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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이드 존스의 변화시키는 메시지 (행4:18-19) (펌)

baromi 2007. 10. 13. 14:48

변화시키는 메시지(행 4:18-19)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기독교 메시지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보고 들은 것”과 그것에 대한 해석. 그것의 의미, 그것과 우리 모두와의 상관성을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설교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똑같이 흥미롭고 똑같이 중요한 또 한 측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의 놀라운 점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한가지 중심 되는 큰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마치 성경이 우리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와서 이 각도에서도 보고, 저 각도에서도 보고, 또 다른 방법으로도 보라. 시대에 상관없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성경을 보다가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렀다. 새로운 방식으로 성경을 보던 중에 갑자기 내용이 마음에 와 닿는 경험을 했다.”


기독교를 순전히 교리의 관점에서만 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기독교가 누군가의 삶에 구현되는 것을 보면서 깊이 감명 받고 매료되고 매혹되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당신에게 이런 일을 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동일한 진리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진리를 계시하는 방법을 한 가지로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시며,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해 마땅히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가지 메시지, 한가지 큰 진리를 전하면서도 교훈적인 가르침이나 역사나 예증이나 시 등 다양한 방식을 동원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어떻게 역사 하는지를 보여 주는 한가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이 사건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참으로 믿는 자들에게 끼친 영향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검증할 수 있는 놀라운 시금석이 될 뿐 아니라 현대세계에 기독교 메시지를 대변한다고 자처하는 것들을 검증할 수 있는 훌륭한 시금석이 되어 줍니다. 예컨대 기독교 불가지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주장하는 똑똑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하찮은 이론으로 주님의 말씀과 행하심,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독교를 새롭게 대변하는 양 제시되는 이 모든 이론들은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 이론들은 복음만큼이나 오래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이것들을 새로운 것으로 생각해서 널리 퍼뜨리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신문에서 이런 이론과 관련된 글들을 늘 접할 것이고, 텔레비전에서도 사람들이 나와 짤막한 의견을 밝히는 토론 프로그램을 볼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런 현대적인 개념들의 실상을 알고 싶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결국 도달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무엇인가? 세상을 반짝 놀라게 하는 것. 기사거리나 토론거리, 논쟁거리를 제공하는 것 외에 하는 일이 있는가? 그들은 참으로 중요한 일,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 ”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으로(롬1:16). 진정한 복음은 일정한 결과를 통해 그 진정성을 입증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행동하시면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스스로 검증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독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검증해 보십시오. 여기 사도행전에서 읽은 말씀으로 자기 경험을 조명해 보십시오.


이 부분에서 명확히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제 말은 여기 이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이 세부사항까지 정확히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 논점은, 복음이 맹아(萌芽)의 형태로 이 말씀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종류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 자신에게도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흔적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결국은 초대교회가 유일한 기준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바로 이 초대교회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들과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판단할 때. 이 초대교회를 기준과 규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참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우리 구주, 복되신 주님의 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에서 우리를 인도해 줄 원칙을 끌어내 봅시다.


무엇보다 확실한 사실은, 기독교가 우리를 완전하게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복음서는 이 두 제자에 대해 상당히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고 나서 사도행전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두 사람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화에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오순절이 이르기 전. 복음서에 등장하는 베드로와 요한이 주는 인상은 너무 더디 깨닫거나 아예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3년 동안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사회에서 불러내 측근 제자로 삼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가르치시는 자리에 항상 동참했으며, 그가 행하시는 기적을 전부 보았습니다. 또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주님께 질문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늘 오래 참음으로 그들을 받아 주셨고, 늘 대답하고 설명해 줄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처럼 놀라운 방식으로 진리를 배우고 이해할 기회를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너무 더디 배웠고, 너무 아둔했으며, 너무 지각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더듬거리고 비척거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자주 설명해 주셨는데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해 날카로운 꾸중을 들어야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주님이 베드로를 돌아보시며‘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23).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신 직후의 일이었습니다(16:15). 베드로는 자기에게 주신 놀라운 통찰력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16:16). 주님은 그 대답에 “바요나 시몬 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면서 칭찬해 주셨습니다(16:17). 연이어 주님은 당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16:22). 바로 그때 베드로를 돌아보시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


베드로와 요한의 지각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보여주는 예가 이것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죽음과 부활이라는 똑같은 문제를 이야기 하셨을 때 아무도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비탄해하며 근심하는 모습은 다른 곳에도 여러 군데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느날 오후에는 제자들의 낙심이 얼마나 컸던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셔야 할 정도였습니다(요14:1, 16:7). 그런데도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서 전체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문제였습니다. 나중에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너무나 당황해 어쩔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죽음 앞에 극도로 상심한 나머지 무엇을 해야 할 지 판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후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전해 왔을 때에도 제자들은 여자들이 미쳤다고 생각하면서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서로 슬퍼하면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 이야기, 주님이 동행하셨음에도 알아보지 못했던 제자들 이야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소?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중이요? 왜 그렇게 슬퍼하는거요?”


그들은 말했습니다. “아니, 나사렛 예수의 일을 모른단 말이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말들은 바가 없소 ? 도대체 그 동안 어디 가 있었소 ? 이 지역에 처음 와 봐서 최근에 일어난 일들을 모르는 것 아니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러시오?’


“글쎄, 나사렛 예수에 관련된 일인데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시기로 되어 있던 분이라 믿었소. 그런데 그들이 그를 잡아다가 십자가에 못박은 후 장사지내 버렸지 뭐요.”


이번에도 주님은 그들을 꾸중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24:33-33참조).


복음서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옛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야심에 차서 서로 질투했고, 남보다 우월한 자리에 서기를 바랐으며, 사소한 일을 놓고 다투며 싸웠습니다. 이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들입니까! 무엇보다 이들이 얼마나 겁 많은 사람들이었는지 보십시오. 베드로를 보십시오. 일례로 그는 주님이 잡히셨을 때 재판이 어떻게 되나 보려고 몰래 뜰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기를 바라면서 불을 쬐었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가 그를 의심하며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한 시간쯤 후에, 또 다른 사람도 “갈릴리 사람인걸 보니 그와 함께 있었던 게 틀림없는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베드로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맹세까지 하면서 욕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 “난 그런 사람 모릅니다. 난 그 사람과 아무 상관도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눅22:54-60참조). 얼마나 비열한 사람입니까! 얼마나 형편없는 겁쟁이입니까! 그는 자기 목숨을 잃을까봐 무서워서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요 은인이요 큰 스승 되신 분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의 이 비겁함과 두려움과 소심함을 보십시오! 실제로 성경은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에 축약해 놓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막14:50 이 제자 들은 잡혀서 심문 받을까봐 두렵고 사형을 선고 받을까봐 무서워서 예수를 버리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달라져 있습니다.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사도들은 진리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진술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논쟁도 하고, 추론도 하며, 말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들의 담대함을 보십시오. 실제로 산헤드린 공회원들조차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놀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바꾸어 놓았습니까?


이렇게 요약해 봅시다. 기독교는 여러분의 삶에 덧붙여지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삶의 중심부터 변화시키기 시작해서 결국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주체입니다. 기독교는 첨가물도, 부록도 아닙니다. 추가되는 것도 아니고, 일요일에만 하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여러분이 취했다 버렸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기독교는 베드로와 요한을 변화시켰듯이 사람을 철저하게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계속되는 교회사 전체를 읽어보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이런 변화를 겪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점을 자기만의 언어로 이렇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간디의 가르침에서. 고대 철학자들의 가르침에서 조금씩 개념을 따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절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존재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이사건의 가장 표면에 드러나 있는 원리입니다.


제가 이 사건에서 발견하는 두 번째 원리는 첫 번째 원리에서 당연히 귀결되는 것으로, 기독교는 우리를 장악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기독교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여러분을 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독교를 통제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여러분을 통제하고 여러분의 삶 전체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검토해 보고 설교와 토론을 들어본 후에야 최종적으로 기독교를 취하기로 결심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십중팔구 자신들의 삶 대부분의 영역과 일상생활에서 기독교를 잊고 지내게 마련입니다. 그러다가 일요일이 되면 종교적인 관심에 집중해야 할 날 - 어쨌든 어느 정도까지는 집중해야 할 날 - 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요일 아침이나 저녁 중 한번만 교회에 가야겠다고 결심합니다. 물론 그들은 종교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고 '접촉’ - 이것이 딱 맞는 표현입니다 - 을 유지하고 싶어하지만, 화창한 여름날 친구가 “골프 한판 어때? ’라고 권하면 당연히 골프쪽으로 넘어가 버립니다. 물론 급한 볼일도 없고 골프도 칠 수 없는 날에는 다시 자신들의 기독교를 집어들 가능성도 있습니다. 오늘은 못 가겠군. 하지만 다음 번에 확실히 갈 수 있을거야.”



이것이 흔히들 하는 생각 아닙니까? 실제로 무언가 기독교를 상기시킬 만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한번도 기독교를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병에 걸리지 않는 한 기독교를 한번도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몇 년이 지나도록 기도 한번 하지 않고 지내다가, 자기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이 병에 걸리거나 죽었을 때에야 비로소 기독 교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기독교와 아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느슨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무언가, 모호하게 소속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복음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고, 삶의 심장부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장악하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음은 그들 자신 보다 큰 것, 그들의 삶에서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참된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봐도 이 점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습니까? 순교자와 목숨을 걸고 신앙을 고백한 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리스도와 복음이 그들의 주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값을 주고 그들을 종으로 사셨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스스로 생각하거나 결심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더 이상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명령과 통제를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이 그들의 관점 전체를 결정지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신앙이 삶의 주변에서만 맴돌고 있다면 그 신앙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철학이나 다른 가르침이라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주변만 맴돌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시겠습니까? 이 모든 것을 소위 대화와 토론의 문제로 삼는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아시겠습니까? 토론이라! 마치 여러분이 기독교를 심판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듯한 표현 아닙니까? 여러분이 기독교를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여러분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여러분을 소유하는 주체입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여러분은 한 생각, 한 책에 매이게 됩니다. 기독교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제가 이 강단에서 종종 인용한 말 가운데, 독일의 위대한 그리스도인 진젠도르프 (Nikolas Ludwig von Zinzendorf) 백작이 200년 전에 남긴 인상적인 말이 있습니다. 초기 감리교에 큰 영향을 끼쳤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한 가지 열정이 있다. 그것은 그 분, 오직 그 분을 향한 열정이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세 번째 원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라면, 즉 이런 식으로 이 메시지와 진리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모든 사람들에게 이 메시지에 대해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 할 수 없다.” 이 시기에 사도들과 산헤드린 사이에 충돌을 불러온 핵심 사안과 분쟁원인은. 예수의 이름으로 계속 설교하고 가르칠 것인가라는 한가지 질문에 있었습니다. 당국자들은 서로 의논한끝에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를 전면 금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그러나 이에 대한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은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 점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더 이상 자기가 믿는 바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말하려면 자기가 말하려는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어야합니다. 단순히 진리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태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글쎄요.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진리일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진리는 항상 변하는 것이고 세계는 지금도 계속해서 발전, 진보하고 있으니까요. 우리 이전에 살던 사람들의 틀린 점이 이제 드러나는 것처럼, 아마 20년쯤 후에는 이것도 틀린 것으로 판명되지 않을까요. 이런 일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지요.”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부담을 느끼겠습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추측만하고 검토만하는 철학자들은 그저 진리를 찾고자 애쓸 뿐이지, 이런 압박감에 대해 알 리가 없습니다.


사도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들이 아주 분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명확하고 구체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침내 우리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라고 말한 다음, 이에 대항할만한 관점들과 그에 대한 멋있고 지적인 답변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절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같은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했습니다. 그 메시지는 늘 동일했습니다. 그들은 그 메시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그 메시지를 설교했습니다.


저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선량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고 훌륭한 철학자라해도 “진리는 이것이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입장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라는 것이었습니다(딤후1:12). 내가 알고.” 이것이야 말로 위대한 단언이요, 확언이요, 확신이요, 확고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들과 설교자들에게만 이런 확신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첫 서신에서 노예와 종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벧전3:15). 소망의 이유를 말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었습니다. 또 여기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동행하고 있는 사도 요한도 첫 서신에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요일2:20, 27). 아시다시피 당시에도 요즘처럼 거짓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거짓 가르침은 새삼스러운 현상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거짓 선생들을 적 그리스도라 불렀습니다만, 지금은 거짓 선생들이 오히려 고위 성직자의 자리에 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1 세기에는 거짓 선생들이 교회에 소속되지 못하고 쫓겨났는데, 지금은 교회 안에 눌러앉아 있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제가 볼 때 이것 말고는 다른 점이 없습니다.


요한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너희는 ... 모든 것을 아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복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전부 같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전해진 단 하나의 메시지였습니다. 거기에는 모순된 구석도, 불확실한 구석도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측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에게는 변명하는 태도나 마지못해 하는 태도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요즘 같은 과학시대에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조금은 부끄럽습니까? 그래서 신앙이 있다는 사실을 학교 동료나 직장 동료들에게 숨기고 있습니까? 사업상 아는 사람들에게 숨기고 있습니까? 현재 그리스도인이며 그 사실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변명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에 대해 함구하거나 신앙을 최신 유행이나 최근에 발견된 것들에 끼워 맞추려 하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여러분의 현재 입장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두 사도를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인 모두의 입장과 정 반대되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크게 기뻐했습니다. 복음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바울과 나란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했으며(갈6:14),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말했습니다(롬1:16). 바울은 아덴의 아레오바고에 섰을 때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철학의 공격 앞에 방어적 태도를 취하면서 자기 입장을 옹호하지 않았습니다.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발하고 공격하고 폭로했습니다. 여기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그 불과 열정, “절대 해야한다’는 마음, 압박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여기 우리를 비밀로 이끌어 가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왜 복음을 기뻐하며 자랑했습니까? 왜 모든 사람에게 말해야만 한다는 부담, 산헤드린이 어떤 명령을 내리든 계속 말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습니까? 무엇이 그런 부담을 느끼게 했습니까? 여기 그 답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실’이 뿜어내는 영광 때문에 그런 부담을 느낀 것입니다. 이 부분은 앞장에서 다루었으므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도 이들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만났다면 절대 가만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보고들은 일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 영광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경이로움과 놀라운 인격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을 보았을 때, 영원한 세계의 영광이 이전 어느 시기보다 명확히 드러나는 것을 보았을 때는 특히 더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대답입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왜 모든 사람에게 말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습니까? 복음 메시지가 자신들에게 행한 일, 복음 메시지가 자신들에게 일으킨 변화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복음은 그들을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전에 알지 못했던 기쁨까지 가져다주었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그 기쁨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묘사했습니다(벧전1:8). 그 기쁨은 오순절에 일어난 모든 일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들은 환희와 기쁨의 영으로 가득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의 자녀라는 것과 그리스도가 자신의 유일한 독생자라는 것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에 사랑을 부어 주시고 -“부은 바 됨이니”(롬5:5) - 통찰력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고양되었으며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전에 한번도 하지 못했던 경험이었습니다. 이제 불신앙은 사라졌습니다. 우울함도 사라졌습니다. 반신반의하는 마음과 의심도 사라졌습니다. 기쁨과 행복이 넘치도록 흘러 들어왔습니다.


사도들은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자신들을 심중에 두고 계셨으며, 자신들을 위해 아들을 보내 죽게 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자신들이 능력을 받았다는 것, 기적을 행할 능력, 기도할 능력, 말할 능력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놀랄 따름이었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황홀하고 기뻤던지, 이 일이 자신들에게 주는 의미를 모든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는 것, 삶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 명료한 지식과 지각을 주는 복음의 능력을 개인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스도의 빛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새로운 능력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들이 모든 사람에게 이 일들을 계속 말하기를 고집한데에는 이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들은 이일들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을 좀 더 닮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마9:36). 주님은 무지와 죄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세리와 죄인, 창녀와 함께 앉으셨습니다. 그것이 주님께 무슨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주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주님처럼 되었습니다. 당국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했을 때 그들은  "그럴 수 없다! ”고 했습니다. 그들의 심정은 자기 자신이 해방되는 놀라운 경험을 한 후에 과거 자신과 똑같은 처지에 놓인 자들을 목격한 사람의 심정, 그들을 회복시킬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의 심정과 같았습니다. 그때에 당국자들이 함구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확신에 차 말합니다.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몸을 제대로 쓸 수 없는 고통스러운 질병, 이를테면 관절염으로 수년 간 고생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무서운 통증을 겪어 왔습니다. 관절은 팽창되고 뺏뺏해졌습니다. 그는 물건을 잡을 수도, 걸을 수도 없습니다. 그는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며, 무서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의사도 수없이 찾아다니고 전문가의 의견도 들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좋습니다. 저는 뭐가 문제인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제가 고쳐 드리지요’라고 말하는 의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처방에 따라 약을 먹자 통증이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점차 관절이 편해지고 유연해지면서, 얼마 후에는 완전히 낫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관절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걸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다 그 의사의 처방덕분이었습니다.


그는 다시금 번화한 거리를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오후, 그는 길 맞은쪽에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안면은 없었지만,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는 금세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예전에 관절염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병이 나은 사람은 혼잣말을 했습니다. ‘저 불쌍한 사람은 이런 처방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게 분명해. 안다면  저럴 리가 없지.” 지금 그의 주머니 속에는 약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틀림없이 그는 그 사람이 있는 쪽을 향해 길을 건너야 한다는 부담을 느낄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병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길을 건너가 말할 것입니다. “선생님도 저를 모르고 저도 선생님을 모르지만, 선생님이 무슨 문제를 겪고 있는지는 알겠습니다. 혹시 이러이러한 처방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 그리고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약을 꺼내 보일 것입니다.


그에게 꼭 길을 건너야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내 주머니 속에 있는데도 말해 주지 않는다면 난 인간이라고도 할 수 없는 비열한사람이 되는 거야.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해 주어야 해. 저런 고통을 계속 겪게 내버려둬도 될까? 절대 안되지! 저 사람은 모르고 나는 아는 이 지식을 알려 줄 의무가 내게는 있는거야.”


당국자들 앞에 선 베드로와 요한의 심정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들 때문에 그들은 심각한 필요를 안고 있는 인간의 실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진리는 죄에 빠진 인간의 상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전과 같은 눈으로  인간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나란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했습니다(고후5:16). 예전에는 사람을 “육체대로” 알았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흑인과 백인 동편을 가르는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인간이 마귀와 세상과 육신의 노예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비참과 불행, 온갖 죄의 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크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또한 두 사도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두 사람은 그들을 단순히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로 보지 않았습니다. 다툼이나 자기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로 보지 않았습니다. 절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영혼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인종에 속한 사람이건 모두하나님 앞에 서야합니다. 죽은 후에 다 하나님 앞에 서서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그들은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형벌을 향해 돌진하는 영혼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만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보았으며, 그들의 영원한 존재가 빠져 있는 위험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경악케 했습니다. 그들은 죄와 사탄의 먹이에 불과한 인생을 자랑하는 사람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실패한 인생을 자랑하는 사람들의 무지를 보았습니다. 오,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보면서 크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런 이유들만으로 이처럼 당국자들에게 맞서는 어려움을 감수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의지하는 어떤 것도 자신들을 돕거나 구원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심지어 유대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킨다고 해도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그들도 다 해본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기대를 걸 고 있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자신들을 회복시켜 주신 분이 사람들도 회복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속에 있는 어떤 것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았다는 것, 그리스도야말로 구주시라는 것,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 나타난 이 계시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원했고, 말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구원의 길은 하나밖에 없으며, 오직 은혜로만 주어집니다. 죄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리 깊은 곳에서라도 능히 끌어올리실 수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만, 단순한 믿음과 신앙의 행위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엡2:8).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들에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절박한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계속 말하기를 고집한 마지막 이유가 있는데, 제가 볼 때 이것은 아주 인간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찬양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전에도 주님을 흠모했습니다. 그분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을 때조차도 사랑했습니다. 그런 분은 한번도 만나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하늘의 구주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을 그분께 이끌어 오는 일, 모든 사람에게 그분을 알리는 일, 온 세계가 그분을 찬양하게 하는 일에 가장 큰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 역시 인간적인 차원에서 흔히 경험하는 일 아닙니까? 자기를 고쳐줄 수 있는 의사를 마침내 찾아낸 사람의 예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는 남은 평생을 그 의사 이야기를 하면서 지낼 것입니다. 그는 그 의사처럼 훌륭한 사람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칭송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사도들을 움직인 동기도 그것이었습니다. 요컨대 그들은 이렇게 말한 것과 같습니다. “당신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어떤 분인지 생각할 때 우리는 도저히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분의 영광과 위엄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으며 당신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실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세상에 말해야 합니다.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말하지 않으려고 해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참된 기독교에 언제나 나타나는 표지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일단 이 메시지를 보고 이 메시지에 붙들려 다스림을 받게 된 사람은, 그 자신이 먼저 완전히 변화되며 모든 사람에게 그 메시지를 전해야겠다는 느낌을 갖게 될 뿐 아니라. 그 메시지 때문이라면 기꺼이 당국자들에게 맞서 죽음까지 감수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이처럼 당국자들에게 맞섰고, 당국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동원해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사도들이 논쟁을 벌인 상대는 그들과 대등한 사람들이 아니라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제사장의 문중”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로마와 결탁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불과 몇 주 전, 복되신 주님을사형에 처한 바로 그 권력에 맞서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저 없이 관원들에게 대항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주 명백히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그러나 이 위협에 대한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든 상관치 않고 밀어 붙였습니다. 죽음도 개의치 않고 밀어붙였습니다.


결국초기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복음을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했고, 베드로도 목숨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자연사했다는 전설이 있지만, 그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쁘게 자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이런 당국자들의 도전만 받은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 전체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가이사가 주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가 주라고  계속 떠들면 원형경기장의 사자들에게 던져 버리든지 고문을 하든지 사지를 찢어 버리겠다. 그래도 계속 떠들겠느냐?”는 도전에 그들은 “물론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복되신 예수의 이름을 위해 목숨 내놓는 일을 가장 큰 특권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기꺼이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스미스필드에 가보십시오. 신교도 순교자들은 예수를 부인하고 신앙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내놓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버리느니 차라리 죽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왜 이처럼 당국자들에게 대항했습니까? 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에도 사무실에서 비웃음거리가 되거나 휴게실에서 우스갯거리가 되어도 믿음을 고수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설령 온 세상이 조롱하고 비웃고 놀린다해도 믿음을 지킬 것입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답은 이주 간단합니다. 사도들의 말 그대로 ‘자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행5:29).


사도들은 왜 설교했습니까? 첫째로, 주님께서 설교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하셨습니다(녹24:49). 그리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행1:8). 주님은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들을 파송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명하셨습니다. "가라!” 그들은 관원들보다 높은 권위에 순종했습니다. 관원들은 세상의 유력자일 뿐이었지만, 그들에게 명령하신 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신 하늘의 왕이셨습니다(마28:18).


이 모든 것은 사도바울의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자신이 설교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4).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죄와 수치와 악에 빠진 인간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것이 저를 강권하고 있습니다. 그가 저를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 보십시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같은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그 말을 해주어야만 합니다.


생각해야 할 측면이 또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답변=하려〕함이라.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고후5:10-11).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답변해야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관원들의 말을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따를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에게 명령하셨고. 그들은 그분께 답변을 해야합니다. 자기 목숨 하나 구하려고 입을 다물었다가 또 겁쟁이가 되고 말았다는 자책감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그분의 얼굴을 어떻게 뵙겠습니까? 그들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순종해야 했습니다.


만약 이런 자리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러면서도 어쨌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형편없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의견보다 사람들의 의견을 우선 시 한다면, 여러분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칭찬보다 사람들의 생각과 칭찬을 우선 시 한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것은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증인이 되어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구원받은 여러분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다면, 거듭 말하지만 어딘가 주님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여러분의 삶 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주님께 설교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설교하지 않으면 가치 있는 삶을 살수가 없었기 때문에 당국자들에게 맞섰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생명을 준 가장 놀라운 일을 경험했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살아야 한다면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일을 말 할수 없는 삶은 단순한 생존에 불과할 것이며, 공허하기 짝이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치든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있고, 새 능력이 있고, 새 지각이 있고, 새 기쁨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그것을 부인하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는 단순히 생존하는 일이나 생명을 연장하는 일이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만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헛된 모든 영광

아침 안개 같으나.

-존 뉴튼 (John Newton)


세상은 공허합니다. 그래서 계속 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부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내게 사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뿐입니다(빌1:21). 그리스도는 내 생명의 원천이요 내 모든 존재의 중심으로, 나는 그리스도안에서만 말하고 생각하며 모든 일을 하기 때문에 그가 없는 삶은 아무 것도 없는 삶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혼돈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당국자들에게 맞선 마지막 이유는, 그들이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데 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영광이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공포가 되지 못합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6-57). 그리스도인은 무덤과 죽음을 향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15:55). 베드로와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우리를 죽이십시오. 그래도 당신들은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공포를 주지 못합니다. 죽음은 쏘는 침을 잃고 말았습니다. 무덤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를 죽이십시오. 그러면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해주는지 압니까? 우리를 생각보다 일찍 그리스도께 보내 주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더 좋은 일입니다(빌1:23).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맨 나중 원수'인 사망을 비롯해 모든 원수들을 정복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10). 그들은‘성도들이 영원히 다스리는 순전한 기쁨의 땅’을 보았습니다. 그 나라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죽으면 그 나라로 안내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음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예비된 영광을 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아, 그를 두려워하라.

그러면 아무 것도 두려워 할 것 없으리.

-네이험 테이트 .니콜라스 브레이디 (Nahum Tate & Nicholas Brady)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그래서 그들은 오거스터스 토플래디처럼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도, 하나님도

두려워 피할 필요 없도다.

구주의 순종과 피

내 모든 죄 가려주시니.


우리도 허식과 겉치레와 거만과 칙령과 율법으로 무장한 당국자들 앞에서 만면에 미소를 띠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주는 고생 근심

나 주님 품에 달려가게 만들뿐,

시련의 삶 고되게 짓눌러도

더 달콤한 천국 안식 있도다.

오, 주님 사랑 있으면

슬픔도 날 해치 못해.

오, 주님 축복 있으면

기쁨도 내 마음 뺏지 못해.

-헨리 프랜시스 라이트 (Henry Francis Lyte)


베드로와 요한에게 중요했던 것은 주님과 그들의 관계였고, 주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주님 없는 세상을 주어 보십시오. 그저 공허하게 여길 것입니다. 싸구려 장식으로 여길 것입니다. 거름더미, 쓰레기더미로 여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 가진 것 없어도, 주님 한 분으로 모든 것 가진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는 사람을 이렇게 만듭니다. 그들은 개념들을 놓고 추측만 하지 않습니다. 정치적, 국제적 쟁점을 논하는데 시간을 전부 투자하지도 않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기독교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독교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1:21,23).


여러분이 기독교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여러분을 바꾸어 놓았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주인이 되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에게 해준 일을 생각할 때 모든 이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부담을 느낍니까? 그것을 위해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참된 기독교는 그런 것입니다.


출처/청교도의 후예 로이드존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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