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잘못된 질문에 잘못된 대답-부흥과 개혁카페의 토론을 지켜보면서
잘못된 질문에 잘못된 대답
요즘 자매카페인 ‘부흥과 개혁’에서 흥미로운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실은, ‘흥미’롭다기 보다는, 따분하고 지지부진하기만 한 것 같다는 것이 저의 소감입니다. 하여튼, 이 논의가 제가 최근에 새롭게 개설한 애모랄디즘에 관한 게시판에서 비판하는 글들과 연관성을 갖는 것 같아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최근에 올려진, 다음의 글들을 보면, ‘잘못된 질문에 잘못된 답변’을 제시하고 있는 그 구체적인 한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답변하고 있는
잘못된 질문과 잘못된 답변은, 토론과 논의의 향방을 흐려놓게 합니다.
그 토론이 좀 더 유의한 방향으로 전개되기를 관전자로서 소망해 보는 마음으로 이 글을 올려놓습니다.
양무리마을카페지기, 홀리죠이
***** (옮겨놓는 글) *************
(
성경은 속죄에 관련하여 대상과 효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한 속죄는 택한 자들만을 위한 피 흘리심과 효력 누림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그와 다른 구절들이 있음을 언급했습니다.
제한 속죄와 다르게 말씀하는 구절을 인정하면서 여전히 제한 속죄가 옳다고 말하는 상황입니다.
그 이유는 제한 속죄를 말씀하는 구절들이 성경에 많기 때문입니다.
제한 속죄와 다른 본문은 한 두 구절 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속죄와 관련하여 구원파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완전성에 입각하여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사하여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개혁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구원파는 이 사실을 토대로 하여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의 범죄에 대하여 사함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반면에 개혁주의는 자백하고 사함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개혁주의의 주장을 지지하는 본문은 요일
제가 아는 한에는.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다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본문들은 속죄의 완전성만을 말씀하고 있지 현재의 죄에 대한 자백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한 속죄의 논리를 따르면 구원파의 주장이 옳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개혁주의에서는 구원파의 주장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단 한 구절을 내세워서.
이중 잣대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제가 당혹스러운 것은 박목사님께서 개혁주의 신학을 비판하신다 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의 말하는 바를 잘 모르고 계신 것 같다는 점입니다. 저번에도 구원파를 언급하셨던데, 구원파가 주장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는 죄사함과 회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죄사함은 우리의 자백과 회개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사함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됩니다. 그때 구원파가 묻는것, "그러면 회개는 왜 필요하냐?" 이것은 우리가 믿는 신앙고백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는 죄사함 받기 위한 방편이 아닙니다.
죄사함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된 것으로, 과거의 죄도, 현재의 죄도, 미래의 죄도 모두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만으로 된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회개를 통해 죄사함을 받는다는 개념은 없습니다. 이것을 행위주의적 구원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회개는 “신자가 '감사의 삶'을 살아야 마땅하나, 죄로 말미암아 그 길에서 이탈했을 때, 다시 본 궤도로 오르기 위해 ‘죄를 슬퍼하고’, ‘다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박목사님의 글을 보면, 정말로 신앙고백을 제대로 아시고 비판하시는지 정말 궁금해 집니다.
참고로 신앙고백서의 한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15장 3항> "회개가 죄에 대한 어떤 속상이 되거나, 죄 용서의 어떤 원인이 되는 것으로 믿어서는 안된다. 죄사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행위이다. 그렇지만 회개는 모든 죄인들에게 필요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회개함이 없이는 죄사함을 기대할 수가 없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박목사님이 개혁주의신학이 말한다고 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회개는 죄에 대한 속상이나 죄용서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죄사함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앞의 논의에서도 그렇고 지금의 논의도 그렇고, 박목사님이 개혁주의 교리들을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여기에서처럼 이중잣대라고 생각하는 것 모두가 근본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이해의 결여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래의 글에서 보여주신 이세령 목사님의 자세에 저는 긍정과 찬동을 보냅니다. 우리가 주도면밀하게 연구하여도 우리 앞서간 선배들이 검토한 것을 미처 다 못살필 수 있기 때문에, 신앙고백이나 교리를 비판하는 것에 템포를 늦춰야 합니다. 그런데 박목사님은 어느 정도의 사람이면 알수 있는 내용에서조차도 검토가 부족하여 잘 모르시는 것을 그저 교리나 신앙고백의 오류라 여기
시는 경향이 다분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개혁주의 신학과 교리, 혹은 신앙고백을 비판하시기 전에 먼저 그에 대해 주도면밀하게 검토를 먼저 해 보셔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 없이 박목사님이 잠깐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지조차 검토해 보지않고 교리나 신앙고백을 우습게 여긴다면 그것은 영적 교만외에 무엇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