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문제자료

[스크랩] 교회가 믿고 있는 문화적 거짓말들-존멕아더 외

baromi 2007. 1. 12. 07:31
세상 문화에는 거짓된 생각이 숨겨져 있다. 이 거짓된 생각들은 교회에
거짓된 가치관을 심으면서 혼동 가운데로 몰아 간다. 그 거짓말들은 다음과 같다.

1. 우리의 가치는 행하는 역할에 있다/ 레이니어 번스(Lanier Burns)
2. 성공을 가져다 주는 일만 하라/ 크로포드 로리츠(Crawford W. Loritts Jr.)
3. 우리가 세상을 개혁할 수 있다/ 존 피셔(Jojn Fischer)
4. 겉으로 나타난 게 전부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
5. 큰 것이 좋다/ 폴 시더(Paul Cedar)

이글은 MOODY(5/6, 1998) pp.22-23에 실렸던 것으로 허락을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Copyrightⓒ1998 by Moody Magazine.
Used by permission.(This article first appeared in the May/June issue of Moody Magazine. It is reprinted with per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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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가치는 행하는 역할에 있다


레이니어 번스(Lanier Burns)


가족과 사회 안에서,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우리의 가치는 흔히 직업, 수입, 지역 사회, 회원권, 명성, 인종, 성별(gender) 등과 결부된다. 가인이 아벨을 시기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지위는 인간의 큰 관심사였다. 자신이 친척으로부터, 교회 동료로부터, 사업상의 동료들로부터 어느 정도 존경을 받느냐 하는 생각이 자기 정체성의 많은 부분을 형성한다. 일상적 인간 관계에서 존경이라는 것은, 우리의 가장 강력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이다. 사회적 성공의 원리는 때로 성경의 원칙에 어긋난다. 이는 교회의 신뢰성에 타격을 줄 수도 있는 문제이다.

양립할 수 없는 사회적 방식과 성경적 방식이 혼합될 때 사역은 세상과의 타협으로 인해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존중받지 못할 사람이 존중받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도 있다. 차세대를 가르치는 어린이들의 교사가, 담임목사보다 가치가 덜한 존재인가? 부당하게 존중받는 교회들이 있는가 하면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존재로 잘못 치부되는 교회들도 있다. 50명의 활기찬 시골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이 현실적으로, 1만 명의 “기업형 교회”를 맡은 목사님과 같은 존경을 받고 있는가? 교회가 사회적으로 저명한 사람들과 비중있는 인사들만을 존중하고 성경적인 사역의 원칙을 무시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인간 가치의 근원

성경은, 신자든 아니든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존엄성을 가지고 있고 존중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가르친다. 인간 남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창 1:26~27) 이런 하나님 닮음은 우리 주님에게서 완벽하게 나타났다(고후 4:4). 따라서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창 9:1~6). 어느 누구도 멸시하거나 저주해서는 안 된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야고보는 말한다(약 3:9~10). 세계 도처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인종 폭력 사태는, 인간 평가 절하 때문에 사회적 분열과 전쟁이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 가치 기준에 속박을 받지 않았던 예수님은, 때가 좋지 않았음에도 사마리아 여인에게 “성령과 진리로” 자유롭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녀도 그런 속박에서 벗어나 이웃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였다(요 4장). 인간 존엄성의 문제는 고린도전서에서 크게 확대되어 나타난다. 거기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점들과 그에 관한 치유책을 기술하고 있다. 고린도교회는 세상이 중시하는 문화적 거짓말을 가치 있게 생각했었다. 신자들을 무시하고 명망있는 지도자들과 볼 만한 사역들을 높임으로써 성도 전체에 해를 끼쳤었다. 국제적인 도시의 도덕적 압박 속에 헤매던 미숙한 고린도 교인들은 사회적 가치관으로 성경적 원칙을 짓눌렀다. 이런 타협적 태도는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첫사랑을 희생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 중심의 사역으로부터 인간적 명망에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이런 태도에 대한 바울의 우려가 고린도전후서에 깊이 드러나 있다.

 

 

 



퇴보적 나선 운동

역할과 지위에 대한 자랑은 불건전한 경쟁을 유발하고 이런 경쟁은 결국 분쟁을 일으킨다. 이는 성경적 가치관으로부터의 이탈이 빚은 결과이다. 사슬의 고리는 분명하게 이어진다. 그리스도 중심의 헌신에서, 사회적 압력, 시각의 상실, 자기 중심적 경쟁으로 퇴보하다가 결국 다툼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될 것을 호소하며 이것이 열매 맺는 사역의 불가결한 토대임을 강조하였다(엡 4:1~16, 빌 2:1~5). 바울은 자신의 중요성을 철저히 부인하였다(고전 1:13~17). 아마 오늘날 그의 이런 본을 흉내낼 만한 지도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자아에 무언가를 보태면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이 감소된다는 것을 그는 사도적 지혜로써 통찰하고 있었다. 가치와 역할 사이의 연계성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언급되고 있다. 거기서 바울은 다양성 속의 단일성 원리를 기술하고 있다.

그의 지적에 의하면, 상이한 여러 기능들은 공동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각 신자에게 주신 것들이다(4~11). 교회는 다양한 지체를 지닌 그리스도의 한 “몸”이다. 각 지체가 모두 마땅히 존중을 받아야 한다. 모든 역할이 동일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에 대해 우월감을 표해서는 안 되며 다른 그리스도인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고전 12:24~25). 건강한 목회는 ‘눈, 귀, 손, 발’이 상호 의존적으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제 기능을 다하는 목회이다. 바울은 교회 내의 역할들에 우선 순위를 부여할 때도 ‘더욱 큰 은사’인 겸손한 섬김과 ‘보다 좋은 길’인 사랑을 강조한다(31절). 요컨대 인격을 높이고 은사를 낮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 사역에서 부정적인 비교, 경쟁, 갈등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런 ‘고린도주의’ 사고 방식은 명성이 하나님 중심의 자세를 대신한 것이다. 그 경우 교회는 시내의 사교 단체 가운데 하나로 전락할 수도 있다.

어느 지역을 가보더라도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기심과 사회적 중요도가 사회 기풍을 지배하고 있다. 어느 곳에나 대단히 거대하고 크게 번창하는 교회는 있기 마련이다. 거기에는 부활절이나 성탄절 등 중요한 행사 때에만 교회에 나오는 소수의 교인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교인들 가운데는,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자리를 얻기 위해 작고 초라한 교회를 배신한 이들도 있다. 그 큰 교회의 지도자들은 지역 사회를 움직이는 이들과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그 교회의 목회자는 거액의 사례를 받는 검열관으로서, 야고보서 2장 1절과 같은 귀에 거슬리는 설교 자료를 무시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나는 유치원의 교사나 매주 주보를 만드는 무보수 자원 봉사자일지도 모른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주일 아침에 주보가 나오는 한 교인들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드높은 성경적 이상들이 나의 섬김의 골짜기와 어떻게 어울리겠는가? 내가 남자들의 세계에서, 아이들이 영적 질병에 걸린 성인으로 자라기 전 그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도덕적 시민들을 세우는 여자라면 누가 알아주겠는가? 담임목사는 교회의 전문 리더십으로 인해 3배의 존경을 받는다. 지도자들의 가족들을 섬기는 교사들과 교역자는 두 배의 존경을 받는다. 그들은 유력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나는 거의 존중을 받지 못한다. 나의 역할은 사회의 눈으로 볼 때 천하기 때문이다.

20세기의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하나인 매럴린이 생각난다. 그녀는 세계의 외딴 지역에서 여러 해 동안 이름없이 사람들을 섬겼다. 하지만 마침내 어느 교회가 그녀의 공헌을 인식하고 감사해 마지않았다. 그리스티는 예전의 어느 공산주의 국가에서 10명의 여성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었다. 그 나라는 이 10여 명을 대형 교회로 칠 수 있을 만큼 영적으로 피폐해 있던 나라이다. 리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세계의 미전도 지역에 들어가 교회를 개척했다. 그 외에도 사회나 교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많은 사람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일

하나님이 주신 바울의 교리에 의하면, 이런 종류의 섬기는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그 나라의 시민들이며 이 일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사역이다.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 각자는 가치와 영예가 동일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고도로 가시적이고 전문적인 ‘명성’ 만큼 값진 존재들이다. 바울의 생각에 의하면, 하나님의 시각은 사람들의 견해에 비해 늘 난해하다. 하지만 우리가 하늘의 충격적인 상급 수여식장에 도달할 때 ‘가장 작은 자가 마침내 영원히 첫째가 될 것이다.’ 결국 인간의 가치에 관한 하나님의 시각은 사회적 존중보다 무한히 더 크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이다.

교회의 이슈는 규모나 부, 미관 자체가 아니다. 이런 기준들은 만만치 않은 사회적 적수들이다. 적어도 교회사를 놓고 보면 교회의 이슈는 하나님 중심성과 성경의 진정성이다. 우리는 이제 사회적 시각에서 벗어나, 우리의 에너지를 지상명령에 쏟아야 한다. 우리의 역할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우리의 가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만유의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데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등’ 시민을 창조하시지 않은 이상 우리는 모든 남녀를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레이니어 번스(Lanier Burns)/미국 댈러스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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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을 가져다 주는 일만 하라

크로포드 로리츠(Crawford W. Loritts Jr.)



어느 세미나에서 필자는 영적 은사 및 재능과 인격간의 관계에 대해 강사가 하는 말을 듣고 깊은 혼란에 빠진 적이 있다.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점은, 그의 결론에 마음이 끌리지 않고 그것을 믿고 싶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강의는 대단히 놀랍고 논리적이며 또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되었다. 내 마음속 한 구석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갈채를 보내고 싶은 심정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보다 분명하고 보다 강력한 어떤 ‘목소리’가 나의 내면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세미나 강사가 말한 것이 성경의 진리와 충돌된다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 강사가 무슨 말을 했다는 것인가? 그의 말은 이것이었다. “우리에게 행복과 성취를 가져다 주지 않는 일은 하지 말라.”

그 세미나가 잇은 이후 나는 교회들과 기독교 공동체 곳곳에서 이런 충고가 여러가지 방식으로 거듭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우리 가운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표는 개인적 행복과 성공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기껏해야 이런 시각은 세련된 이기심에 불과하다. 이것은 인본주의에,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 그리고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그릇 판단하는데 뿌리를 두고 있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서로 충돌할 때도 있다. 나는 안락한 생활 방식을 원하더라도 하나님은 소박하고 희생적인 삶을 사는 쪽으로 나를 부르실 수 있다. 내가 남의 눈에 띄고 남에게 인정받는 지위를 원하더라도 하나님은 조용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나를 부르실 수가 있다. 하나님의 승인을 떠나 내 욕망을 계속 추구한다면, 하나님의 권능과 뚜렷한 영향력이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이다.

 

 



모든 것을 바치라

행복과 성취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부산물이지 목표가 아니다. 이런 것들에 초점을 맞추면 인생의 기쁨도 의미도 목적도 사라지고 만다.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복종시킬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자기 뜻을 이행하신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쁨과 의미와 목적이 생겨난다. 문제는 복종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우리의 몸은 우리 존재 전체의 가시적 표현이다. 요컨대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우리의 목표도 꿈도 야망도, 소유물도, 우리의 행복과 성취의 욕구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이것은 “거룩한 산” 제사이다. 거룩한 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특별하고 독특한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우리를 특별하게 사용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희생적으로 살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욕구가 우리의 욕구가 되고 우리 영혼의 열정이 하나님의 뜻 행하는데 있기를 원하신다. 주님이 이런 시각을 친히 보여주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우리 자신의 요구를 포기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기쁨과 평화가 우리에게 찾아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우리 가운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조용하고 불행한 삶에 묶어 놓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행복과 성공을 추구하며 고된 일을 반복해왔다. 우리가 이를 거의 잡을 때쯤이면 이것은 우리를 피해 달아난다. 성공적인 사업가인 나의 한 가까운 친구가 언젠가 내게 자기 영혼의 갈등을 고백한 적이 있다. 젊은 시절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회에로 부르셨음을 알고서도 이 소명을 버리고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여러 해가 지나 그는 재정적인 목표를 거의 모두 달성했으나 거의 매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는 깨달음으로 인해 심한 괴로움을 겪었다. 최근 그는 자기 인생에서 일대 전환을 이루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원하신다고 믿는 곳으로 간 것이다. 오늘 그가 당신 곁에 있다면, 자기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예전에 모종의 잘못된 결론을 내렸었다고 힘주어 말할 것이다. 그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기로 결정하자 그 결과로 진정한 기쁨이 찾아 들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 가지 대답밖에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있다. 우리는 무엇이든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것만을 행하기 위해 몸을 바친 사람들이다. 바울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라고 말한다(빌 1:20~21).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였다.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이 삶의 동기가 되어야 하며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이슈와 관심사의 편집자여야 한다.

나는 헨리 블래커비가 그의 저서 「하나님 체험」(Experiencing God)에서 한 말을 무척 좋아한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를 따르고 그에게 순종하는 자들이다. 이에 관해 바울보다 더 웅변적인 말을 한 사람이 없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나는 내 삶을 직접 다스리고자 하며 ‘내 길’을 가고자 고집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할 때 깊은 자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감정과 순종

우리는 감정 때문에 순종에 방해를 받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감정은 중요하지만 감정이 삶의 선택에서 결정 요인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은 객관적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순종해야 할 어떤 대상이며 우리가 행해야 할 어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시는 일은 우리가 의지로 선택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그 일을 일단 이렇게 이해하면 거기에 응할 수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의 사역을 성취하라”(딤후 4:5, NASB)고 말한다. 바울은 목회에서 어떤 업적을 끌어내라고 말하지 않고 디모데에게 소명을 성취하라고 말할 뿐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어떤 일로 인도하시는가? 당신은 그 일을 하고 있는가?

문제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가 이다. 우리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때, 인생은 너무 짧고, 영원이라는 것은 개인적 성공을 위한 자기 중심적 가설들을 추구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무대가 되기를 원하신다. 바울은 이러한 시각에서 열정이 있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9~12).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의제에 바친 삶의 결과와 유익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위대한 기도에는 단 한 가지 간구밖에 나오지 않는다. 바울은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가득 차기를 구한다. 이어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어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인가를 나열하고 있다.

첫째, 우리는 삶의 변화를 체험할 것이다. 바울은 성도들이 “주께 합당히 행하기”를 기도한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이다.

둘째, 우리는 삶의 도전에 맞설 수 있는 힘,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경험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바칠 때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삶의 비극적인 굴곡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해 주는 풍성한 은혜와 힘이 있다.
셋째,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주신다. 바울은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선언하면서 기도를 끝맺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는 특권을 얻기 때문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순종하며 찬송가 작가처럼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주여, 당신 자신의 길이, 당신 자신의 길이 … 나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통치하게 하소서.”

그렇다. 삶의 목표는 행복도 성공도 아니다. 삶의 목표는 순종과 바침이다.

크로포드 로리츠(Crawford W. Loritts Jr.)/미국 CCC 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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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개혁할 수 있다


존 피셔(Jojn Fischer)
 


미국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허다한 남성들이... 우리 나라의 수도로 왔습니까?” 1997년 10월 4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서 “갭을 막아서라(Stand in the Gap)”라는 주제로 열린 프라미스 키퍼스 집회에서 이 단체의 회장 랜디 필립스는 청중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정치적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남성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종교적 가치관을 남에게 강요함으로써 국가를 되찾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정치와 신앙에 있어서,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의 능력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반면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불신해 왔음을 고백하는 바입니다.” 이 수사학적 질문들은 그 질문들에 관한 단정적인 부인만큼이나 중요하다. 이 질문들은 어떤 인식, 널리 퍼져있는 어떤 인식(그것이 맞든 틀리든)을 반영하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교회의 광범위한 정치화를 목격하였다. 1979년에 창립된 모럴 머자러티(Moral Majority)의 발흥과 함께, 그리고 10년 후 있었던 크리스천 코울리션(Christian Coalition)의 형성과 더불어, 미국인들은 낙태, 공립 학교에서의 기도, 동성애에 대한 시민 권리, 포르노, 사립 학교 교육, 전통적인 미국 가정 등을 포함해 다수의 기독교적 관심사를 익히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앞면의 중요한 뉴스거리와 사설의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이 때문에, 국가의 수도 앞에 머리를 숙인 수천 수만의 남성들이 오로지 기도할 목적으로만 모였다고 불신 미국인들이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더라도 어려웠을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미국을 되찾으라’는 말이 전국적으로 강단과 기독교 라디오 방송에서 붐을 이루었다. 음모에 대한 두려움, 동성애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의 ‘권리’가 전통적인 미국 가정의 ‘권리’보다 더 많은 주의를 끄는데 대한 분노가 잠자는 한 거인을 깨워 놓고 말았다. 1996년 랠프 리드는, 미국의 세속화라고 생각되는 것을 좌시하지 않으려 하는 근 3천만명의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에 관한 어떤 그림에서, 제리 폴웰의 조용한 다수(majority)를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정치적 행동주의 배후에는 복잡한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를 개혁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종교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낳지 않고 우리 문화 속에 도덕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 우리가 ‘미국을 되찾고자’ 하다가 복음의 적을 만들게 되지는 않을까? 우리가 원하는 미국을 얻기 위해, 잃어버린 영혼들로 하여금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바로 그 복음에 대해 적대적인 자들이 되게 한다는 것은, 비싼 값이 아닐 수 없다. 랜디 필립스가 워싱턴에서, 우리가 “인간의 능력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반면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불신했다”고 고백한 것도 아마 이런 문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이 고백이 다음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반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불신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신뢰에 대해 세상에 주는 일종의 공동적 사과였다.

 

 

 


세 가지 유혹

사회에 대한 도덕적 영향의 수단에 희망을 거는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세상 속의 자기 역할을 오해할 소지가 대단히 높다. 내 말은, 사회적 도덕이 가치 있는 대의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이런 싸움을 수행할 때 세상의 무기는 의의 무기보다 언제나 성능이 더 좋다는 뜻이다. 배척 운동, 행진, 백악관 안의 대표자들은 종종, 하나님만이 일으킬 수 있는 장기적인 마음의 변화를 무색하게 한다. 정치적 승리는 직접적이고 손에 와 닿는다.

또 하나의 유혹거리는, 천상적 결과를 얻기 위해 세상적 영향력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 오류에 빠질 때 그리스도인들은 혈과 육으로 싸우게 되거나, 하늘의 정사와 권세(엡 6:12)가 아닌 인간들이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눈에 띄는 결과를 얻고자 거룩하지 못한 동맹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거듭 기도하지만 하늘의 시각을 생각하며 무언가를 결정할 때가 얼마나 있는가? 우리는 너무 쉽게, 너무 자주 인간적 행동 방침에 매혹 당한다.

사회적 도덕과 관련해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수 있는 유혹 거리가 하나 더 있다. 이는 가장 위험한 것으로서 다름 아닌, 권력의 매력이다. 여러 해 동안 문화적으로 별 볼일 없는 위치에 처해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이제는 사회적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우리는 정치적 권력의 마개를 따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눈에 띄는 영향력에 취하고 말았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정치적 엘리트와 친하게 대작하며 공직 출마를 제의하기도 한다. 마치 권력의 자리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도덕적 시계를 옛날로 되돌려 놓을 수 있기라도 하듯 말이다.

소금과 빛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속의 도덕적 행위자들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를 말할 때 하나의 규범으로 흔히 인용하는 것이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다(마 5:13~16). 나는 이 은유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우리의 논점을 명료히 해 주고 사회에 대한 적절한 영향력에 관해 우리에게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흔히 말하기를, 소금은 고기 등의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므로 이 은유는 우리가 사회에서 도덕적 부패 방지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하지만 문맥에서 이 단어는 맛과 관련해 사용되었다. 소금이 그 맛을 읽으면 전혀 쓸모가 없다고 예수님은 지적하신다. 마찬가지로 골로새서 4장 6절에서 바울은 대화에 관해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이것은 사회에 대한 도덕적 습격을 의미한다고 보기 어렵다. 이는 차별성을 보이라는 요구이다. 소금은 음식에 맛을 준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밝히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선을 행하는 것과 선하게 하는 것

예를 들어, 사회의 성적 타락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는 행복한 부부 생활이다. 이것이 삶에 맛을 주는 소금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부도덕한 세력들에 대해 배척 운동을 하지만 그리스도인들 스스로가 그 면에서 모순을 보이고 있다.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이혼율이 세상에 비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주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 변화는 일차적으로 무력이 아닌 모범에 의해 온다. 사회의 긍정적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이런 개념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선언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우리는 흔히, 세상에서 선을 행하는 것과 세상을 선하게 하는 것, 이 양자를 혼동한다. 우리는 결코 세상을 선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선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될 수는 있다. 그러한 본보기는 어둠 속의 빛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기회로 삼아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사회 속의 우리 존재가 부패 방지의 측면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공격적인 도덕적 캠페인을 통해 달성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 이웃의 도덕적 풍토는 그리스도인들이 거기에 살며 거기에서 선을 행한다는 사실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런 선행에서 유익을 얻는 불신자들은 결국 이 선행을 칭찬할 것이다. 이런 소금과 빛은 세상에 다리를 놓아주며, 복음 전파에 장애를 주기보다 기회를 제공해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1997년 가을 프라미스 키퍼스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워싱턴까지 고된 여행을 했던 일부 남성들은 거기에 일찍 도착해, 개교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버린 다수의 콜럼비아 지구 학교들을 복구하는 작업에 자원하여 참여했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행위가 그 어떤 시위보다도 더 강력한 사회적 회복을 안겨줄 것이다. 그 집회의 말미에, 2천년 주(州)의 수도들에서 다시 모이자는 요청이 있었다.
 
이 모든 남성들이 그러한 도시들로 모여들어 기도하는 만큼 땀까지 흘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이런 종류의 남성적 힘이 파괴된 도심지 빈민 지역에 얼마나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인지 상상해 보라. 우리가 신앙에 선행을 더해, 이 도시들을 처음보다 나은 상태로 만든다면 불신자들의 입술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이 나올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도덕적 감화의 훌륭한 본보기이다.

존 피셔(Jojn Fischer)/가수이자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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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나타난 게 전부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


어느 광고 회사가 우리의 목회 사역 광고를 구하면서 이렇게 썼다. “현실을 직시합시다: 외모가 전부입니다. 여러분의 이미지를 높이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를 보았을 때 처음에 이런 상념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광고 회사는 자신들이 기독교 단체를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군.” 그러나 다음 순간, 내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오늘날 많은 불신자들이 복음주의 기독교를 보고 느끼는 인상이 바로 이런 게 아니겠는가: 외모가 전부다. 진실과 현실은 흔히 이미지 뒤에 감추어진다. 이런 종류의 정신 상태가 오랜 동안 교회에 재앙을 가져왔으나 근년에 이것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말았다. 슬프게도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는 이미지를 누구보다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느 교회든, 이미지가 전부다 라는 철학에 빠져들고 있으며, 교회가 보다 매력적인 옷을 입고 출현하기 위해 진리를 위장하거나 경시해야 한다는 생각에 물들고 있다.

대결적이지 않은 우호적 이미지를 얻기 위해, 그 중요한 이미지를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많은 교회가 교회의 권징 실시를 없애고 말았다. 번드르르하게 윤기를 내는 외장판이 제 자리에 있는 한 몸 안의 죄는 어느 정도 보아줄 만하다는 것이다. 더더구나 한심한 것은, 이런 태도가 개인적 차원에서도 매우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의로운 체 하는 것도 실질적인 의로움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좋은 게 아니냐는 듯 살아간다. 바로 이것은 예수님의 시대에 바리새인들이 저지른 실수이다. 그들은 율법의 요구를 외면화했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율법에 대한 외적 순종이 하나님의 의의 모든 요구를 이행하는 것인 양 살았다.
 
그리스도는 외면적, 의식적 율법을 까다롭게 준수하면서도 율법의 도덕적 요구를 멋대로 무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책망을 던지셨다.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외적인 모습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다. 그러다 보니,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악한 생각을 하더라도 이 생각이 실제로 행동에 옮겨지지 않는 한 그게 죄가 되지 않는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의롭게 보이는 것에 온통 마음을 쏟았다. 하지만 마음 속의 극히 큰 죄악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밖은 번지르르하나 속은 부패한 것과 더러운 것이 가득 들어있는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였다. 도덕이 단순히 외적인 것이라는 관념은, 각가지 위선의 저변에 자리잡고 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도덕법 강해에서 비난하신 것도 바로 이런 오류이다. 예수님이 역설하신 핵심 교훈은 이것이었다: 외적인 모양은 아주 중요한 게 아니다. 도덕법의 바른 초점은 마음이며 외적 행동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율법 강해는 이미지가 전부라는 거짓말에 대한 통렬한 강타이다. 우리 주님은 내면에 얼룩진 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죄도 최악의 불경건한 행동으로 나타나는 죄와 똑같이 무겁다고 거듭 가르치셨다. 남을 미워하는 것은, 그 증오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만큼 죄악적인 것이며, 은밀한 정욕을 탐닉하는 짓은 방탕한 간음을 저지르는 일 만큼 죄악적인 것이라는 거다(마 5:21~3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은밀한 죄가 만인이 목도하는 죄보다 덜 심각하고 더 가볍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은밀한 죄가 특별히 혐오스러운 이유는 세 가지이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성경은 말한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죄도, 속삭이는 저주나 일말의 악한 생각도, 감출 수 없다. 사실, 하나님이 그런 은밀한 죄악의 유일한 목격자이심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그런 죄를 그처럼 가볍게 간주하는 경향이 줄어들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언젠가 각 사람의 마음속 은밀한 것을 심판하신다고 선언한다(롬 2:16). 주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실 것이다”(전 12:14). 그 뿐만이 아니다. 은밀한 죄들도 영원히 비밀을 유지하지는 못한다. “[주께서]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실 것이다”(고전 4:5).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2 ~3).

은밀히 죄를 범함으로써 부끄러움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어느 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은밀한 죄가 공개적으로 폭로될 때 최악의 수치를 당할 것이다. 죄를 은밀하게 감춤으로써 우리의 죄를 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가 공개적으로 범죄하지 않고 은밀히 죄를 짓기 때문에 남보다 더 낫다고 자위하는 것은 배나 어리석은 일이다. 죄를 덮음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최고로 어리석은 것이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한다”(잠 28:13). 공개적으로 짓든 은밀하게 짓든 모든 죄는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공격이다. 마음 속의 가장 은밀한 부분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제아무리 완벽하게 감춘다 하더라도 그 죄를 뚜렷이 보신다.

마음 속의 죄는 죄의 행위를 낳는 것과 동일한 도덕적 결함에서 나온다

예수님은 마음 속의 증오가 살인과 동일한 종류의 죄이며 정욕이 간음의 본질 그 자체라고 말씀하셨지만, 이는 마음 속에서 짓는 죄와 행동으로 짓는 죄가 정도상 차이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모든 죄가 똑같은 정도로 악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일부 죄가 다른 어떤 죄보다 더 악하다는 것은, 명명백백하며 전적으로 성경적이다. 성경은 이를 분명하게 가르친다. 일례로 유다의 죄는 빌라도의 죄보다 더 크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요 19:11).

그러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분노가 살인과 동일한 도덕적 결함에서 발생하며 정욕은 간음과 동일한 인격적 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나아가 생각으로 죄를 범하는 것은, 실제의 살인과 간음 행위를 저지르는 것과 동일한 도덕적 계명을 어기는 짓이다.
 
다시 말해, 마음속의 은밀한 죄는 최악의 악한 행위와 도덕적으로 동질이다. 정도가 덜 심하다 하더라도 말이다. 내면으로 정욕적인 사람은 방탕한 간음자보다 도덕적 우월감을 느낄 권리가 없다. 정욕을 탐닉한다는 사실은, 그도 역시 부도덕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형제를 미워한다는 사실은 마음속에 살인자가 잠복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자신의 은밀한 죄를 바라볼 때, 방탕한 공개적 범죄 행위에 대해 느끼는 바와 동일한 혐오감을 가지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자기 죄책을 숨기는 것은 위선으로 죄를 더욱 가중시키는 짓이다


은밀하게 범죄하는 자들은 사실 자기 죄책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자기 죄악에 위선죄까지 보태기 때문이다. 위선은 그 자체가 중대한 죄악이다. 위선은 또한 더욱 심한 종류의 죄를 낳는다. 위선은 응당 죄의 은닉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어느 종류의 죄든, 죄에 대한 유일한 구제책은 진실한 고백을 통해 우리의 죄를 폭로하는 것이다. 위선은 진정한 회개에 반하는 성향을 영혼에 침투시킨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위선을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고 지칭하셨다(눅 12:1).

위선은 또한 양심에 직접 해를 준다. 양심이 어느 정도 마비되지 않는 이상 위선적으로 나아갈 길은 없다. 그러므로 위선은 필연적으로, 인격에 손상을 주는 가장 악하고 은밀한 죄악이 출현할 수 있도록 길을 터 놓는다. 위선은 마치 누룩처럼 위선 그 자체를 더욱 악화시킨다. 그러한 종류의 누룩을 조심하라. 불경건한 문화는 겉으로 나타나는 외양이 전부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 거짓말을 믿지 말라. 실은, 사적인 은밀한 삶이 우리 인격의 실질적 척도이다: “대저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잠 23:7). 당신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싶은가? 당신의 은밀한 삶, 특별히 마음속 깊은 곳의 생각을 면밀히 살펴보라.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응시하라. 그 거울로 마음속의 실질적인 생각과 동기를 폭로하고 교정하라.


존 맥아더(John MacArthur)/그레이스 커뮤너티 교회
(Grace Community Church)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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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것이 좋다


폴 시더(Paul Cedar)

어느 목회자 칸퍼런스에서 한 강사가 자신의 친구 목사님과 나누었다는 대화를 소개하였다. 그 친구는 이 강사가 섬기는 교회보다 그의 교회가 훨씬 더 작다며 염려를 표하더란다. 그 친구 목사님이 말했다. “난 당신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일하고 당신보다 설교도 더 잘 한다고 생각되는데, 우리 교회가 훨씬 더 작단 말이네. 이해할 수가 없군. 당신 교회가 우리 교회보다 더 큰 이유가 뭔가?” 강사는 친구에게 대답했다, “그건 간단하지. 당신 교회가 우리 교회보다 작은 이유는, 당신은 하루에 한 시간씩 기도하고 난 하루에 두 시간씩 기도하기 때문이야. 그래서 우리 교회가 당신 교회보다 배나 더 큰 거라고.”

우리가 이 목사님의 대답에 미소를 지을지 모른다. 또 많은 사람이 기도가 목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강사의 말에는 우리 모두가 조심해야 할 어떤 기본 가정이 깔려 있다. 그 가정이란, 큰 교회가 작은 교회보다 좋다는 것이다. 두 목사님이 다 큰 교회가 더 좋고 더 성공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미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크다면, 교인수도 더 많고 프로그램도 훨씬 더 다양하며 교회 예산이나 건물의 규모가 더 웅장하다면, 그 교회는 분명 더 월등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한 생각은 현대 미국적 사고와 행위의 연장에 불과하다. 우리 문화의 주요한 거짓말 가운데 하나는, 큰 것이 언제나 더 낫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문화에서는, 제일 큰 집에서 사는 사람, 가장 많은 봉급을 받는 사람, 최고로 값비싼 차를 굴리는 사람, 가장 많은 “물질”을 모은 사람이 가장 성공적인 사람으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 ‘보다 큰 것’ 혹은 ‘가장 많은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그러한 철학에 빠진 사람이 나온다. 그는 크게 성공했다. 곡식 창고에 그 많은 곡물을 모두 저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계획을 세운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눅 12:18~19). 우리 문화는 이러한 사람을 성공의 왕 혹은 여왕으로 즉위시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선언하신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이 사람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해 우리 문화의 허다한 사람들이 믿고 있는 그 거짓말 위에 자기 인생을 세워 놓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재물을 축적했는가, 그리고 자기 곡식 창고가 얼마나 큰 가로 자기 인생을 가장 잘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처럼 그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겠지만, 우리도 교회에서 그와 거의 유사한 것에 초점을 맞출 우려가 있다.
 
예컨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많은 신도수, 가장 많은 출석 수, 가장 큰 건물을 가진 교회들이 진정으로 가장 성공적인 교회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큰 교회가 더 좋은 교회라는 거다. 사실은, 큰 것이 언제나 더 좋은 게 아니다. 이 문화적 거짓말을 고찰함에 있어서, 세 가지 성경적 원리가 큰 것이 언제나 더 좋다는 기본 전제를 이해하고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큰 것이 반드시 더 좋은 것은 아니다

큰 것이 언제나 작은 것보다 더 좋거나 더 효과적인 것은 아니라는 게, 성경에 계시된 진리이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거대하고 막강한 미디안 대군과 마주했을 때 기드온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원리를 가르치셨다. 기드온은 거대한 미디안 군대와 싸우기 위해 상대적으로 작은, 훈련받지 못한, 위용도 없는 3만 2천 명의 집단을 모았다. 그러나 여호와는 기드온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아직도 많다”(삿 7:4).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군대 규모를 300명의 작은 무리로 줄이라고 요구하셨다.
 
이어서 여호와는 기드온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들 네 손에 붙일 것이다”(삿 7:7). 이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여호와는 사울의 몰락 후 차기 이스라엘 왕이 될 사람에게 기름을 붓도록 사무엘의 길을 인도하실 때도 동일하게 이 원리를 따르셨다. 이새의 집에 도착한 사무엘은 즉시 엘리압에게 깊은 인상을 받고 속으로,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6~7).
 
사도 바울도 바로 이 진리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규모가 우리를 기만할 수 있다. 하나님이 언제나 큰 자, 인상적인 자, 지혜로운 자, 강한 자를 사용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때로 어리석고 약하고 작은 것들을 즐거이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작은 것이 반드시 더 좋은 것은 아니다

작은 것이 늘 좋고 큰 것이 항상 나쁘다고 믿는 것은 또 하나의 거짓말에 희생되는 것이다. 작은 것이 더 좋지 않을 때도 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신학교에서 “대형 교회와 소형 교회의 장점”이라는 교과목을 가르친 바 있다. 그 시간에 우리는 대형 교회의 독특한 이점과 소형 교회의 특이한 이점들을 탐구하였다. 현역 목회자 시절에 나는 7명으로 구성된 작은 교회와 5천명의 교인 수를 가진 대형 교회를 섬겨 보고 이 양극 사이의 여러 교회들을 섬겨 보았다.
 
주님은 은혜로, 그런 각 교회에서의 목회 사역을 축복해 주셨다. 작은 교회의 장점은, 모든 사람이 교회 가족 안에서 매우 친밀하고 사랑스런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 매우 간단하고 효과적인 의사 소통 체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 교회의 각 멤버에게 사역의 채비를 갖추어 줄 기회가 있다는 점등이다. 대형 교회의 이점에는, 은사가 매우 뛰어난 목회 전문가들과 함께 팀 사역을 할 수 있다는 점, 일부 주요한 재정적 인적 자원을 투자해 지역 사회를 섬길 수 있다는 점,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특수 사역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등이 포함된다. 작은 교회든 큰 교회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놀라운 사역 기회를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절대로 신도수를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길이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이다

어느 교회든, 어느 분야의 영적 삶과 사역이든, 가장 좋은 규모는 주어진 상황에 관한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자녀를 하나만 두어야 한다고 느끼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여러 자녀를 두기 원하신다고 믿는 성도들도 있다. 이 간단한 원리는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분야에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헌신적으로 따르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순종이 필수적이다.

프란시스 쉐퍼는 그의 책 「작은 사람은 없다」(No Little People)에서 크기 문제를 매우 잘 요약하였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작은 사람, 작은 장소는 없다.... 스스로를 작은 장소의 작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삶 전체를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영위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세대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각각의 모든 사람, 각각의 모든 교회가 생명처럼 중요하다. 우리는 한 몸,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다. 이 몸의 각 지체는 필수적이면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은 큰 것과 작은 것, 다윗과 골리앗, 작은 시골 교회와 도시의 초대형 교회, 단 하나의 재능을 가진 신자들과 많은 은사를 지닌 그리스도의 종들을 공히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진전을 위해, 우리 모두를 사용하기 원하신다. 큰 것과 작은 것을 공히 사용하기 원하신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0~31)

폴 시더(Paul Cedar)/미션 아메리카
(Mission America) 회장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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