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Re: 한번구원영원구원?(2장-4)-영생에 대한 오해?
도슨의 '복음주의적' 전제들의 네번째 항목은 '영생'에 대해서이다. 소위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영생'을 오해하고 있는가 면서 비판하는 것이다.
과연 그의 '영생'에 대한 견해가 성경적인가?
그는, 잘못된 '영생'의 개념을 몇 개 나열하면서, 그의 주관심 사항인, '중생'이후에 '영생'한다는 견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중생(Regeneration)을 통해서 이미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고 믿을 것이다. 그들은 거듭났고(Born-again) 하나님의 불멸성을 공유할 새로운 성품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견해는 과거의 전망도 미래의 전망도 아니고 현재 모든 믿는 자들이 이미 그 불멸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 불멸성은 새로운 탄생 때 주어졌으며 다시는 빼앗기지 않을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관점은 몸의 부활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사고보다는 불멸의 혼에 대한 헬라인들의 사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견해에서 여전히 몸을 죽어서 먼지나 재가 될 운명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불멸성이 회심 때 신자들에게 전해 졌다면 그것은 현재 영(Spirit)의 부속물일 뿐이다"(p.56).
"...그러나 신약은 영생에 관해서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소유이기보다는 소속(Position)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 아니라 우리와 공유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 안에 영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있을 때 우리 것이 된다. 요한은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그가 복음서를 통해 독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계속해서 믿어서 영원한 생명르 계속해서 가지고 있도록 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했다(요5:11-12)"(p.57).
"...따라서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참 모호하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이미' 가지고 있지만,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하기도 하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지키지 않으면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가 영원히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 영생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직 그 때, 영생은 그의 영원한 소유가 될 것이다"(p.58).
도슨은, '중생'한 사람이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그의 비판의 잘못된 점이 위의 인용한 글들에서 잘 나타난다.
첫째, 그는 '영생'과 '불멸성'을 혼동하고 있다. 헬라철학에서의 '불멸성'은, 그 불멸성의 기원 자체를 영혼에 둔다.
하지만,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믿는 자들은 그런 '불명성'의 개념으로 '영생'을 이해하지 않는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믿는 자들은, 참으로 '믿게 되는 순간'에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으로 창조되고, 거듭나며, '중생'하게 된다. 새로운 '생명'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거듭나서 살게 되는 그 '생명'을 일러, '영생'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생명이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이고, 또한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다. 그것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영생'의 근거가 거듭나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분명히 하나님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도슨은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 그는 '소유'와 '소속'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다. 그는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지속하게 될 때'만 '생명'이 있다고 한다. 그 관계를 영원토록 지속하게 되면, 그때서야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고 한다. 마치 신자 안에 그 관계를 영원토록 지속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도슨이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떤 사실을 기술할 때, 그것을 '소유적'으로 묘사하는 것과, '관계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일종의 수사법에 속하는 것이다.
가령, I am sad.라는 문장을 I have a sad mood.라고 표현할 수 있다. I live foreve.라는 문장과 I have an eternal life.라는 문장은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상하게도 도슨은 이런 수사법상의 차이를 무시하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소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영생'을 언젠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왜 그것을 '지금' '소유'한다고 할 수 없단 말인가?
그는 분명히,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계속 있으면, 영생을 그때서는 소유한다고 한다. 영생을 분명히 소유될 수 있는 그 무엇임을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영생을 미래에 소유하는 것이라고만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제한시켜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니, 언듯 보면, 옳기만 한 것 같은데,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영생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하나 없이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지는 것 없이 영생이 있을 수 없고, 영생이 없는데로 그리스도 안에 계속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영생이시기 때문이다(요6:68).
영생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영생이 있다.
그러므로, 영생은 '관계'일 뿐만 아니고, '소유'이다. '관계'만을 강조하고, '소유'됨을 부인하는 것은, 왜곡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영생을 '관계적'으로 설명하는 것만 아니고, '소유적'으로 설명하는 곳이 수없이 있다.
도슨이 잘못 소개하고 있는, 요한복음5장11-12(아마도 번역자의 실수인 것 같다!)이 나오는
요한복음5장에서만 해도, 그런 '소유'로서의 '영생'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에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40).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이 말씀은, 영생을 예수님 당신과의 "관계'로서 설명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곧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분명히 생각하셨음을 보여주고 있다.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고 해서, 지금 이 글을 쓰는 홀리조이가, '영생'을 '동전'을 '소유'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비판할 지 몰라서 토를 단다. 그런 사람에게 묻고 싶다:'구원'은 '10원' 마이너스 1원인가?
그런 사람은 '구원'받고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영생'은 그렇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시고, 근거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내주하시게 되고, 또한 보증으로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바로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영생을 '잃어버릴 수 있고' 또한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도슨이야말로, '영생'을 소유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