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Re:한번구원영원구원?(프롤로그)-데이비드 포슨의 잘못된 선입견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라는 책의 '프롤로그'에서 데이비드 포슨은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합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는 말은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진부하리 만큼 낯익은 표현이고 책이나 전단의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이 책도 그렇지만 여기에는 의문부호를 첨가했다).
우리가 성경 안에서 이 표현 즉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발견할 수 없음에도 이 표현은 실제 성경에 나와 있는 표현인 양 인용되는 일이 빈번하다. 이 표현은 너무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나머지 '좀 더 서두르되 속도는 천천히 하라'와 같은 격언의 위치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작은 신조 정도까지는 못되더라도 적어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격언 정도는 되고 있다"(p.21).
"우리의 생각은 '영원한 안전'이라는 개념으로 꽉 채워져 있다. 전도자들의 암시적인 설교와 목사들의 명시적인 가르침이 함께 어우러져 우리가 미래에 대해서 의심할 것이 없다고 확신시키고 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안전하다'는 의미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p.22).
"수년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이 문제를 놓고 토론한 끝에 두 가지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첫째, 그것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은 단지 그들이 그렇게 들었기 때문에 믿고 있었다...내가 동료설교자들에게 왜 그렇게 설교하느냐고 물었을 때, 단 한 사람도 "그것이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 사람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나는 개혁주의(칼빈주의)에 속했어'라고 대답함으로써 자신들의 생각이 신약성경보다는 그 이후 진행된 수 세기 동안의 연구결과에 더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둘째...내가 만난 사람 중에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성경을 연구해야만 했던 모든 이들은 그들이 결국 하늘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구원을 보존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갖고 있었다"(p.22-23).
"...순간적인 만족에 기반을 둔 사회는 순간적인 은혜의 복음에 반응한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고 설교하는 일이 그 분이 우리에게 의로움을 요구하신다고 설교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편에서의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상은 '공적'(Works)이란 말로 슬쩍 바꿔 말해짐으로써 경멸과 무시를 당하고 말았다. 우리가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일'(Working out)이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무엇인가 '공적을 쌓는 일'(Working)로 둔갑한 것이다"(p.24-25).
"이제 할 일을 시작하기 전에 두 가지 서론적인 언급을 더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명사는 잘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오늘날 그 단어는 구원받을 사람들 속에 '도착'한 혹은 적어도 '선을 넘은' 사람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정적인 단어로 '계속되는 진전'의 뜻이 결여되어 있다. 초대교회 시대에 신자들을 위한 가장 적절한 명칭은 '제자'였다(사도행전을 보라). 이 단어는 훨씬 더 역동적이고, 그들의 스승에게서 계속 배우고 따르고 있는 사람에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이미 선을 넘었다'는 생각보다는 '가는 도중'(On the way)에 있다는 개념을 담고 있다.."(p.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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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에서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을 이미 암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정작 그는 성경이 그러한가 살펴본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전제들을 가득 가지고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란 표현이 '진부'하다고 한다. 자신의 느낌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의 메세지에 감격한 사람이 그것을 '진부'하다고 여길까? 그의 '진부'함은, 그의 편견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그가 '참신'하다고 여기는 것은, 이 말에 '?'을 붙여놓는 표현일 것이다. 그것을 놓고는 얼마나 흐뭇했을까? 자신의 참신한 책제목을 쳐다보면서, 한 칼에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표현을 잘라 낼 수 있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이런 접근이야말로 얼마나 '진부'한가? 나의 데이비드 포슨의 비판을 위해서 제목을 붙이기를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하면 얼마나 '진부'한 것일까? 나는 그런 진부함의 진부함에 너무 가벼움을 느낀다.
두번째 그의 선입견은,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원한 안전"의 개념으로 머리 속이 꽉 차 있어서, 한 번 받은 구원으로 천국티켓을 따놓았다고 안심하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식의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구원받았다'는 것이 '안전하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그의 말에 이런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을 비판하려면, 그 메시지가 과연 무엇을 갖고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한 뒤에 비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비판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것인지...벌써 예상하게 한다. 허수아비를 세워놓고는 두들겨 패놓고는 자신이 마치 강적을 만나 그와 더불어 싸운 뒤에 승리했다고 미소를 짓고 있다면, 그런 모습은, 마치 돈키호테식의 기사정신이다.
세번째 그가 갖는 선입견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치 성경도 참고하지 않고, 마치 이전의 교리들을 앵무새처럼 배워서 암송하는 사람들인 것같이 생각하는 것에 있다. 자신이 만난 설교자들 모두가 성경을 읽어보지도 않고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의 메시지를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만난 설교자들이 어떤 자들일까? 엉터리설교자들만 만나서, 모든 설교자들을 만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선입견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자기와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경을 참조하지도 않고 묵상하지도 않은 채로 자기와 토론에 참여한 것처럼 착각하고, 마치 자기만이 성경을 참조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모습이다. 누가 성경을 참으로 정직한 모습으로 참고하고 있는지는 그의 견해를 비판하는 이 글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네번째 그의 편견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순간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요, 구원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로서의 의로운 삶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인 것 같이 생각한다는 것에 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순간적인 은혜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 '순간'의 인간의 순간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것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에 의하여 주어지는 '순간'이다. 하나님의 순간인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구원이 '순간'에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은혜'이고, 그것이야말로 '선물'이다. 인간의 장구한 시간에 걸친 노력과 공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선물'이 되고, 어떻게 '은혜'가 될 수 있을까? 자기가 얻게 된 '구원'에 의해서 얼마나 흐뭇해 하고 자랑할 것인가?
자, 그렇다면, 다음의 선입견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번째, 그는,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Working out'(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언제 한 번이라도, "항상 복종하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하)을 부정한 적이 있는가? 데이비드 도슨이 제대로 연구하였다면,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이 구절을 진지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문제는, 해석이다. 그리고 어떤 해석이 이 말을 한 바울사도의 의도이며, 바울을 감동시키신 성령의 의도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지 않는가? 바로 성경의 말씀 앞에 서보자는 제안을 이 비판의 글이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제자'라는 말을 선호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자제하겠다고 한다. '그리스도'이란 말은, '선을 넘었다'는 뉘앙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도중에 있는 자'라는 인상을 주는 '제자'라는 말을 선호하겠다고 한다. 이것 자체가 그의 선입견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제자'는 중간에 탈락할 수 있는 자들이다. '하늘의 떡'에 대한 메시지를 듣고 얼마나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등을 돌렸는가?(요6:6). 그들은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니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제자들"인 것이다. 그런데, 데이비드 도슨은, "그리스도인"이란 말 대신에, '제자"라는 말을 선호하겠다고 하니, 이미 그의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다. "제자들" 중에는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될 사람들도 있고, 그 "구원"에 전혀 이르지 못하게 될 단순히, "도중에 있는 자들"일 뿐이다. 제자들은 제자들일 뿐이다. 모든 제자들이 12제자들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무식이고, 착각이다. 그런 무지와 착각에 기초해서,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리게 되는, '한 번 구원 영원한 축복'을 논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어불성설이다!
그 어불성설의 진상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칼미니스(Calminist)틀의 그 어이없음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