선교사로 갔다. 그는 대서양 항해 도중에 큰 폭풍우를 만났는데,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때, 배 한구석의 모라비언 성도들이 태연자약하게 찬미하고 예배드리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모라비언 교회를 자주 방문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고 배우기도 하였다.
웨슬레는 미국 원주민 선교가 별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자 영국으로 돌아왔다. 1738년 5월 어느 수요일 저녁, 런던 올더스게잇의 작은 집회에 참석했다가 그날 예배 인도자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낭독하는 소리를 듣다가 그는 전심령이 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과 구원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체험을 하였다. 그 이듬해인 1739년 프리스톨에서 처음 야외설교를 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그는 비범한 조직능력으로 감리교(Methodist)를 창설하게 된 것이다.
그의 결혼 생활은 매우 불행했다. 그의 아내는 역사상 3대 악처 중의 하나로 꼽힐 만큼 좋은 아내가 아니었다. 그러기에 아내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 아내의 비협조는 힘든 전도생활을 하게 했다. 그 대신 전도활동에 열을 올려 평균 일 주일에 15회나 설교를 하였고, “나의 교구(parish)는 전 세계이다”라는 심정으로 해마다 8천마일을 말을 타고 전도여행을 다니며 말이 들어가는 곳마다 가서 복음을 전했다. 60년간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새벽 5시에 기도회를 가지며 설교하기를 50년간 계속했다. 빈민구제, 병자위로, 감옥방문 등을 통한 전도에도 힘을 썼다. 그는 생전에 391권의 저서를 남기고 복음전선에 끝까지 활동하다가 1791년 3월 2일에 88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임종시 마지막 말은 “더 많은 빛을 내게 주소서”였다고 한다.
그는 평생 복음을 전하는 데 필요한 건강을 유지하였는데, 그는 그의 일기에서 그렇게 건강할 수 있었던 이유 6가지를 들고 있다. 즉 계속적인 운동과 기분전환, 무슨 일이 있어도 밤에는 수면을 취하는 것, 그리고 필요하면 낮에라도 잠을 자는 것, 60년 이상 새벽 4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유지한 점, 50년 이상을 새벽 5시에 기도와 설교를 계속한 점, 그리고 평생 슬픔과 걱정이 없는 삶을 산 점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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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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