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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령론소고-오순절파의 성령론비판을 중심으로-서철원교수

baromi 2007. 1. 12. 07:30
聖靈論 小考
[五旬節派의 聖靈論 批判을 중심으로]
 
목차

1. 서론 .................................................................... 3

2. 오순절 운동의 시작과 그 역사적 배경 ..................................... 6
2-1. 역사적 배경 .......................................................... 6
2-2. 교회사의 경우들 ...................................................... 8

3. 신령운동과 공교회의 태도 ................................................ 9

4. 公敎會의 성령 망각 ...................................................... 9

5. 분파 운동의 신학적 특색 ................................................ 10

6. 성령세례 - 오순절파의 신학 ............................................. 11
6-1. 이 교리의 원천 ...................................................... 12
6-2. 성령 세례의 근거 본문들 고찰 ........................................ 13
6-2-1. 사도행전 2:1-4 오순절 ............................................ 13
  6-2-2. 사도행전 10장 고넬료의 가정 - 이방인의 오순절 .................... 13
  6-2-3. 사도행전 19:1-7 에베소의 제자들 .................................. 13
  6-2-4. 사도행전 8장 사마리아의 오순절 ................................... 14
  6-2-5. 사도행전 9장 바울의 개종 ......................................... 14
 6-3. 성령 세례 받는 조건들 ............................................... 14

7. 오순절 신학비판 ........................................................ 16
 7-1. 오순절은 단회적 구원사적 사건. 행 2:1-4 ............................. 16
 7-2. 방언의 구원사적 관점 ................................................ 19
 7-3. 성령세례에 방언이 필수적이도 규범적이지도 않다. ..................... 21
  7-3-1 ................................................................... 21
  7-3-2 ................................................................... 21
  7-3-3 ................................................................... 21
  7-3-4. 사도행전 8장 26-40절 ............................................. 21
  7-3-5. 사도행전 9장 1-19절 .............................................. 21
  7-3-6. 사도행전 11장 19-26절 ............................................ 22
 7-4. 사마리아 개종과 두 수사도의 역할 .................................... 22
 7-5. 베드로와 로마인의 개종 .............................................. 23
 7-6. 에베소의 12 제자 .................................................... 24

8. 예수 믿음 = 성령 받음 .................................................. 25

9. 성령 충만의 문제 ....................................................... 27
 9-1. 육과 영과 대비 ...................................................... 27
 9-2. 성령의 인도받음 = 성령 충만 ......................................... 28

10. 오순절파의 성령 세례의 조건 시비 ...................................... 30
 10-1 ..................................................................... 30
 10-2 ..................................................................... 31
 10-3 ..................................................................... 32
 10-4 ..................................................................... 33
 10-5 ..................................................................... 34

11.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 34
 11-1. 예수 : 성령으로 시작한 사람 ........................................ 35
 11-2. 예수 : 최초의 성령 세례 받은 자 - 구원 시대 곧 하나님 나라의 시작 .. 36
 11-3. 예수 = 성령의 담지자(the Spirit-bearer) ............................ 38
 11-4. 예수 = 살리는 영, 성령의 파송자 .................................... 39
 11-5. 성령 = 예수의 영 : 예수의 위격 = 성령 오심의 통로 .................. 41
 11-6. 그리스도 사역의 승계 : 보혜사로 역사 ............................... 43
 11-7. 성령 사역의 목표 = 그리스도의 榮化 ................................. 45
 11-8. 예수 = 부활의 첫 열매 : 성령 = 그 보증금 ........................... 46
 11-9. 영 = 종말 세계의 생(生)의 원리(原理) ............................... 49

12. 성령의 위격 문제 ...................................................... 49
 12-1. 발트의 성령론 논의 ................................................. 50
 12-2. H. 베르크호프의 성령론 논의 ........................................ 54

 

 


1. 서론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가장 큰 세력으로 확산되고 있는 기독교의 운동은 아마도 오순절 운동 혹은 은사 운동과 해방신학의 민중 해방 운동이라고 할 것이다. 이 두 운동이 다 교회 안과 밖으로 부터 큰 주목과 관심을 받으며 확산되고 있다. 민중 해방 운동의 현장이 남아메리카와 제 3셰계의 압제받는 백성들 중에서 진행되고 있으나, 막상 이런 절박한 상황에 처하지 않고 있는 지역의 신학자들도 크게 관심을 갖고 활발하게 문제점들을 논의하고 해방신학이 제기한 사회구조의 개조, 그리고 국제적인 자본의 활동 관계와 그 구조를 개선할 수 있기 바란다. 따라서 정치와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연 이 운동에 관심을 갖고 사회학의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부조리한 사회구조의 개선을 위해 많은 관심을 나타낸다. 이 민중 해방운동은 교회에서 시발하였으나 넓은 사회 계층에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이에 비해 오순절 운동은 교회에서 특히 개신교회에서 출발하여 자기들 교파를 조직한 후 기존 교파들에서도 이 성령 체험 운동에 가세하게 되었고, 이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감에 따라 카톨릭 교도들도 이 은사운동에 동참하고, 심지어 유대인들과 불신자들까지도 이 운동에 동참하리 만큼 전 세계적인 운동으로 급성장하였다. 기존 개신교회들이 이 운동에 가담하므로 오순절 운동은 신 오순절 운동으로 혹은 은사운동이란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고 그 확산규모와 속도는 더욱 커지게 외었다. 오순절 운동이 전 세계적이 된 데는 순복음파인 하나님의 성회가 개신교회의 연합기관인 WCC에 가입하고서 부터 더욱 전세계 교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급히 확장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 가입에는 남아연방 출신의 David Du Plessis박사의 활동과 소개가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운동도 교회 안팎으로부터 큰 관심과 주의를 받고 있으나 이 운동은 민중 해방 운동과는 달리 그리스도 교회의 일로 남아 있다.
오늘 이 강의는 오순절 운동의 신학을 성경적 가르침에 의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 오순절 운동이 공교회로 하여금 성령에 대해 새롭게 반성해 보게 하였지만 오순절파의 성령신학이 신약의 가르침에 합하는지 여부를 살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슐라이어 막허 이후에 살고 있지만 경험이 표준이 아니고 성경이 표준이므로, 성령체험 주장을 성경이라는 외적 권위에 우선시킬 수가 없다. 외적 권위에 체험 혹은 경험을 우선하면 그것은 종교적 경험이 표준이 되므로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라고 할 것이다.
슐라이어막허는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체험을 출발점으로 삼고, 그것을 표준으로 하여 전통적 기독교의 교리들을 전부 재구성하였다. 미국의 사회학자인 Peter L. Berger의 말대로 슐라이어 막허는 종교적 경험에서 출발한 귀납법적 방법을 채택하였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다. 기독교에로 개종하면 누구든지 누리는 동일한 체험 내지 비슷한 체험들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관적 체험이 진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객관적 권위 혹은 증거 곧 성경이 진리를 결정하고 또 진리의 표준으로 서 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가 그 한 책에만 서 있고, 사람들의 체험과 무관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해와 체험에로 번역된다. 그러나 언제나 결정은 성경이 하고 사람들의 체험이 좌우하지 않는다. 아무리 호소력 강하고 광범위한 증거들을 내는 경험이라 할찌라도 그 경험의 타당성 여부는 성경이 결정한다. 자유주의와 정통주의의 차이가 여기에 성립한다. 자유주의는 종교적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고 또 표준으로 삼아 그 경험에 맞게 성경의 진리들을 해석한다. 정통주의도 체험을 인정하나, 그 체험은 성경적 표준에 맞아야 하고 그 표준의 심판에 순종한다.
그런데 오순절 운동자들과 기성 교회에 남아 있으면서 이 운동에 가담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체험을 성경에 우선하고, 오순절 신학으로 자기들의 경험을 고집하고, 그 신학 혹은 경험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바로 문제점이 여기에 있다. 말씀을 규범적 권위로 해서 듣지 않으면 신비주의에 이르고, 경험 혹은 근대의식(近代意識, modern consciousness)과 일치해서 경험을 강조하면 자유주의가 된다. 은사 운동이 체험에 과도히 집착하고 말씀의 가르침에 겸손히 순종하려는 경향이 극히 약하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의 경우 은사를 받은 분들 중에 특히 방언의 은사를 받은 분들 중에는 그 은사 받은 사실만을 특별히 높이지 말씀에 비추어 자기의 방언의 바른 유래, 적법한 사용 등에 대해서 반성하고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 경향을 드러내는 경우들이 있다. 방언을 함이 성령 받은 표로 강조 받아온 우리의 상황에서는 이 요구에 충족시킬 수 있기 위해 방언을 배우고 연습하고 반복해서 까지 방언 은사를 소유할 수 있기 바란 상황에서는 가히 이해할 만 하다. 이 현상 곧 학습이나 연습, 모방을 통해서 까지도 방언을 해보려는 노력과 그런 가르침의 풍속들도 다 선지인 미국에서 부터 건너왔다.
그러나 20세기 오순절 운동이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 운동과 차이를 내는 결과를 내게 하였다.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 운동은 다 공교회로 하여금 그 운동들을 억압하고 핍박하는 결과를 내게하였으나, 20세기의 오순절 운동 혹은 은사 운동은 공교회로 하여금 성령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고 성경 특히 신약이 증거하는 성령에 대해 새로운 연구를 시발하게 한 점이 그 공헌이라고 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번진 오순절 운동은 신약의 성령 진술들을 깊이 연구하게 하여 20세기 후반 이후의 신학적 논의는 사도신경의 제 3조인 성령론이 될 것임이 확실해졌다. 2천년의 기독교의 신학적 논의가 거의 집중적으로 기독론을 중심해서 이루어졌고, 특히 칼 발트에 의해 신학적 논의가 주도된 양 세계 대전의 중간 기간내에 이루어진 그리스도 일원론적 논의와 불트만의 케뤼그마 신학도 다 기독론적 집중이었는데, 이들 후에 나타난 신학적 그림은 성령론으로 완연히 옮아 왔다.
2차 대전 부터 시작된 불트만의 신약의 비신화화(非神話化)와 실존주의적(實存主義的) 해석의 시도는 기독론의 논의를 완전히 현상세계에 국한하게 만들었고, 그의 제자들 중 후기 불트만 학파의 좌파에 속한 헤르벌트 브라운(Herbert Braun)에 의한 신학의 비신화화는 신학과 기독론을 언어의 사건으로 보는 새 해석학의 마지막 귀결에 도착하게 되었다. 기독론을 완전히 비신화화한 불트만은 그래도 신론에 와서는 비신화화를 멈추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비신화화를 그 마지막 귀결에 까지 끌고 가므로 신과 그리스도를 세계내의 사건으로 특히 언어의 사건으로 결말하였다. 이렇게 비신화화의 마지막 귀결에 이르게 되면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더이상 신학적 논의와 신앙의 대상으로 남아 있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사태가 진행되자 기독론적 집착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게 그 지반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런 신학적 상황에서는 사도신경의 제 3조에로 신학적 논의를 이월하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을 것이다. 칼 발트의 과도한 기독론적 집중에 대한 반발로 화란의 판 룰러(A. A. Van Ruler)는 사도신경의 제 1조인 성부에게로 이월하여 성부 중심적인 신학적 논의와 또 이에서 귀결된 신국 사상을 강조하였으나 추종자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반동으로만 남았다고 하겠다. 시대적 상황이 20세기 후반으로 하여금 신학적 논의가 성령론 중심적이게 만들고 있다.
성령론의 빈번한 논의에 대해 20세기가 아직도 19세기와 가까이 있어서 즉 Hegel과 너무 가까이 있어서 성령의 논의는 인간의 영과 구분되기 어려운 난점을 갖는다고 지적했던 칼 발트까지도 슐라이어 막허 선집 출판 서문에서 자기가 성령론을 논할 수 있었기를 바랐고 학적으로 체계적인 연구를 한 독일 파델본의 카톨릭 교의학자 헤리벨트 뮬렌(Herbert M hlen)을 부러워하였다. 성령론의 연구가 길어져도 개신교회에는 성령론에 관해 새로운 교리적 결정을 할 공회의의 소집의 가망성이 없고, 기실 WCC의 신학위원회가 신학적 진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실 오순절 운동이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게 된 계기는 아마도 하나님의 성회 혹은 오순절파의 WCC 가입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WCC의 신학적 진술은 전 개신교회에 구속력을 행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공교회 중에 구속력을 행사할 교리적 결정을  할 수 있는 교회는 추기경들과 주교들로 공회의를 소집하는 로마교회이다. 그들의 성령론에 대한 결정은 교리적 성격을 띠고 개신교회에도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분명히 현금 진행되는 성령론의 논의가 결실을 맺고 어느 정도 정착하면 로마교회는 공회의를 소집하여 교리적 결정을 할 수 있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1962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소집된 제 2 바티칸 공회의가 예배 모범을 수정하고 평신도의 성경 접근을 허용하여 개신교회와의 재 통일의 길을 마련하고, 신학을 새롭게 한 것을 볼 때, 또 한번의 공회의의 소집 가능성을 내다 볼 수 있다.
그러나 현금 진행되고 있는 성령론 연구가 많은 진리의 국면들을 현시하고 밝게 하여도, 고대 공교회의 결정과 일치하지 않으며 특별히 신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게 나아가고 있는데 큰 문제점이 있다. 현대 20세기의 성령론 연구는 성령의 위격 혹은 인격성에 대해 거의 부정적인데 있다. 성령의 위격을 인정하지 않는 방향에로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보수주의 교회는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함으로 이에 대처하였지만, 학적 체계로 이 신앙을 정립하고 표현하지 못한데 약점이 있다. 이제 성령론에 대한 연구를 성경의 가르침과 교리사적 지침을 따라 바르게 세우므로, 그릇된 결정의 가능성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강의는 오순절 신학의 문제점과 현대 성령론 연구가 가져온 유익한 발전을 고찰하면서 우리의 전통적 입장을 다시 확인해 보는 계기를 삼고자 한다.


2. 오순절 운동의 시작과 그 역사적 배경

오순절 운동은 20세기의 교회운동으로 20세기 초엽에 발생하였다. 1901년 오순절 운동과 유사한 운동이 미국 중서부에서 일어났으나 정식 시작은 1906년 4월 9일 캘리포니아의 로스안젤레스(Los Angeles)의 한 집회에서 발생하였다. 그 집회는 성결파의 윌리암 씨모어(William Seymour)가 인도하여 오순절파의 교리들을 설교하였는데, 1906년 4월 9일 오순절 부흥이 일어나 사람들이 크게 증가하므로 감리교회당을 사서 집회를 모이니 그 불이 하도 강렬하여 짧은 시간내에 전세계에 파급되었고, 그 큰 물은 미국 전체에 확산되어 갔다. 오순절을 체험한 그들은 사도행전 2장 4절에 나타난대로 성령 세례를 받고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로스 안젤레스의 아주사가(ajusa street) 집회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오순절 운동은 번져갔다.
로스안젤레스에서 오순절 운동이 시발되자 당시 뉴욕시에서 모금 운동을 하고 있던 노르웨이 감리교 목사인 T. B. 바랏(T. B. Barratt)는 이 소식을 듣고 로스안젤레스에 있는 이 운동의 지도자들에게 편지하여 그들의 조언을 듣고 성령세례를 받고 노르웨이로 돌아가 자기 나라에 오순절 운동을 세운 후 영국과 독일과 스웨덴에도 오순절 교회를 세워 구라파 오순절 운동의 아버지가 되었다(Fredrick D. Bruner, A Theology of Holy Spirit, 49). 로스안젤레스로 사람들이 오거나 거기서 나간 사람들에 의해 오순절 운동은 신속히 번져 나갔고 그리하여 공교회의 큰 세력이 되었다.


2-1. 역사적 배경

오순절 운동이 순전히 20세기에 발생한 일이어도 그 발생 배경은 20세기의 시대 상황에서만 유래한 것이 아니다. 오순절 운동은 19세기에서 20세기에로의 전이과정에서 나타난 사회적 변동의 긴 파장과 신속히 진행된 세속화, 그리고 기성 교회의 영적 능력 상실 그리고 타락 등이 백성들로 하여금 새로운 영적 충족을 바라게 하였도 또 미국 교회의 전통이 되어온 부흥운동(revivalism)의 체험 욕구가 크게 작용하였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순절 운동의 직접적 조상은 성결 운동이라고 할 것이다. 처음 믿을 때 받은 은혜 후에 제 2의 은혜의 역사를 받으면 완전해진다는 완전주의 신학이 오순절 운동의 성령 세례주장과 바로 연결된다. 혹은 제 2의 완전케 하는 은혜의 체험 주장이 결실한 것이 오순절 운동이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순절 운동의 조산은 요한 웨슬레와 감리교회의 신학이라고 할 것이다. 웨슬레의 가르침에 의하면 칭의 후 은혜의 제 2의 성화의 완성에 이름을 가르치고 강조하였는데, 이 일은 회심 후 성령 세례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쳤다.
은혜의 완전케 하는 역사를 처음 받은 은혜 후에 덧입으면 완전해진다는 주장은 19세기 미국 교회에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그것은 지금 한국에도 그대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잦은 부흥회를 통해서 였다. 미국의 부흥회 운동은 체험을 강조하였고 부흥회시 특별 은혜를 입으므로 성화의 완성 단계 혹은 더 높은 단계로 향상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부흥회시 받은 은혜의 특별 체험은 신앙의 성장을 촉진하고 굶주린 심령의 욕구를 다 충족해 주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의 방법은 반드시 체험이다.
이 부흥회의 체험의 방법론을 신학적으로 완전히 정착시킨 사람은 챨스 피니(Chales Finney)라고 할 것이다. 그의 체험의 강조는 성령 세례 받는 것에로 나아갔다. 칭의의 초보적 은혜에서 성공적 목회 혹은 능력의 증거를 위해서  성령 세례가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가 부흥회 체험을 미국 교회에 정착시키므로 감리교회에서 성결 운동이 필연적이게 하였다.
피니는 체험적 은혜를 강조하므로 법정적인 관계인 칭의를 경시 내지 배척하고 실제적 성화를 하나님 앞에 서는 궁극적 근거 곧 의로 보았다. 즉 성화가 완전히 이루어짐이 의를 얻는 길이라고 피니는 가르쳤다. 이것은 분명히 종교개혁의 칭의 교리가 아니고 로마교회의 구원 서정 방식을 채택한 것이 되었다. 그의 감리교회 신학과 부흥회 방법론 곧 부흥회시의 은혜의 체험에로 성화의 완전단계에 이르게 함은 미국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고 마침내 오순절 운동으로 결실하게 하였다. 부흥회를 미국 교회의 생활 방식으로 정착시키고 제도화한 챨스 피니에 의해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이 필연적 귀결로 나타났다. 이 성결파는 감리교회의 웨슬레의 완전주의 교리 곧 완전 사랑을 강조하고 거기에 고착하였다. 제 2의 체험을 통해서 성경적 성결 곧 성화에로 개종을 강조하였다. 이 일은 성령 세례 받음 혹은 처음 은혜 다음에 오는 제 2의 완전케 하는 은혜를 받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바로 이 처음 초보적 은혜 다음에 오는 완전케 하는 은혜의 체험 강조가 오순절 운동의 성령 세례 주장으로 나타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무디 성경학교 교장이었떤 토레이(R. A. Torrey)도 성령의 2차적 역사 강조로 오순절 운동을 예비하였다고 할 것이다. 지금도 토레이는 오순절 운동에 의해서 매우 번번히 인용되며, 성령 세례와 연관하여 특별한 의의를 지닌다.
오순절 운동의 직접적 조상이라고 할 웨슬레와 부흥운동과 피니와 성결운동은 다 그 시대마다 기성교회의 영적 능력 상실과 신학의 좌경화, 사회적 불안, 세속화에 대한 반동으로 많은 사람들의 영적 욕구의 충족으로서 나타났다고 할 것이다.


2-2. 교회사의 경우들

오순절 운동의 직접적 계보는 이렇게 웨슬레에서 성결운동까지로 본다 하더라도 교회사적으로 볼 때 교회의 영적 운동이 이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초대 교회부터 중세와 종교개혁시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영적 운동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런 운동들이 자기들의 교회는 조직하였고 그 영향력이 당시는 컸어도 분파(sect)로서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공교회에 가장 큰 충격을 주고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공교회로하여금 성령 운동을 억압하게 한 최초의 성령 운동도 2세기 중엽에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몬타누스 운동이라고 할 것이다. 이운동도 교회가 처음의 영적 능력을 상실하고 권징의 능력을 상실하여 타락함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다. 이 운동의 창시자인 몬타누스는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보혜사의 시대가 도래하였는데, 그 약속하신 보혜사가 자기 안에 와 계신다고 하여 자신을 보혜사 성령과 일치시켰으며,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하여 금욕 생활을 그들의 생활로 삼았다. 이 운동의 열기는 매우 강하여 강하게 퍼져나갔고,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다. 그들의 금욕 생활과 열열한 영적 생활은 당시의 대신학자인 터툴리안(Tetullian, Tetullianus)까지도 그들의 운동에 가담케 하였다. 이 몬타누스 운동은 공교회로 하여금 성령운동을 위험시하게 하여 금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몬타누스 운동보다 앞선 성령운동을 들라면 고린도 교회의 방언파 혹은 열성파들이라고 할 것이다. 이 고린도 교회 방언파 운동에 연이어 믿음으로 현세에서 죄가 완전히 제거되고 완전해진다는 영지주의가 여러 형태로 초대교회에 만연했고, 초대교회의 최대의 적대 세력이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와 맞먹는 세력으로서 기독교를 근본에서 위협하였다. 그후 중세에서도 신령파 운동은 소수 분파들(sects)에서 계속되었고, 종교개혁 당시에는 과격파인 재세례파 운동은 교회와 국가의 연합을 배척하면서 동시에 교회의 제도들을 배척하고 나아가서 성경 말씀도 외적 권위로서 배척하였다. 종교개혁시의 광신파들(Schw rmer)은 성경말씀은 외적 제재 세력이라고 하여 성경말씀 대신에 성령의 내적 조명과 내적 말씀을 주장하였고, 종교개혁 후에는 전통파인 퀘이커파(Quakers)가 나타나 설교 없이 성령의 내적 조명에 의한 새 광면 곧 새 마음을 말하였고, 그후 경건주의, 웨슬레파와 17세기 18세기부터 독일, 영국, 미국에서 시작한 부흥운동도 제 2의 완전케 하는 은혜의 체험을 강조하였고, 또 챨스 피니에 의해 미국에 정착하게 된 19세기까지의 부흥 운동도 성결 운동으로 결과하면서 성령 세례를 강조하게 되었다. 이 계통이 오순절 운동의 계보임을 이미 고찰하였다.
그러면 이렇게 교회사에 끊임없이 발생한 신령운동들에 대해 공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해 왔는지 살펴보는 것이 가할 것이다.


3. 신령운동과 공교회의 태도

분파들에서 일어난 신령운동들은 그 시작부터 공교회에로부터의 배척과 핍박을 유발하였다. 몬타누스 운동은 초대 교회로 하여금 성령 운동을 매우 위험시하여 금지하였다. 이 결과로 성령의 소위 독자적 사역을 인정하지 않고 성령의 역삭를 교회에다 결합시켰다. 성령의 독자적 역사를 부인하고 교회의 성례에 성령을 결합시켰다. 그 후부터는 성령의 독자적 역사는 없고 교회가 베푸는 성례에 종속적으로 역사하는 것으로 보았다. 몬타누스의 보혜사 참칭 이후 교회는 성령의 독자적 사역을 교회 존립에 위태한 것으로 보게 하였다. 따라서 그 후에 일어난 신령운동은 교회의 탄압과 박해를 받게 되었다.
또 종교개혁 당시 강신파인 재세례파들이성령 운동을 강하게 주창하고 성령의 내적 조명과 직접적 말씀을 성경에 우선하고, 외적 권위와 규범으로서 성경을 전적으로 무시하였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도 신령운동의 위험성을 보고, 성령의 독자적 사역보다 성령의 역사를 말씀에다 매었다. 루터는 광신파들의 과격성의 위험을 알고 성령의 역사를 말씀에다 매었다. 그리하여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Per Verbum)역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성령이 말씀과 관련하여 역사함을 찬동하고 주장하였지만, 성령의 주권적 역사를 인정하고, 또 목회상의 경험에 입각하여 Per Verbum의 문제점을 인식하였다. 성령의 역사가 말씀에 매이면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결과가 나타나야 할 터이고 말씀을 듣는자들마다 다 은혜를 입어야 할 터인데 그러지 못하는 목회 현실을 고려하여, 성령의역사가 말씀에 종속해서가 아니고 말씀과 함께(Cum Verbo) 이루어짐을 주장하였다. 이 원칙은 개혁교회에 변동되지 못하였다.


4. 公敎會의 성령 망각

성령운동이 가져온 이런 위험성들 때문에 공교회는 성령의 독자적 사역을 인정하지 않고 세례와 말씀에 결합하므로 자연히 성령운동 혹은 신령운동은 배척되고 억압되므로 자연히 교회는 성령의 역사를 망각하고 성령은 분파와 이단들의 일로 치부해 버렸다. 이렇게 성령을 망각하게 되자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는 교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런 맥락에서 베를린 신학교 교의학 교수이었던 옷토 딜슈나이더(Otto Dilschneider)는 성령 망각이라고 이름하였다. 최소한 공교회 내에서는 그러했다.
이 성령 망각이 교회의 신학 논의에 그대로 표현 되었다. 교의학은 통상 첫 장(Locus)인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의 논의(De theologia natural, et revelara)에서 28 Locus인 영화(De Pcorificatione)로 끝맺는데, 이중에 성령을 독자적으로 취급한 Locus가 없다. 통상 구원론을 성령론이라고 해왔다. 막상 구원론의 전개도 성령의 사역과는 별 무관하게 전개 되어졌다. 구원론의 시작에서 성령의 일반적 사역으로 일반은총을 언급하고, 중생에서 성령을 중생의 주체자로 말하고, 또 성화에서 성령의 역사와 협동을 말하는 정도이었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가 기독론의 역사라고 할만큼 기독론 중심적이었다. 성령은 논의에서 제외하고 망각하였다.
딜슈나이더는 이 성령 망각의 기원을 교회사보다 더 소급한다. 그가 행한 암스텔담 자유대학 강의에 의하면 복음서 89장중 성령을 말한 곳은 11장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복음서부터 성령 망각에 이르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딜슈나이더에 의하면 사도신경에 있는 상황은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제 2조 기독론의 전개와 전제, 그리고 그 기초는 3조 성령 조항이 이룬다고 한다. 2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여기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가 2조 그리스도 조항의 기초를 이룬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이런 성령 망각 태도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오순절 운동은 공교회로 하여금 성령에 대해서 관심을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신구교를 막론하고 성령론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게 되었고, 그중 독일 파테보른의 로마교회 교의학자인 헤리벨트 뮬렌(Heribrt M hlen)이 가장 체계적인 연구를 하게 되었다.
이제 오순절의 신학에로 넘어가기 전에 오순절 운동이 갖는 신학적 특징에 관해 한마디 언급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본다.


5. 분파 운동의 신학적 특색

분파(sect)에 관해서 깊이 연구한 쿨트 훗텐(Kurt Hutten) 교수는 그의 책 [이단자들의 신앙 세계](Die Flaubenswelt des sektierevs' : Das Sektentum als Antireformatiorische Kurfession, sein Anspmch und seine Traf die, 1957)에서 분파들 특히 종교개혁의 전통에서 나온 분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인간의 쟁취에로 즉 결정의 자리를,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로 옮긴다고 지적한다. 이 일에 있어서 오순절 운동의 조상인 완전주의와 오순절 운동의 동일함을 지적하기 위해 분파들의 첫머리에 그들의 주장을 배정하였다(동일책 화란어판. p.35). 훗텐에 의하면 종교개혁의 선포와 각 분파(sect)의 가르침 간을 특징지우는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신적 차원에서 인간적 차원에로의 강조점의 전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의 행동에서 인간적 행동에로 전이이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인간의 공적과 기선(機先 initiative)과 능력에로 전이이다(인용서 p.37).
종교개혁에서는 이 전이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죄과의 제거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부름이 인간에게서 대답을 일으키나, 이들 분파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의 답이 독자적으로 성격을 갖고 구원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은혜를 쥐어잡는다. 이 영웅적인 행위가 존경과 경탄을 유발한다(인용서 p.39). 따라서 성황 노력은 신자의 공적이 되어 칭의보다 더 높은 단계에 서고 따라서 칭의 여부가 성화의 정도에 달렸다. 은혜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행동에 은혜가 의존되게 한다(인용서 p.39f).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선행(先行)하는 노력 여하에 의해 결정된다. 즉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태도에 의해 은혜가 결정된다. 즉 성령세례를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키므로 자기에게로 가져온다. 즉 간구, 열정적 믿음, 간절한 기다림, 철저한 회개, 무조건적 순종과 끝까지 기다림으로 성령 세례를 받게 되는 것으로 본다(인용서 p.40).
또 구원의 정도도 인간의 종교적 윤리적 성취로 확대한다. 완전주의자들은 보통 그리스도인들과 죄를 극복한 사람들로 구분하고, 오순절파는 여기에 성령 세례 받은 사람 부류를 추가한다. 다 사람의 노력 여하가 결정한다. 은혜은 주권적으로 선행해서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추후적으로 응답되어 온다.
인간이 이런 공적을 이룰 수 있다면 은혜 아니면 안된다는 전적 타락과 무능의 상태가 아니라, 로마교회에서처럼 사실적인 죄들만을 피하면 되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술과 담배, 유행, 춤과 자기 주장과 세상적 쾌락을 피하면 되는 도덕주의적 구원의 길이 된다. 결국 인간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고 하나님은 협력자일 뿐이다. 은혜의 주권적 역사는 완전히 제거된다. 오순절 운동의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다 인간의 종교적 노력과 수고가 결정하고, 구원의 은혜가 가져온 선물이 아니다. 열정주의(The way of enthusiasm)의 길이 이 운동에 깊이 들어와 있고, 그 주변 교회에로 전염되고 있다. 성령은 거룩하신 주로서 주권적 하나님이시기 보다 인간의 열정이 좌우할 수 있는 분이다. 인간이 성령을 어거할 힘을 갖는다. 이것은 결국 성령을 하나님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현금 진행되고 있는 오순절 운동이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인가? 이 문제는 다음에 또 다룰 것이다.
이제 우리의 논의의 주제인 오순절 신학에로 돌아가서 오순절 신학의 요점을 살펴 보고자 한다.


6. 성령세례 - 오순절파의 신학

방언이 동반된 오순절파는 사도행전 2장 4절 성령이 처음 제자들에게 임하여 다른 방언으로 말함을 제일 중시하고 이 사건에만 모든 주의를 집중한다. 오순절날 처음 제자들의 성령 체험을 가장 중하게 여긴다. 그리고 이 성령 체험은 방언 말함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오순절 운동이 주장하는 성령 체험은 절대적 순종과 신앙의 조건을 성취함으로 이루어졌다(F. D. Bruner, A Theology of the Holy Spirit, p.57).
여기의 강조점은 성령 충만이 개종후의 일이고, 이 체험은 예수 믿음으로 오는 것이아니라 완전한 순종과 영웅적인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은 성령 교리가 아니라 성령 체험이 제일 중요하다고 여기며, 바로 이 성령 체험 강조가 자기들로 오순절 운동이라고 불리울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이 성령 체험은 다름 아닌 성령 세례의 체험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체험은 방언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에, 바울에게서 처럼 성령의 인도 아래 삶, 혹은 영으로 행함의 성령론이 아니고, 또 요한이 기술한 보혜사 성령의 사역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방언으로 나타나는 성령 세례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성령 세례 받았는지 여부는 그가 방언을 말하느냐 아니냐에 달렸다. 처음 믿을 때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다 은혜를 입고 성령을 받지만 충만하게 받는 것은 그 다음 일이고 이 충만히 받음에 방언 말함이 동반한다고 주장한다. 이 충만하게 성령 받음이 성령 세례이다.
그런데 여기 성령 세례는 성령의 세례, 성령이 주시는 세례(baptism of the Holy Spirit)이다. 이때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안에로 사람들을 세례 준다는 것이다. 이 세례에 방언 말함이 동반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처음 예수 믿음의 체험과는 구분되는 특수하고 강력한 체험이다. 그러니 이 체험을 열열히 구해야 된다고 한다. 이 체험을 오순절 운동은 주장하고 가르치며, 이 체험을 입음이 오순절파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 체험은 따라서 조건을 충족하므로 획득하도록 열심히 추구해야 할 일이다.


6-1. 이 교리의 원천

그러면 오순절파의 이 제 2의 성령 체험 교리는 그 근거를 어디서 발견하는가? 오순절파는 그들의 교과서로 사도행전과 고린도서를 드는데 그중 사도행전을 그들 교리의 원천으로 삼는다.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체험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이미 다 그리스도인들이었는데, 성령 강림시 아버지의 약속대로 성령 세례 혹은 성령 충만을 입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지금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하게 이 체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이 제 2의 성령 체험이 있어야 복음의 증거를 바르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웨슬레에게서 시작한 그리스도인의 더 높은 체험, 부흥 운동의 체험주의 신학, 또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성결 운동을 오순절파는 역사적 경험적 근거로 제시한다.
오순절파는 처음 오순절 성령 강림이 구원사적 관점에서 이루어졌으며, 처음 예루살렘 오순절 사건 이후 사도행전에 전개된 사건들도 구원사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임에 대해는 아무런 눈이 없다. 이 오순절 운동도 근본주의적 배경에서 발생하였으므로 성경 이해에 있어서 동일한 특색을 나타낸다. 그 두드러진 예가 오순절파도 종말론에 있어서 천년기론이고 급박한 재림 사상을 열열히 주장하는데서 잘 드러났다. 오순절뿐 아니라 거의 모든 분파들(sect)이 종말론에 있어서 천년기론이고 급박한 재림을 강조한다.
처음 믿을 때 받는 은혜와는 구분되는 완전한 은혜의 체험 곧 성령 세례를 지지한다고 하는 성경 본문을 오순절파는 사도행전에서 몇 곳 제시한다.


6-2. 성령 세례의 근거 본문들 고찰

6-2-1. 행 2:1-4 오순절

이 오순절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여 그들을 채우고 방언으로 말하도록 하셨다. 이것이 약속대로 처음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 세례이다. 오순절파에 의하면 제자들은 이 성령 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은혜 입어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런데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 성령에 충만하게 되고 성령의 나눠주신 대로 방언을 말하였다.
처음 제자들이 두번째 은혜를 입어 능력을 얻고 방언을 말하였으면 후의 모든 교회도 이것을 받아야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한다. 따라서 오순절 사건은 일회적으로 볼 것이 아니고 반복적이고 규범적이라고 한다.
오순절파의 강조에 의하면 오순절의 성령 세례는 예수 믿는 중생 다음에 생겼고, 또 방언으로 그 표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6-2-2. 행 10장 고넬료의 가정 - 이방인의 오순절

고넬료의 가정에 임한 이방인의 오순절도 성령 강림 전에 이미 중생한 상태였고 또 성령 강림으로 방언이 나타났으니 방언이 오순절에만 독특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러니 방언 말함이 규범적인 오순절의 경험이라는 주장이다.


6-2-3. 행 19:1-7 에베소의 제자들

여기서도 중생후 성령 강림과 성령 강림으로 방언을 말하였으니 성령 세례는 중생후 받으며 성령 세례 받음으로 방언을 함이 합당하다는 주장이다.


6-2-4. 행 8장 사마리아의 오순절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의 전도를 듣고 예수 믿은 후에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세례를 받았는데 방언을 말했다는 기록이 없으나, 시몬이 성령의 선물들을 보고 돈을 드려 사려 했으니 방언을 말했을 것으로 가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6-2-5. 행 9장 바울의 개종

바울도 이미 다메섹 도상에서개종한 후에성령 세례 받았으니 성령 세례는 중생 후의 일이고, 방언 말함의 기록이 없으나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보다 방언을 더 많이 한다고 했으니 방언을 성령 세례시 받았다고 가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순절파가 이렇게 방언을 동반한 오순절 성령 세례를 강조하는 것은, 만일 방언 말함의 특성이 무시되면 자기들의 유일한 존재와 하나의 운동으로서 자기들의 목회가 위험해진다고 본다(F. D. Bruner, A theology of the Holy Spirit, p.86). 오순절파의 신학자인 도날드 기-는 선언하기를, 이 방언 세례를 약화하는 곳은 어디서나 점점 더 적은 수의 신자들이 성령 세례를 받게 되었고, 또 오순절의 증거가 이 운동을 일으키고, 생존을 지켜주는 불을 상실하게 되는 경향을 갖는다고 하였다(D.Gee, Pentecost, p.17). 바로 이 방언을 말함을 동반하는 성령 세례가 오순절파가 보편 교회에 공헌할 수 있는 보화라고 믿는다(Bruner, 인용서 p.87).
또 오순절파의 주장에 의하면 처음 성령으로 중생하고 그 다음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은 메시야인 그리스도의 경우에서 그 증거가 더욱 확실히 세워졌다고 주장한다. 그가 먼저 성령으로 잉태되면서 중생하고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세례 받아 성령으로 충만하였으니 그의 신자들도 이의 두 과정을 통과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오순절파의 주장에 의하면 성령 세례를 받는데는 충족해야 할 조건이 있다고 한다.

6-3. 성령 세례 받는 조건들

오순절파의 조건 주장에는 의견이 여러 가지로 나뉜다. 본 필자의 견해로는 4,5가지가 되는데 그 첫째가 간절한 기도이고, 둘째가 철저한 회개, 셋째가 완전한 순종, 넷째가 끝까지 기다림 혹은 기다리는 집회 참석, 그리고 다섯째가 강렬한 신앙인데, 여기 신앙은 예수 믿는 예수를 대상으로 하는 구원 얻기 위한 신앙이 아니고 성령을 대상으로 한 열정적 신앙을 뜻한다.
퍼얼만은 표현하기를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에게로 향한 신앙이 있듯이 능력과 헌신을 위한 성령에게로 향한 신앙이 있다고 한다(Myer Pealman, Knowing the Doctrines of the Bible, 1937, p.316). 왜냐하면 첫 믿음은 그 방향 설정이 분명하지 못하고 전인격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리그스(Riggs)는 기술하기를 성령은 그 충만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는 주어지지 못하는 것은 성령은 믿음으로 청구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Ralph M. Riggs, The Spirit Himself, p.112). 그러므로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고 하면서도 성령을 충만히 받기 위해 전적으로 내어 맡기고 또 울부짖고 신음하고, 먼지에 구르므로 그 목표를 성취한다고 주장한다(Donard Gee, God's great gift, p.57). 그리스도에게로 향한 믿음은 전적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나, 성령에로 향하는 믿음은 전체성으로 접근해야만 한다고 한다. 이 신앙에 있어서만 성령의 세례가 주어진다고 한다(cf. F. D. Bruner, A theology of the Holy Spirit, p.106). 기도를 간절히 해서 성령을 구해야 하고, 또 죄있는 심장에는 성령께서 오실 수 없으니 죄를 완전히 제거하고, 죄와 분리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되, 몸과 마음, 몸의 각 신체 부분까지 완전히 바쳐,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함에 방해됨이 없어야 하며, 또 자기의 의지를 포기하여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도록 내어 맡겨야 하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기 혀를 쓰시도록 내어 맡겨야 하고, 전 의식과 기분과 감정을 다 내어 맡겨야 하며, 그리고 성령 받기 위해 기도해 주는 설교자와 다른 돕는자들과 함께 성령 받기 위한 특별 집회에 참석하고,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성령 세례 받는 조건은 다 예수 믿음으로 성령 받음이 아니라, 인간적 공로가 성령을 받게 한다는데 있어 종교개혁의 믿음으로만(Sola Fide) 교리에 배치되고, 또 그들의 조건 중에 믿음을 말하나 그 믿음은 예수 믿는 믿음보다 더 강렬한 믿음을 뜻한다. 인간의 노력이 성령의 충만을 받는 길이면,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구원을 이룬다는(Sola Gratia)의 종교개혁 교리에 배치된다. 즉 율법주의가 새로운 형태로 교회에 침입해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에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논의하고자 한다.

 

7. 오순절 신학비판  

그러면 성령 세례가 처음 예수 믿음으로 성령 받음과 별개의 것이 있으며 방언 말함은 필수적이 아님을 구원사적으로 살피며 오순절파가 제시하는 사도행전의 본문들을 살펴 보고자 한다.


7-1. 오순절은 단회적 구원사적 사건. 행 2:1-4

주 그리스도의 승천후 10일, 부활후 50일에 일어난 성령 강림은 헤르만 바빙크(Hereman Bavinck)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하신 세번째 큰 사역으로서 창조사역과 성육신 다음의 큰 사역이요, 성육신 다음의 신비이다.
성령 강림 혹은 부어주심은 하나님께서 인류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오신 날이다. 범죄한 인류와의 화해가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므로 하나님께서 인류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 아들의 영 안에서 오신 날이다. 하나님은 처음 인류를 창조하시고 자기의 영으로 인류와 함께 하셨지만, 인류의 타락이 하나님의 사람과의 거주를 불가능하게 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영을 사람에게서 거두셨다. 칼빈은 이 진리를 표현하기를 "하나님의 영은 낙원에서 인류와 함께 하셨다"고 하였다(창 1:27 주석).
하나님의 처음 경륜이 인류와 함께 거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의 경륜을 실패케 하지 않으시고 이 경륜을 이루실 길을 내셨다. 이 관점에 있어서 바빙크는 좀 더 과격하여 성육신이 하나님의 피조물 내의 거주(居住)에로의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 존재가 성육신의 전제요 조건이고 그 준비라고 까지 말한다(Gereformeerde Dogmatiek, Ⅲ, 255, 258, 참조 Chul Won Suh, The Creation - Mediatorship of Jesus Christ, pp.193-194). 하나님은 아들로 세상의 죄과를 제거하시고 자신과 세상을 화목시키시므로 하나님의 피조물내의 거주의 길을 열으셨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인류에게 오실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공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시고 또 실제로 죄를 깨끗하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영이 인류에게 오실 수 있게 하셨고, 또 그의 구속으로 성령을 아버지로 부터 획득하셨다(행 2:33).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실 수 있게 된 근거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의 구속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실 수 있게 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사 그 죄값을 하나님께 지불하시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실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성령께서 인류에게 오시는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 당하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은 우리에게서 죄를 제거하고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성령의 오심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이고, 그리스도의 구속이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게 된 통로이다.
또 그리스도의 구속이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성령을 획득한 근거요 속전이다. 그리스도는 구속을 이루시고 성령을 아버지께 청구하셨고, 또 성령을 받아 인류에게 부어주셨다. 오순절날 베드로의 설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구속후 성령이 오시게 됨은 하나님께서 그 구속을 만족하셨다는 표이다. 이점에 있어서 사도행전 2장 33절과 히브리서 9장 24절을 연결해 보면,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이루신 후 성령을 부어주시기 위해 승천하셔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셔야 한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참 성소 곧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타나 구속을 위하여 드린 자기 몸을 아버지 앞에 나타내시므로 자기의 구속을 완성하셨음을 아버지께 고하고 그로써 아버지의 승인과 기뻐하심을 받았다. 성령을 부어주심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구속을 기뻐하사 그 제물을 열납하셨다는 표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구속을 아버지 앞에 나타내 보이시고 아버지로 부터 성령을 획득하여 우리에게 보내셨다.
바로 이 때문에 성령 강림이 부활의 날에 이루어지지 않고 승천후 10일에 이루어졌다. 구속이 완료된 부활절이 아니고 승천후에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앞에 자기 몸을 나타내 보이신 날에 이루어졌다.
오순절에 하나님은 인류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시 가지신 경륜의 실현이다. 영 안에서 인류에게 오심은 오직 죄의 제거 곧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인류에게 오심이 곧 인류의 구원이다. 따라서 성령의 오심이 교회를 이루었다. 이 교회가 성령의 거소이다. 성령의 오심의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목표는 하나님이 인류와 함께 하심이다. 내주가 성령 오심의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목표이다.
그러나 인류의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므로 인류에게 오신 성령은 구속 사역도 계속하신다. 이 사역에 복음 전파, 교회의 설립, 교회의 성장이 포함된다. 이 구속 사역이 완성되면 더 이상 성령의 내주가 구원 사역의 확장과 연관되지 않을 것이고 새 인류에의 내주가 완전해 질 것이다. 새 인류에의 하나님의 내주가 성령 오심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새 인류의 완전 출현시 하나님의 내주는 충만하고 완전해 질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오순절에 성령 강림은 구약에 약속하신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출 29:45)의 성취이고, 이 일은 종말에서 완성될 것이다(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하나님은 이것을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으므로 처음으로 유대 백성에게 성령의 내주를 허락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세계의 전 인류가 하나님의 것임을 보증하는 표로 지목하신 분깃이니, 이스라엘에게 오신 그리스도가 전 인류에게 오심이 되듯, 이스라엘에 임한 성령도 전 인류에게로 그 내주를 확장해 가셨다. 이것은 바로 오순절 강림후 얼마 안되어 사마리아와 이방인에게로 성령 강림이 확장된 것에서(행 8장 사마리아인의 개종과 구스인의 개종, 행 10장 로마인의 개종) 확증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전세계로 성령의 내주가 확장되어 가고 있으며, 종말에서는 이 일이 완성될 것이다.
이 내주의 측면에서 볼 때 성령 강림절의 외적 표징들은 그리 본질적이 아니다. 방언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오순절날 성령 강림은 인류에게 처음 있는 일이어서 그와 같은 외적 표징들을 동반하였다.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같은 것이 있었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있었고, 성령충만을 받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 나타난 외적 표징들 중에 방언은 그후 얼마간 반복되었어도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 불의 혀같이 갈라짐은 반복되지 안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짐의 현상은 그후에 반복되지 안했어도 성령의 사역의 중요 부분을 지시해 준다. 불의 혀같이 갈라짐은 성령께서 세상 구원 사역에 있어서 심판의 사역을 행하실 것임을 예시해 준 것이다. 성령이 능력으로 오셨지만 또 심판자로 오셨음을 말해 준다. 보혜사로 약속되신 성령이(요 14:25, 16:7) 심판주로 임하실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처음 성령 강림시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오심은 성령의 주권성을 나타내므로(요 3:8) 성령께서 사람들의 임의의 간청과 요구와 조종에 결코 좌우되지 않으시고 독자적으로 혹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실 것임을 밝히신 것이다. 오늘날 오순절 운동의 문제점 중 큰 문제점은 성령과 성령의 은사들은 임의로 통제할 수 있어서 성령은 사람의 노력으로 받을 수 있고 남에게 받게도 해줄 수 있고, 방언의 은사도 받을 수 있고, 남에게 받게도 해줄 수 있고, 또 성령의 여러 은사중 취사 선택해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노력하는데, 이것은 성령은 사람이 어거할 수 있는 능력이나 선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태도가 기본되어 있다. 이런 것은 성령의 하나님으로서의 주권성을 무시하고, 인간이 구원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을 통제하고 또 인간이 하나님과 협동할 수 있다는 죄악된 태도의 표출이다. 바울의 말대로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는 것이지(고전 12:7-11), 인간이 처방을 정하고, 성령께서 거기에 응하시도록 강제할 수 없다.
또 성령의 오심의 근본이 인류와의 거주라는 면에서 생각해 보면, 한번 오순절에 오신 성령은 그 거소를 변경하시고 하늘 본처(本處)로 가셨다가 또 오시고 하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순절에 인류에게 오신 성령은 개개인에게서 중생의 사역을 이루신 후 가셨다가 기도하면 또 오시는 형식으로 계신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인류에게 처음 오신 날 부터 떠나시지 않고 계시기 때문에 인류 중에 교회가 발생하였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다(딤전 3:15). 여기에 하나님께서 거소를 정하셨으니 성령께서 교회와 교회원들을 떠나 가셨다가 기도하면 오시는 것이 아니다. 한번 인류에게 오신 성령은 영구히 교회를 떠나시지 않으신다. 구약 시대에 사람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영의 내주는 임시적이고 일시적이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 오신 영은 영구히 교회와 그 구성원을 떠나시지 않으신다. 그리스도 자신의 증거가 이 진리를 확립하고 확증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은 교회와 함께 영원히 계시고 신자와 함께 영원히 계신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성령은 기도의 응답으로 온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오순절파의 성령 세례 받는 조건과 완전히 합치한다. 이 견해 뒤에 있는 사상은 성령은 처음 중생의 사역시 일하시고 본 처소로 가셨다가 오시라는 간구가 있으면 다시 오신다는 비성경적 견해이다.
인류와 함께 계시기 위해 오신 성령은 영구히 인류와 함께 계신다는 진리에서 보면 성령 세례 받을시 방언함이 필수적인 것이아님은 오순절 후에 나타난 성령 받음에서 잘 밝혀졌다. 內住가 성령 오심의 본 목적임은 종말에서도 성령이 인류와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충만한 거주가 이루어지는데서 분명하다(참조 Chul Won Suh, The Creation - Mediatorship of Jesus Christ, p.307f).


7-2. 방언의 구원사적 관점

오순절의 성령 강림시 방언 말하게 하심도 구원사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성령 강림시 방언 말하게 됨은 첫째로는 구약의 예언의 성취이다. 이사야서 28장 11절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는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방언을 허락하셨다. 이 예언이 성취된 배경에는 주전 8세기 말 부터 진행된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이 서 있다. 그때부터 중동과 지중해 연안으로 퍼져나간 유대인들이 본국어로는 말을 알아 들을 수 없게 되었고, 심지어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들도 히브리어 대신 아람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또 그후에는 희랍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외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시대가 도입되었음을 알리는 일은 동시에 여러 말로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유대에 사는 본토인들 뿐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에게, 이 큰 일을 알림은 그들의 사용하는 언어로 이야기해야 됐고 또 동시에 말할 필요가 있었다. 이 방식도 역사적 진행에서 결과한 상황에 맞게 방언으로 처음 복음을 전하셨다.
또 방언을 처음 제자들이 말함이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함으로 듣는 자들이 그대로 들었는지 아니면 제자들은 동일한 한 언어를 말하였는데 여러 방언으로 나타나 듣도록 됐느냐는 좀 논란될 수 있다.
사도행전 2장 4절 κα   ολ σ ησαν οㄵντεζ ονεㄷματξζ ㄳγㄸξυ κα   ρπαντξ λαλεㅒν  τ ραθζ γλㅇσσαθζ κα ㅗζ τㅜ ονεㅐμα  δㄸδξυ  οξφ  γγεσ αθ αㅂ-  τξㅒζ 
즉 λαλεㅒν  τ ραθζ γλㅇσσαθζ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다"를 보면 각각 다른 방언들로 말했다는 것이 분명하나 2장 6절에 보면 ㅠτθ  κξυξν ε ζ  καστξζ τㅿ ㅃδㄸР δθαλ κτι  λαλξㄷντ ν  αㅂτㅣν  "그들 각자가 그들의 말함을 자기의 방언으로 듣더라"를 보면, 말하는 자들은 한 동일한 언어로 말하여도 자기들의 말로 들은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8절과 11절도 같은 문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번째로 오순절 성령 강림에 방언으로 말하게 하심은 방언 말함이 성령 받음에 규범적이어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종말 세계를 시작하심에 있어서 민족들을 갈라놓게 된 근본인 언어의 혼란을 회복하신다는 예표이다. 인류 역사의 어느 시점에 인류가 하나님의 경륜을 어겨 한곳에 응집해 살며 하나님께 대항하는 역사를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시키시므로 그들을 나누시고 온 지면에 흩으셨는데(창 11:1-9), 이제 종말 시대의 도입이 이루어졌으므로 이 혼란된 언어를 다시 원상 회복시킬 것임을 예표하신 것이다. 이 원리에 의해서 보면 오순절날 제자들이 여러 방언들을 말했다기 보다는 한 동일한 언어를 말했는데 듣는 자들이 각각 자기들의 언어로 이해하도록 일이 전개됐다고 추론할 수 있다.
또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종말에서는 언어가 하나로 통일된다고 할 수 있지만, 어느 말을 하든지 상대방이 자기 말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혼란되기 이전의 언어가 어떤 것이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처음 언어로 복귀된다고 말하기 어렵다. 히브리어로 복귀된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은 처음 방언이 말해질 때 그 여러 말들 중에 히브리어는 들어 있지 안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순절에서 처럼 한 언어를 말하면 듣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방언으로 이해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증거가 오순절에는 방언으로 이루어졌어도, 그후 정상적인 전도 사역에도 전도자가 황홀경에서 듣는 자들의 언어로 옮겨 말한 기록은 없다. 즉 듣는 자들과 전도한 자들이 다 공용어를 이용하였다.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설교할 때 희랍어를 사용했음이 틀림없고, 고넬료의 가정에서 설교도 희랍어를 했을 것임이 틀림 없다고 추론할 수 있다. 당시 헬라 로마 세계의 교양인의 공용어는 희랍어였다. 이 상황이 바울로 그의 전도를 용이하게 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두 경우 다 당시의 문화 외교의 언어인 희랍어가 사용되었다.
고린도 교회의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들로 인한 혼란 외에는 바울의 전도세계에 있어서는 방언 말함을 오순절에서 처럼 반복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의 세계 공용어는 각 지방 방언 말하는 자들에게서도 다 이해되고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최소한 바울의 선교와 편지들에 나타난대로는 그러하다.
이상의 고찰들에서 우리가 결론할 수 있는 것은 성령 받음에 방언을 말함은 필수적인 것도 아니고 또 규범적인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오순절 후에도 몇몇 곳에서 방언은 나타났지만 게속적으로 반복되지 안했다. 오순절 직후 3천명, 5천명은 다 베드로의 가르침대로 세례받고 성령을 받았어도 방언은 나타나지 안했고, 또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난 급하고 강한 바람, 불의 혀의 갈라짐도 나타나지 안했다. 만일 방언이나 유사한 현상들이 나타났으면 누가가 이 사실을 소홀히 해서 결코 삭제하지 안했을 것이다(행 2:40-42, 4:4). 그는 방언이 나타날 적마다 그것을 기록하였다.


7-3. 성령세례에 방언이 필수적이도 규범적이지도 않다.


7-3-1.  오순절의 방언은 위에서 고찰한대로 성령 강림 즉 성령께서 인류에게 처음 오심 때문에 있었던 일이요, 그러므로 구원사적으로 이해될 일이며, 로마인들과 에베소인에게 생긴 방언도 구원사적 섭리에서만 바로 이해될 수 있다.

7-3-2.  앞에서 고찰한대로 예루살렘 사도들의 설교도 예수 믿고 성령 받은 3천명, 5천명은 방언했다는 기록이 없다. 혹 수가 너무 많아서 방언 은사가 허락되지 안했다고 추리할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성령세례에 방언이 필수적이라면 그렇게 추론할 수 없을 것이고, 반드시 방언이 동반했을 것이다. 누가가 이것을 생략하고 기록하지 안했다고 할 수 없다.

7-3-3.  또 성령 받고도 방언이 동반되지 않은 경우는 사도행전 8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마리아인들의 경우이다. 이 경우 방언이 동반되었으면 누가가 기록을 생략했을리 없을 것이다. 또 이 경우 오순절파는 안수가 성령 받는 일에 하나의 조건이 된다고 하나, 사도들이 여기 개입한 것은 구원사적 섭리에서 바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다음 항목에서 다룰 것이다.

7-3-4. 사도행전 8장 26-40절  까지에 구스 내시의 개종 사건을 기록하였는데, 거기도 분명히 주의 역사로 복음 전도와 수세가 이루어졌으므로 성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방언이 동반하지 안했다.

7-3-5. 사도행전 9장 1-19절  까지에 바울의 개종이 기록되어 있어도거기에 방언 동반 현상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방언이 발생했다고 볼 수 없다. 오순절파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내가 너희보다 방언을 많이 한다는데서 처음 개종시 방언을 받았을 것으로 추론하나, 그것은 추측일 뿐이요 증거가 없다. 이 경우 바울의 많은 방언은 그의 습득 방언들, 곧 히브리어, 아람어, 희랍어, 나전어와 자기의 출생 지역의 방언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7-3-6. 사도행전 11장 19-26절  까지에 기록되어 있는 안디옥 지방의 이방인들의 개종에도 방언이 동반되지 안했다. 이 방언이 동반되지 않은 경우들도 다 성령 받은 경우들이라고 확정할 수 있다.


7-4. 사마리아 개종과 두 수사도의 역할

이제 사마리아의 개종에 관해 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 8장 4-25절 까지에 사마리아의 기독교에로의 개종이 길게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오순절파는 성령 세례는 처음 예수 믿은 다음의 일이요, 사도의 안수로 성령이 임하였으니 안수가 성령 받는 일에 필요한 조건이라고 하고, 또 방언도 발생했을 것으로 추론하나, 이 추론들이 다 정당한 근거가 없는 것들이다.
첫째로, 사마리아 개종 사건에서 성령 세례가 예수 믿은 다음의 일로 발생한다고 추론하나, 이것은 본문의 오해에서 발생한 것이다. 6절은 아직 복음 수납을 확증하지 않고 단지 빌립이 전파한 것과 그가 행한 표적들에 놀라 그의 말씀을 주목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12절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해 전파하는 빌립을 그들이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직 그들이 예수 믿은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두 사도가 와서 기도할 때는 예수 믿고 시간이 경과한 후라기 보다 그때 믿었다고 할 것이다. 또 설혹 빌립의 전도로 그들이 예수 믿었다 하더라도 왜 두 사도가 와서 기도함으로 성령 받게 했는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주전 8세기 말엽 북방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 사마리아에서 진행된 역사적 전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의 적개심과 반목의 벽과 담을 매우 높고 강하게 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인과 이방인의 혼혈종이므로 유대인들이 사람 취급을 않고 개취급했으니, 집사 빌립의 전도로 사마리아인의 개종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그들을 한 교회로 받아주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 벽을 헐고 사마리아인들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교회로 아무 차별없이 받아 들이신다는 경륜을 이루기 위해 수사도 베드로와 버금가는 요한을 보내, 그들로 사마리아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편입되게 하셨다. 사마리아인들의 그리스도의 교회에의 편입을 예루살렘 교회가 승인하고, 장벽을 헐기 위해 하나님께서 교회설립자인 수사도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 성령이 강림케 하셨다. 베드로 한 사람만의 권위로도 그 높은 장벽을 헐기에는 충분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을 함께 보내셨고, 두 사람의 확실한 증거에 의해 확증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 강림이 빌립을 통해서가 아니고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셨다.
이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보면 개종이 성령 세례와 분리해서 이루어진다는 도식을 세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의 개종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섭리에서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또 본문에 비추어 봐도 복음 전도하는 빌립을 믿었다고 기록되었으니, 예수 믿었다고 볼 수 없다. 그 반증은 박수 시몬이 믿었다고(ㅌ δ  Σㄸμ ν κα  αㅂ-τㅜζ  οㄸστευσεν) 기록되었어도 사도 베드로에 의해 정죄된 것을 보면 처음 사마리아인들이 예수 믿었다고 할 수 없다. 또 믿었다는 말( οㄸστευ- σεν)도 3格을(τㅼ  Φθλㄸοοι) 목적격으로 취하므로 '신임하다', '그 말을 인정한다'는 정도일 뿐이다. 신앙의 대상을 표시하는 "εㅃζ ⅩΘησξㅐν  Χρθστㅊν"가 본문에 전혀 없는 것을 볼 때 처음 빌립의 전도로 완전 개종이 이루어졌다기 보다 기사들에 경탄해서 열심히 따른 것 뿐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 때문에 성령 강림과 여러 표징들을 주셨을 것이다. 혹 여기에다가 방언을 포함시켰다 하더라도 이 방언을 말함이 규범적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것은 다 사마리아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받아들이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적 표징들이다.


7-5. 베드로와 로마인의 개종

사도행전 10장 1-48절 까지 전장(全章)에 걸쳐서 일군(一群)의 로마인들의 개종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이 고넬료의 가족의 개종도 오순절파에서는 신앙후 성령 세례, 또 성령 세례의 표로 방언이 뒤따음의 공식으로 삼는데 사실이 그러한지 살펴보자.
예루살렘 교회에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편입된다는 사실은 아직 식역(識域) 밖에 속한다. 특히 로마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편입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자기들을 압제하고 착취하는 로마인들, 자기들의 적개심과 가득한 증오심의 대상이 되는 로마인들이 성령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최소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에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었다. 그런데 이들이 성령 받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편입하였다.
이 그리스도의 고회에의 편입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증명하기 위해 고넬료의 가족의 개종에 성령 강림에 방언을 동반시키셔야 했다. 이 섭리 외에 방언 발생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로마인의 성령 세례 받음에 방언 동반이 결코 규범이 될 수 없다.
베드로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베드로의 권위에 정면 도전할 수 있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 강림이 방언 동반 아니고야 어찌 성령 강림을 확신시킬 수 있었겠는가?
또 고넬료의 성령 세례가 예수 믿은 다음에 이루어졌다고 오순절파는 주장하나, 사실과 다르다. 고넬료가 성경의 하나님을 섬기고 많은 구제와 선행을 하였어도 아직 그가 예수 믿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므로 그는 아직 예수 믿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 믿기전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다가 예수 믿은 경우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이미 예수 믿었는데 그후에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성령 세례 받게 된 것이 아니다. 고넬료의 가족과 친족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을 때 예수 믿게 되었고, 베드로의 전파를 믿음으로 성령 받게 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중대한 진리를 언급하고 하는 것은 오순절파는 간절한 기도, 철저한 회개, 완전한 순종, 끝까지 기다림, 강렬한 믿음 등으로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을 열열히 주장하나, 성령 세례 받은 경우들을 보면, 다 성령 강림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선포이고, 그 선포를 믿음이 성령 받음이라는 진리이다. 그 외에 어떤 다른 길로도 성령 받을 수 없고, 또 설혹 선포와 그것을 믿음외 딴 방법으로 성령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고, 또 그 받는 영도 성경이 말하는 예수의 영이 아님이 분명하다. 성령 받음의 조건은 단 한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와 그 믿음이다.
여기 로마인의 개종에 베드로가 개입한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로마인 혹은 이방인의 개종에 다른 사도도 아니고 베드로가 개입했고, 보통 전도자가 아니라 수사도 즉 교회 설립자가 이 일을 이루었다. 베드로는 12 사도 중 수사도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거에 있어서 모든 제자들 중 수반(首班)이고, 또 그 특권에 의해 교회의 설립자이다. 이 권위를 가진 베드로에 의하지 않고는 로마인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편입해 들이고, 하나님의 복음이 유대인 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방인도 마찬가지로 위함이라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 드리기 어려울 것이다. 이사실을 예루살렘 사도 공회의에서 베드로가 자기의 행적에 근거해서 확증하였다. 사도행전 15장 7절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사도들 중에서 수사도 베드로로 이방인을 교회에 편입하도록 택하셨다. 베드로에 의해 로마인에게 복음이 선포되고 그 선포에 기초해서 성령을 받게 허락되었다. 성령 부어주심이 확실함을 확증시키기 위해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게 하셨다. 요컨데 고엘료의 가정에 허락하신 방언은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담을 헐기 위해 필요했지, 오순절파의 주장대로 성령 세례에 방언 동반의 공식으로 확정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다.


7-6. 에베소의 12 제자

사도행전 18장 24절 부터 19장 7절 까지에 에베소의 12 제자의 개종이 잘 기술되어 있다. 여기는 처음 세례 받고 얼마 후에 사도 바울의 안수로 성령 세례 받고 방언을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본문을 오순절 신학의 본문으로 삼는다.
여기 예수 믿은 다음에 성령 세례 받는다는 공식을 도출해 낼 수 있는지 살펴보자. 첫째 전도자 아볼로가 주의 도를 가르침 받고 예수에 관해 열심히 이야기해도 요한의 세례 밖에 알지 못했다. 즉 그가 아무리 열심히 설교해도 그는 듣는 자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없었다. 그는 예수 이름을 신앙고백하도록 하고, 그 이름에도 세례 줄 수는 없었다. 결국 세례 요한의 세례만 받고 예수 이름으로의 근본 세례는 알지도 못하게 되었다.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모르니, 곧 예수의 이름으로 회개와 그 이름을 믿는 것이 없으니 어찌 성령을 알며 성령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즉 에베소 12인들은 예수 믿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의 복음 선포를 듣고 주 예수의 이름에로 다시 세례 받아야 했다. 그들은 이때 예수 믿었지 그 이전이 아니다.
예수 믿지 못했는데, 어찌 그들이 예수 믿고 얼마후 별도의 제 2의 큰 은혜 곧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들이 성령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를 듣고서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세례 요한만 알고 믿어서는 성령 받을 수가 없다.
또 이 12인 제자들이 성령 받으니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는데, 이들에게 방언이 나타남은 구원사적 섭리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구세대에 속하였다가 그리스도 안에로 들어오므로 성령 받앗는데, 그들로 방언하게 하시므로 성령 받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분명히 가르쳐주시기 위한 섭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바울의 전도를 듣기 전까지는 예수를 알지 못하였고, 또 그 선포를 듣지 못하였다. 그들은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 받은 유대인들의 경우와 동일하다. 성령 받음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완성 후의 일이요 또 그 사역 선포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 요한 때까지는 아직 태양이 솟지 못하였다.
이렇게 고찰해 보면 오순절 운동의 신학이 성경적 근거가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오순절의 구원사적 특수성 때문에 성령 받음에 방언이 동반하였다. 예수의 제자들도 그의 재세시(在世時)에는 성령 받음에 이르러 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구속사역이 아직 완성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만이 예수 믿음이 성령 받음을 시기적으로 선행하였다. 이 일은 구원사적 견지에서 만이 바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경우를 보편화할 수 없다. 따라서 성령 세례는 예수 믿은 후 얼마 있다가 받는 것이 아니고 사도행전이 가르치는 것 만을 살펴봐도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이 동시적이요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8. 예수 믿음 = 성령 받음

오순절 성령 강림시 120여명 제자들을 제외하면 당일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 믿어 성령 받은 3천명과 며칠 후 5천명에게서 부터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은 동일했다. 8천명은 예수 믿고 성령 받았지 예수 믿음 후 얼마 지나서 성령 세례를 다시 받은 것이 아니다. 또 예수 믿어 성령 받고 방언을 한 것도 아니다. 아마도 3천명과 5천명이 동시에 방언을 하였더라면 소란과 혼잡은 대단했을 것이다.
바울의 경우도 예수 믿고 그를 신앙 고백하고서 즉 세례 받고 성령 받았지, 그 이전에 이미 예수 믿고 신앙 고백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도 예수 믿고 세례 받음으로 예수 믿음이 세례 받음임을 분명히 하였다. 고넬료도 그러하고, 사마리아인들도 동일하다. 다 예수 믿고 바로 성령 받았고, 그 성령 받음이 성령 세례이다.
만일 그렇다면 성령 받았음을 어찌알 것인가? 제임스 던(James D. Dunn)도 그의 초기 책 성령 세례(Baptism in the Hoiy Spirit)의 마지막에서 동일한 질문을 제기하고서(Baptism in the Hoiy Spirit, p.229) 그 장을 위해 다음 기획을 하겠다고 한후 그의 후기 책 Jesus and the Holy Spirit에서는 은사들의 현시에서 이것을 보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답은 거기서 보다 바울의 신학에서 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부활하신 후에 순종해서 삶, 그리고 성령의 열매 맺음과 죄와 투쟁하는 삶에서 성령 받음의 증거를 구할 수 있고 구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성령 세례를 한번도 언급한 적도 없고, 성령 받은 것은 듣고 믿음으로라고 지적하였다(갈 3:2). 우리가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영을 우리 심장에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갈 4:6). 이 바울의 전개에서 볼 때 성령 받음 곧 성령 세례는 믿음으로 이루어지고 믿음 후 적당한 시기에 성령 세례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내주하기 위해서 오신 성령은 우리가 처음에 맛배기로 조금 받아 가졌다가 그후 성령 세례 받을 때 많이 받는 식으로 받아 가질 수 있는 분량적 선물로 생각하면 안될 것이다. 내주하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성령은 처음 맛배기만을 남기시고 가셨다가 간구하면 풍성히 오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 예수 믿을 때 오신 성령은 우리를 떠나 가시지 않고 계속하여 내주하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고 선언하였다. 여기서는 믿음 후 특별 성령 세례 받음이 아니라 처음 믿을 때 내주하기 위해 오신 성령 받음을 말한다. 이 처음 믿을 때 성령 받음이 성령 세례이다.
그 특별한 성령의 강림의 경우들은 오순절과 그의 구원사적 섭리에서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오순절파처럼, 또 그 전심자들인 성결파와 부흥 운동의 신학이 가르치는 것처럼, 두번째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완전 성화에 이를 수가 없다. 베드로는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을 입었어도 여러번 실수하였다. 칼빈에 의해 신사도(新使徒)라 칭함을 받은 대 개혁자 루터도 맥주를 마시며 씨는 뿌려 놨으니 성령께서 다 담당하시리라고 하다가 죽을 때야, "나도 칼빈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할걸!"하며 임종하였다. 이렇게 큰 일을 한 칼빈에게서 성령 세례 여부를 말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그의 개종의 확정적 시기도 잘 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9. 성령 충만의 문제

그러면 십상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은 이런 경우일 것이다. 성령은 믿을 때 받으나 성령 충만은 기도해서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또 우리만 번역 성경에도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라고 명령하지 않는가?
여기서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성령 충만은 물독에 물이 가득 담기듯 가득한 의미로의 성령 충만은 성경에 없다는 진리이다. 성령이 머리 끝까지 우리 몸을 가득 채우는 식의 이해는 성경적이 아니다. 그 이해에는 다분히 비영적(非靈的), 물리적(物理的) 사고(思考)가 들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베소서 5장 18절 후반절, '오직 성령의 충만을 입으라'는 희랍어 본문에 의하면  λλㄻ οληρξㅐσ ε  ν ονεㄷματθ 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을 직역하면 '그러나 영으로 충만케 되어라'라고 할 수 있다. 여기 ονεㄷματθ를 성령으로 해석할 수 있고 또 해석해야 하느냐는 주석상의 작업을 요한다. 여기  ονεㄷμα가 성령으로 이해될 수 있으려면 정관사 τㅊ가 있거나 ㄺγθξν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런 수식어가 전혀 없으니, 이 ονεㄷμα를 성령으로 해석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문맥을 살펴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5장 18절 상반절에 술취하지 말라고 했고, 그 이전에는 지혜있는 자로서 세월을 아끼고 주의 뜻을 분별하도록 하라고 되어 있다. 그렇게 볼 때 ονεㄷμα를 바울의 어법과 이해를 따라서 새 생명의 원리, 혹은 능력으로, 새 사람으로 새 생활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주의 뜻 분별, 세월을 아낌과 연결시켜 생각하면 새 생활의 원리로 이해함이 바르다고 할 수 있다.


9-1. 육과 영과 대비

여기서 혹 성령이라고 고집할 경우도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 사도라고 불리움 받는 바울의 글 전체에 이런 충만을 명한 곳이 한 곳 뿐이라는 사실이다. 성령 충만은 우리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기의 명령형 'οληρξㅐσ ε' '너희들은 충만케 되라'의 경우도 직설법(indicative)을 전제함 없이 명령법만 고찰하면 성경적 은혜관에서 이탈하게 된다. 이미 충만케 되어 있으니 충만을 지키고 유지하라는 것이지, 이제 우리의 노력으로 영으로 채움 입으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을 충만케 입음은 인간의 종교적 노력이 결정하고, 인간의 기도, 강력한 신앙, 회개와 순종 등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오고 그 양을 결정하게 되니 은혜가 은혜되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의 종교 영역이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아니다. 바로 여기에 분파의 특색이 드러나게 된다.
성령 충만도 구원사적으로 이해해야 바르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성령 충만은 처음 오순절에 동참한 사람들과 그 직후의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었다. 처음 120명의 제자들은 성령 세례 받을 때 성령 충만을 받았다. κα   ολ σ ησαν οㄵν-τεζ ονεㄷματξζ ㄳγㄸξυ '모두가 다 성령에 의해 충만케 되었다'고 하였고(행 2:4), 4:8절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Τㅊτε  Ο τρξζ  ολησ εㄸζ ονεㄷματξζ ㄳγㄸξυ)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도 분명히 ονεㄷματξζ ㄳγㄸξυ 성령으로 표시하고 있다. 또 4장 31절에 베드로와 요한과 그의 동료들이 기도하므로 성령 충만을 입음을 기록하고 있다(κα   ολ σ ησαν ㄺοαντεζ τξυ ㄳγㄸξυ ονεㄷματξζ). 세상 권세의 역사가 강해지니 성령의 역사도 더욱 강력해졌다. 여기서도 τξυ  ㄳγㄸξυ ονεㄷματξζ '성령'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일곱 집사들을 뽑을 때는 그 자격으로서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우리말 성경은 번역하였으나, 희랍어 본문에는 ολ ρηζ οㄸστε ζ κα   σξφㄸαζ, '영과 지혜가 충만한'이라고 기록하므로 여기 영이 지혜 σξφㄸα와 동등의 은사이지 성령이라고 볼 수가 없음을 밝힐 수 있다. 또 6장 10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한다고 했는데 여기도 지혜와 영이라고 해야지 성령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7장 55절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할 때는 ολ -ρηㆉ ονεㄷματξζ ㄳγㄸξυ라고 분명히 성령의 충만을 말한다. 이때는 지혜와 영이라고 말하지 않고 성령으로만 말한다. 순교 직전의 스데반은 그의 모든 전도와 복음의 변명에 있어서 성령에 온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과 스데반에게 성령 충만이란 표현을 적용하였는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와 선포에 전무하였으니 성령에 전적으로 지배된 사람들이었다. 성령 충만은 성령에 전적으로 지배됨을 의미한다.


9-2. 성령의 인도받음 = 성령 충만

이제 바울의 성령 충만 이해를 살펴봄이 중요하다. 특히 로마서 8장에는 성령 충만이란 표현과 암시는 전혀 없고 성령의 인도만을 말한다. 여기 성령의 인도는 성화와 연결해서 전개되고 있다. 8장은 전체로 성화의 장(章)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성화는 칭의되어 성령의 법 아래 사는 자들에게서 이루어진다는 진리로 8장을 시작한다. 성화는 죄의 오염과 죄의 뿌리를 제거하는 일인데 이 일은 율법의 규범을 따라 이루어짐을 계속한다. 그런데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된 것은 우리가 육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영 안에 있기 때문이다(롬 8:1-6). 하나님의 영이 우리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육을 죽일 수 밖에 없게 된 것은 우리가 그 영에 의해 부활될 것이기 대문이다(롬 8:11). 우리가 부활에 이를 자들이기 때문에 육의 행실을 죽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육을 따라 살면 사망에 이를 뿐이기 때문이다(롬 8:12-13).
바울에 의하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부활에 이르게 한다는 보장에 대한 증거는 내주하시는 성령이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준다는 사실에 있다(롬 8:14-17).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정하시고 구속하시사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신데 있기 때문이다(롬 8:26-30).
뿐만 아니라 우리가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리어 그리스도의 형상에까지 이르는 일이 힘들고 어려워도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은 이 일에로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롬 8:31-39).
바울의 로마서 8장에 비추어서 보면 성령의 내주사역(內住事役)의 근본은 우리의성화에 있다. 우리가 죄의 행실을 벗고 영으로 자라게 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게까지 하기 위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역사하신다. 이 일을 위해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 왜냐하면 그 인도의 목표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 받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다(롬 8:14-17).
이 성령의 내주와 사역의 목표에서 볼 때 성령 충만은 바로 성령의 인도함 받는 것으로 이해해야 옳다. 이에서 벗어나 다른 이해를 갖고, 성령 충만을 구하면 곧 분파(sect)의 길에 서기가 십상이고, 다른 신학 곧 오순절 운동의 신학 같은 깃을 만들어 내기가 쉽다. 성령의 역사는 현란한 외적 현시에 있지 않고 죄와의 투쟁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역의 근본 목적 중의 하나는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만드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그리스도인의 방식으로만 조성되기 때문이다.
성령의 중요한 사역은 복음 선포와 그리스도인 만듦에 성립한다. 복음 선포도 기실은 그리스도인 만듦에로 귀착한다.
이 성령 사역과 연관하여 명심해야 할 진리는 성령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권세이고 다른 신비하고 현저한 능력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권세인 줄 모르고 별개의 능력이 있는 줄로 알고 구하다가 어려움을 많이 만난다. 성령의 능력을 이렇게 볼 때 성령의 역사는 언제 제일 강하게 나타나는가? 성령의 역사는 그 능력의 증거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할 때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그리스도 증거 중심적으로 말씀 선포가 이루어질 때 성령의 역사가 가장 활발하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이 증거를 위해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사역은 차후에 다시 논할 것이다.

 

이제 오순절파에서 주장하는 성령 세례 받는 조건들을 시비해 보자. 


10. 오순절파의 성령 세례의 조건 시비

오순절파의 신학에 의하면 처음 중생시 받은 성령은 소량이어서 칭의와 초보적 은혜에 머무르고 중생후에 받는 성령 세례로 충만한 성령을 받는다. 그런데 이 두번째의 풍성한 은혜는 예수를 신앙 대상으로 하는 신앙으로는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풍성한 은혜를 받아 능력을 힘입고 완전하 성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수 영접시의 소극적 신앙과는 달리 성령을 신앙 대상으로 하는 강렬한 신앙이 있어야 한다.


10-1.  여기 오순절 신학이 제시하는 성령 세례의 조건 중 하나가 성령을 신앙으로 대상하는 강렬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고백의 대표적 표현이라고 할 사도신경에 의하면 제 3조에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하여 성령을 우리의 신앙 대상으로 가짐을 명시하였다. 또 교회의 첫 공식 교리인 니케아 신경에도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때 우리가 성령을 믿는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성령을 직접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성령을 직접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면 그것은 신비주의가 될런지 모르지만 정상적인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하나님 신앙은 늘 예수 그리스도 신앙을 통해서이다. 이신앙의 과정은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도 동일하지만 특히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스도의 구속 이후 성령께서 인류에게 오시게 된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부착된 위격을 통해서이고, 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는 자아(ego)와 다른 자아(alter ego)라고 부른다. 즉 성령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자아라고 한다. 그리고 그 사역면에 있어서도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계속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적용과 전파와 완성을 위해서 오셨다. 그러므로 사역면에 있어서는 두 위격간에 구분이 지워지지 않는다. 이런 신학적 문제들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에서 상론할 것이다. 위에서와 같은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성령을 직접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성령 신비주의에 이를 것이다. 이런 성령 신비주의의 전례가 기독교 역사에 없지 안했다. 고대 교회가 공적으로 성령을 신앙 항목에 넣자 성령 신비주의가 발생하였다.
또 성령 받는 즉 성령 세례의 조건이 사도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였지 다른 조건 제시가 아니었다. 그들은 성령을 선포하거나 성령에 관해서 말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관하여만 말하였다. 이 선포에 성령이 강림하였다. 사도들에 의하면 성령 강림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였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속을 이루셨다는 선포가 성령 오심의 전 조건이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 오시게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 받음의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지 다른 조건이 아니다. 따라서 사도적 선포에 의하면 예수 믿음이 성령 받음의 조건이고, 성령 세례와 충만의 조건이고, 뿐만 아니라 실제 예수 믿음이 성령 받음이요, 성령 충만이다. 기독교는 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요 그를 신앙 대상으로 갖는다. 이 믿음이 곧 성령 받음이다. 왜냐하면 부활 후 특히 오순절 후에는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오실 때는 성령의 인격내에서 오시기 때문이다. 혹은 성령의 인격을 매개해서 오신다. 이 면에 있어서도 성령의 오심과 그리스도의 오심은 구분되지 않는다. 통로의 동일성, 원천의 동일성 때문에 둘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모심이 성령 모심이요 성령 모심이 그리스도 모심이다.
그러면 성령 받음의 조건에 예수 믿음 외에 딴 별도 대상의 믿음이 성립되지 않는다. 성경가 기독교가 아는 믿음은 그리스도 믿음 뿐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성령 받음의 조건이고 바로 성령 받음이다. 따라서 성령 세례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성령을 신앙 대상으로 갖는 강렬한 신앙은 배척된다.


10-2.  둘째로 성령 세례의 조건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오순절파에서는 주장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하도록 명령되었다(살전 5:17). 왜냐하면 기도가 하나님과 사람의 교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가 공로가 되어서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것은 유대교이고 율법종교이지 기독교가 아니다. 기도로 새 은혜를 가져온느 것이 아니고 이미 주신 은혜를 향유하는 것이다. 기도가 이미 주신 은혜를 누리는 길이고, 또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자리를 내어 놓는 것이지 받지 못한 성령을 가져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성령 받는 길은 예수 선포와 그 선포를 믿음이 전부이다. 이 때 받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연장으로 혹은 그 대신, 혹은 예수의 다른 자아(alter ego)로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 우리가 모시는 이는 다른 분이 아니고 바로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를 대표한(representative) 성령이시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대변하지 자기를 대변하고 자기 독자적으로 자기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요 16:13-15).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우리 마음에 오시는 분은 바로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성령에 의해 대변되어 오신다. 이 면에 있어서 성령이 예수의 자리에서 예수를 대변한 예수의 제 2자아이고, 분신(分身)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여 그리스도와 판이한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믿음 자체가 선물이고 그 믿음이 성령 받음이지, 하나님을 감동할 만한 기도로 성령을 보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은혜의 종교가 아니라 율법 종교이니 성령 받음은 없다. 성령 받음은 듣고 믿음으로 만이다(갈 3:2-5). 기도로 받으려는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아니니 율법의 행위에로의 전락이다(갈 3:3-5). 그러므로 이 방법으로 즉 기도로 받을 수 있는 성령이 있다면 그 성령은 기독교 혹은 성경이 아는 영이 아니다.


10-3.  셋째로 오순절파에 의하면 성령 세례 받는 조건중의 하나는 철저한 회대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회개의 연속이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우리 옛 사람을 우리 손으로 무덤에 완전히 장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에 회개는 필수적이다. 여기에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우리 옛 사람의 무덤을 판다"는 루터의 말을 기억함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회개가 통상의 죄를 나열하는 식으로 이루어져도 용서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죄를 나열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불유쾌를 유발하고 진노하시게 된다. 죄만을 늘어 놓는 회개는 시은소 곧 하나님의 심장에로 가는 기도가 아니다. 회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호소해서 이루어져야 용서받는다. 이 길 외에 다른 길과 다른 비법은 없다.
그런데 여기 오순절파의 주장 배후에는 다음과 같은 논리가 들어 있는 것 같다. 즉 예수 믿을 때는 내가 죄인이라는 고백과 대강의 회개가 이루어졌지만 성령 세례 혹은 충만이라는 깊은 은혜의 체험을 위해서는 처음 믿을 때 곧 은혜의 체험의 초보시에 하지 못한 죄까지 낱낱이 다 회개하고 즉 예수 믿기 전에 지은 죄들을 낱낱이 다 회개하고 또 예수 믿은 후에 지은 죄들도 낱낱이 다 회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야 성령께서 오셔서 역사하신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 대해 답하기 전에 회개에 관해 한마디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처음 예수 믿을 때는 낱낱이 지은 죄를 회개한다기 보다는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회개 관습(3천명과 5천명의 개종의 경우. 행 2:41, 4:4, 또 빌립보 간수의 경우 행 16:31-34)이 가르치는대로, 예수 믿을 때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과 그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와 사망 밖에 없으며 이에서 놓여 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뿐이라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러나 예수 믿음 후에 지은 죄와 실수들은 낱낱이 다 회개해야 마땅하다. 바로 이 교리를 오순절파에서 역이용하는데,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런 철저한 회개로 완전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성화가 현세에 사는 동안 완결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회개는 끝나지 않고 완전해 질 수도 없다. 또 우리의 철저한 회개에 상응해서 혹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그 회개에 대한 보상으로 성령이 오시는 것이 아니다. 그 회개가 죄들의 나열이 아니고, 죄를 끊는 일이면, 그것은 우리의 성화가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고, 또 성령께서 그만큼 우리에게 은혜 베푸사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로 인해 성령의 충만을 입고 완전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완전에 이름 곧 성화의 완성은 죽음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성령 충만은 바울이 가르치는 대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이지(롬 8:12-14), 통상 항간에서 생각하듯, 물이 물독을 가득 채우듯 성령이 사람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충만은 성화생활과 연관해서 생각할 것이요 즉 바울이 가르친대로 성령의 인도를 좇아 육의 소욕들 곧 옛 사람의 행실들을 고치는 일로 이해해야 성경적이다(갈 5:16-26). 이 교리도 다음 항에서 고찰할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육을 죽이는 일이 필수적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그 욕심과 정욕과 함께 육 곧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세례는 예수 믿은 후에 혹은 철저한 회개로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성령께 자리를 내어 드리므로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이미 믿을 때 오신 성령이 회개에 이어 두번 오시는 형식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 오셨던 성령이 우리에게 역사하되 그 역사하심이 돌을 구르듯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사람과의 동사(同事)를 말하기도 한다. 성령 받음 혹은 성령 세례는 예수 믿음을 계기로 해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그 차후의 단계가 아니고, 또 신앙의 혹은 종교적 노력과 준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음의 한 조건에서 성령을 분리함는 기독교 율법주의이다.

10-4.  넷째로 오순절파의 신학에 의하면 성령 세례 받는 조건은 완전한 순종이라고 주장한다. 적극적으로 자기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킬 뿐 아니라 수동적으로 주께서 자기를 온전히 쓰시도록 내어 맡기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 몸과 마음 뿐 아니라 신체의 각 부분까지 다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쓰시도록 내어 맡기고 기분까지도 높은 차원에 의해 압도되도록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경우 그런 상태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주위의 분위기에 쉽게 감염되어 그를 위해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렇게 되기를 권면하고 위해서 기도하며, 또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해 감동, 감염, 내지 진작(振作)되어 그의 언어 중추가 그렇게 반응하므로 그들처럼 방언하고 그들처럼 뜨겁게 될 것이며, 그들의 주도적인 마음 가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런 심리적 분위기에 감염되어 나타나는 현상들을 가리켜 오순절파에서는 성령 받아 방언하는 것으로 말하는데, 이것은 많은 경우에 최면 상태에 들은 예들일 것이다.
또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경우라고 하는 주장도 성경적으로 합당하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본래 힘과 함께 은혜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께서 우리 자리에서 우리 위해서 순종케 해주신다(참조 서철원,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 101-104). 하나님의 뜻 곧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 이에 우리의 힘으로 이루면 그 보답으로 성령께서 오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도 율법을 완전히 순종할 수 있으면 무엇 때문에 완전 순종 후에 성령을 필요로 할 것인가?
만일 순복음 식으로 완전 순종을 주장하고 요구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은 하나님의 완전한 순종을 한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뿐이고, 그 이후나 이전이나 아무도 완전한 순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만일 오순절파가 안전 순종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요구하면, 그들은 종교 개혁의 근본 원리의 하나인 전적 무능력의 교리를 모르거나 부인하는 것이다. 이 진리는 성경적 증거에 그대로 기초한 것이다(롬 3:10-18,20, 시 14:1-3, 53:1-3, 겔 7:20, 시 140:3, 10:7, 사 59:7-8, 잠 1:16, 시 36:1).
그리고 분명히 알고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 순종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선물이다(롬 5:17-21, 히 5:9, 빌 2:8-11, 롬 10:4, 고후 5:21, 히 19:28, 10:13, 행 2:31-33). 이 한 사람의 순종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요, 우리의 완전한 순종 때문에 성령께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10-5.  다섯째로 오순절파의 주장에 의하면 성령 받기를 끝까지 기다리고 성령 받기 위한 집회에 참석해야 한다고 한다. 끝까지 기다리고 또 성령 받기 위한 집회에 참석하여 여러 사람의 기도를 받으며, 또 울부짖고 몸을 굴리고 재를 무릅쓰므로 성령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다 인간의 노력이 성령을 통제할 수 있고 그의 오심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 들어 있다. 성령이 오실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 부터서 성령을 내가 어느 정도 조종할 수 있다는 견해가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성령은 내가 획득할 수 있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다. 이 생각은 성령의 하나님 되심과 주권성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이 된다. 성령을 선물로 보는 현대 성령론 연구의 일반적 경향과 일치한다.
이제 논의를 좀 바꾸어서 현대 성령론 연구와 성경의 증거들에 조명해서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 성령의 사역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1.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베를린의 교회신학교(Kirchle Hochschule)의 교의학 교수이었던 옷토 딜슈나이더(Otto Dilschneider)는 성령론을 오순절 후의 기독론이라고 진술한다(Pneumatologie ist Christologie Post Pentecosten). 그리고 부연하기를 성령론은 사도신경의 제 2항 부터 시작하여 제 3항에로 진행한다고 한다. 이렇게 오순절 이후의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고려하면 통상적인 위격적 구분을 하듯 확연하게 구분하는데 난점이 있음을 지시한다고 할 것이다. 특히 둘간의 사역면에 있어서 보면 더욱 그러하다고 할 것이다. 성령론은 제 2조에서 시작하여 3조에로 진행한다는 것은, 성육신과 골고다의 죽음 후 부활 후 승천하므로 교회의 승귀한 주가 되셨는데 이 때는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역사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성령과 그리스도의 밀접한 관계를 볼 수 있다.
2조가 성립할 수 있는 기초를 성령이 놓았다(성령으로 잉태하사...)고 볼 수 있다. 즉 기독론적 기초는 성령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사 오순절 이후에 나타나실 때는 승귀한 주로서 영으로 혹은 성령을 통해서 나타나셨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는 매우 밀접함을 바로 알 수 있다. 어떤이는 (H. Berkhof) 그리하여 성령과 그리스도를 일치시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후에 십자가와 부활에서 특히 부활 사건에서 성령의 권세가 나오기 때문이요(그의 책, Christeliyk feloof, 319), 또 영은 그리스도의 새 현시이기 때문(op. cit, 341)이라고 한다. 영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서, 이 그리스도에게서 영이 나오는데 이 영이 곧 살게 하는 영(고전 15:45)으로서 승귀하신 그리스도이시다(Berkhof, op. cit, 342) 그리하여 이 신학적 입장은 부활 후의 그리스도와 성령을 일치시킨다. 여기서는 존재론적 삼위일체론의 논의가 아니고 구속주로서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에 관한 논의이다.
이에 반하여 성령과 그리스도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다(A.A. Van Ruler). 이 분리는 완전해서 삼위일체론적 경향을 나타내는 위험(Van Ruler, Theologisch Werk 1, 175-190)에 이름을 벌까우어 교수가 지적하였다(Gereformeerd Weelchlad, 26e jaagang 32.46, 21mei, 1971).
그리고 현금 성령론 연구가 많은 진보를 거듭하여 신약의 복음의 이해를 풍부하게 하고 성령의 사역에 관해 깊은 이해를 가져왔어도 성령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현존으로만 보고 그의 하나님으로서의 인격성과 인격은 고려 밖으로 놓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에서 성령 조항을 전적으로 바꾸어 있다고 할 것이다. 이들 문제들에 관하여 약간의 고찰을 해 볼 필요가 있다.


11-1. 예수 : 성령으로 시작한 사람

사도신경 제 2조에 의하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qui conceptus est de Spirity Sancto, natus ex Maria Virgine)라고 하여 예수의 수태가 성령의 역사와 효능에 의해 참되고 온전하고 완전한 육을(Veram, integram, perfectam sanctamque carnem) 동정녀 마리아에게로 부터 자기의 위격에로 취택하였음을 명백히 한다. 여기서 성령이 개입하여 된 첫째 사항은 그리스도의 인간 본성의 형성이 성령의 능력에 의해 남자의 개입없이 형성되었다는 진리이다.
이처럼 예수의 수태는 초자연적이었다. 그의 인성 형성은 성령에 의해 이루었다. 그의 시작이 성령에 의해서 이고 정상적인 인간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수태가 성령의 직접적 개입과 동작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의 출생도 초자연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의 출생은 완전히 자연적이었다(nativitas naturalis fuit). 이 자연적 출생이 그 시작과 형성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점에 있어서 예수만이 성령으로 시작한 단 하나의 사람이다. 예수의 인성의 시작과 형성에 있어서 로고스의 위격이 동사하였지만, 그 직접적 조성자는 성령이었다. 성령으로 시작한 면에 있어서 예수는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사람일 뿐 아니라 유일한 사람이었다. 예수의 인격만이 독특한 것이어서 이렇게 시작되므로 세상의 구세주로 세워졌다.
성령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인성(natura humana)의 시작에 있어서만 작용한 것이 아니다. 그 형성 과정 전체에 역사하였다. 그 인성의 실질들을 마리아의 피로 부터 취택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여 이 인성을 성화하여 원죄의 오염과 부패가 전이되지 않도록 하셨다. 뿐만 아니라 아담의 죄가 전가되지 않도록 하셨다. 수태의 전 과정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취택된 형질에 오염과 부패가 제거되고, 영적인 것이나 기형적인 것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셨다. 이 성화 작용에 의해 예수는 또 성화된 출생자였다. 역사상에 성화하여 출생된 사람은 예수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중생을 위한 성령 수납을 필요로하지 안했다. 또 죄의 오염이 전가되지 안했으므로성화를 위한 투쟁을 위해 성령의 성화(聖化) 역사를 필요로 하지 안했다. 그에게 성령이 충만하여 지상 존재자 중 누구도 그의 충만을 따를 길 없었어도, 그의 성령 충만은 성화와 연관되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내면 죄와의 투쟁이 없었으므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의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호의가 한량 없어서 아버지로 부터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셨다. 그가 이면에 있어서 새 인류의 완전한 표상이요 귀감이었다. 그가 원형이었다. 그가 누구를 향해 닮아야 할 표준을 자기 위에 갖지 안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전적으로 복종해 드림만이 있었다. 이처럼 죄성의 반항이 그안에 없었으므로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자기 것으로 수납하여 자기 몸을 죽음에로 인도하였다. 이 일에 성령의 도움이 역사하였다. 그만이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성령에 의해 지배되고 인도된 유일한 사람이었다. 누구나 다 선악의 선택에 계산과 갈등을 경험하지만 예수만은 그런 갈등없이 선과 의에로 자신을 향하였다. 이렇게 할 수 있음에는 그의 사생활 30년동안 성령의 인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 그의 公生涯 시작에 있은 성령 세례에 의해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11-2. 예수 : 최초의 성령 세례 받은 자 - 구원 시대 곧 하나님 나라의 시작

인류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령으로 세례받은 최초의 사람이다. 그가 성령으로 세례받아 그리스도로 임명되었고, 하나님의 구원사(救援史)에 새로운 시대를 도입 하였다. 구약의 역사에 선지자들과 왕들이 성령을 받았지만, 그들이 받은 것은 예수의 성령 세례와는 구분된다. 예수의 성령 세례는 한량없이 성령을 받음(요 3:34)이요, 항속적이고 영원할 뿐 아니라, 새 시대를 도입하였다. 구약 선지자들의 경우 성령 임재는 일시적이고, 부분적이며, 인격적이기 보다, 은사적이며, 아직도 구세대에 속해 있었다. 저들의 구원이 아직 온전하지 못하였듯, 성령 받음도 온전하지 못하였다(히 11:40).
예수의 물세례 받음이 그의 공생애의 시작이듯, 그의 성령 세례는 새 구원시대 곧 메시야 시대의 시작을 뜻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선포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였다(마 4:17 // 막 1:15).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유형으로 즉 비둘기의 형태로 임하였다. 처음 창조에 역사했던 하나님의 영이 새 창조를 예비하기 위해 예수에게 임하였다(Jan Veenhof, De Dubbele Jesus. Meditaties Dver teksten Van de evangelisten, 1985, p.23). 성령이 오심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표이다(Veenhof, op.cit., p.23).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그 나라의 왕 곧 메시야의 임명으로 시작되었다. 구약에 왕들이 기름 부음 받음으로 왕으로 세워졌는데, 하나님 나라의 왕은 성령으로 기름 부어졌다. 구약의 왕들의 기름 부음 받음 곧 도유(塗油)는 예수의 성령 받아 메시야 왕 됨의 예표였다. 예수가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아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되므로 여호와의 종일 뿐 아니라 구원을 가져오고 하나님 나라를 도입한 그의 나라의 왕이 되신 것이다. 이 메시야 왕 됨의 관점에서 볼 때 영으로 기름 부음 받음은 예수가 하나님 자신의 전능과 능력으로 나타남을 뜻한다(Veenhof, op.cit., p.24). 이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음으로 성령이 한량없이 항속적으로 계시게 되었을 뿐 아니라 메시야의 직분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를 장비(裝備)하고 힘을 얻게 되었다.
성육신 면에서 볼 때는 전 신성이 예수 안에 육체로 거하시지만(골 2:9) 그의 인성 면에서 보면 그가 받은 성령은 한량이 없고, 그의 기름 부음 받음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전례가 없다.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왕들이 받은 성령의 일시적 임재가 아니고,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이어서, 예수의 인성에 임한 성령은 항속적이 되고 또 그 이후부터 다른 인성에로 그 임재가 파급되게 되었다. 그가 머리로서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심으로 그의 지체들인 우리 안에 그 성령이 임재하실 수 있고, 또 그 능력이 우리에게 이르러 오게 된 것이다. 즉 성령으로 사는 하나님 나라의 시대를 그가 메시야로서 도입한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성령을 받았어도 그 임재는 임시적이었고, 제자단에로 이월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러서 이 방식이 전적으로 달라졌다. 그가 성령을 한량없이 담지했을 뿐 아니라, 그의 인성에 임재한 성령이 머리와 지체의 관계를 가진 그의 백성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예수에게 있었던 동일한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로 전달되어 오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단지 예수가 성령이 우리에게 흘러오는 도관(道管)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성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선다(Veenhof, op.cit., p.26. De Zoon blyft in het contrum staan.).
예수에게 성령이 한량없이 임함은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가 생각하듯, 예수의 인성 자체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참조 Chul Won Suh, The Creation - Mediatorship of Jesus Christ, pp.20-26) 그가 이룩해야 할 구원사역 때문에 그러하다. 예수에게 성령충만은 그가 이룩해야 할 구원 사역 완수를 위한 장비(裝備)요, 능력 공급이며, 반면 새 시대에 새 인류의 생활의 원리가 영(靈)임을 예표한다고 해야 한다.
예수에게 내주한 성령이 자동적으로 백성들에게 전이된 것이 아니다. 예수에 의해 담지된 성령이 백성들에게 전이된 것이 아니다. 예수에 의해 담지된 성령이 백성들에게 올 수 있음은 그의 구원사역 완수 때문에 그러하다. 속죄 사역 완수가 예수의 영을 그의 백성들에로 전이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열쇠를 가진 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계 3:7). 그를 통해서만이 성령이 그의 백성들에게 전이되고 능력이 매개된다(Veenhof, op.cit., p.26). 성령은 오직 구원을 이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전달된다(계 7:17). 계시록이 생명수로 표현한 것은 어린양에게서 흘러나오는 성령을 뜻한다.
그러나 예수에게 내주한 성령이 그의 백성들에게 전달됨에는 속죄사역이 완성된 부활로서이다. 부활로 예수 안에 담지되어 있던 성령이 방출되었다. 그러므로 부활 전에는 예수는 성령 담지자이었다(Veenhof, op.cit., p.24. et Passim, H. Berkhof, The dochine of the Holy Spirit, p.18. et Passim). 성령이 예수의 인성으로 부터 방출되기 위해서 구속 사역의 완성인 부활이 있어야 했다(요 7:39 :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 하시더라).


11-3. 예수 = 성령의 담지자(the Spirit-bearer)

인류 역사상 예수만이 성령을 전유적으로 소유하셨고 담지하셨다. 여기의 강조점은 성령 담지자의 인성에 있다. 그가 사람으로서 성령을 충만하게 소유하시고, 담지(擔持 the Spirit-bearing)하셨다는 데 있다. 이 면에 있어서 그에게 부착된 새인류에게 성령이 영구히 내주하실 것임을 예표하고, 또 이 내주를 위해서 담지하고 계셨음을 분명히 한다. 이 일은 그의 성육신과 성전과의 관계에서 분명해진다. 예수에게 전 신성이 육체로 거하심으로 주권적으로 거하시고, 어두운 가운데 거하시기로 그 자리를 정하신 성전을 불요(不要)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성전을 헐라고 하셨는데(요 2:19), 요한은 예수의 몸이 성전인 것으로 해석하였다(요 2:21). 또 성령이 그의 육체에 충만히 거하므로(요 3:34) 그의 육체가 성전이 되었고, 돌과 나무로 지은 성전을 필요없게 하였다. 예수의 육체안에 하나님이 충만히 거하시니 그 이상의 성전이 있을 수 없다. 이제 이 예수의 육체안에 거하신 성령께서 그의 교회에 거하시므로 그리스도의 지체된 개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고전 3:16)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의 육체에서 새 인류의 인성에로 확대되었다. 이 확대가 완전해질 때 하나님께서 만유안에 만유가 되실 것이다(고전 15:28). 이 일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이고(엡 1: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리스도가 이 일을 이루신다(골 3:11: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느니라).
예수의 이 성령 담지와 만물 충만을 연결해 보면 하나님의 모든 사역 곧 계시와 성육식의 목표는 피조물 가운데 풍성히 거하심이라는 바빙크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참조 Chul Won Suh, The Creation - Mediatorship of Jesus Christ, 197f ; H Bavinck, Gereformeerde Dogematiek, Ⅰ, 352, 318). 이 목적을 위해 창조때 부터 창조가 성육신의 준비로 이루어졌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이 이루어졌다고 바빙크는 주장한다(참조 Suh, op. cit., 1975, Bavinck, op. cit.,Ⅲ, 258, 261, Ⅱ,299, 385, Ⅲ,257, 258, Ⅱ. p.525).
여기에 성령의 준비 사역을 연결할 수 있다. 성령께서 우리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게 하므로 하나님의 창조 내의 거주(居住)를 예비하고 있기 때문이다(Suh, op. cit., p.307). 또 성령의 내주 자체가 종말에서 하나님의 완전 거주의 예비이고, 또 그 예표이다(Suh, op. cit., p.307f).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그의 창조에 거하러오셨다(Suh, op. cit., p.308).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영의 능력으로 그의 백성 중에 거하시고, 또 이를 위해서 성령의 내주를 허락하셨다(Suh, op. cit., ibid).
바로 성령의 이 내주는 그리스도가 자기의 인성에 성령을 담지하셨기 때문에 가능해졌고, 전이가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구속 사역으로 성령을 획득하셨기 때문이다(Suh, op. cit., p.307). 그리스도의 인성에 의한 성령의 담지, 곧 그리스도 안에 성령의 충만한 내주는 곧 그의 백성들에게의 내주의 예표이다. 그리스도안에 내주하신 성령이 그의 부활에 의해 방출되었는데, 이때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예수가 살려주는 영이 되므로 이 일이 이루어졌다(고전 15:45). 부활이 구속의 성취이므로 부활로 성령이 그리스도에게서 방출되게 되었다.


11-4. 예수 = 살리는 영, 성령의 파송자

예수는 구속 사역과 구원의 적용과정의 관점에서 보면 성령을 자신을 위해서 담지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백성을 위해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의 부활 후 성령을 자기의 백성들에게로 파송하였다. 따라서 예수와 성령과의 관계에 있어서 예수는 성령 담지자(the Spirit-bearer)이지만 또 성령 파송자(the Spirit-dis patchor or the Spirit-Sender)란 명칭이 타당하게 된다(Veenhof, op.cit., p.24. et Passim, H. Berkhof, The dochine of the Holy Spirit, p.18. et Passim).
예수가 성령 파송자 됨에는 부활로 인한 그의 구속 사역의 완성 때문이다. 이 부활로 예수는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다. 아담도 그의 타락 전에 성령 내주를 가졌다(Calvin, Commentary on Genesis 1:27, p.97). 그러나 그는 영생 곧 완성 상태에로 이월하지 못하고 타락하므로 육(肉)이 되고 말았다(참조 창 6:3). 그는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단지 자기의 후손들에게 육체적 생명을 전해줄 뿐 영(靈)의 영역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부활에 이르므로 살려주는 영(ονεㅐμα ωιξοξθξㅐν)이 되었다.
바울은 이 첫 아담의 상태와 마지막 아담의 상태를 고린도전서 15장 35절 부터 58절까지에서 대조하고 있다. 아담이 산 혼(ψυχ ν ωㅣσαν)이 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주장한다. 즉 혈과 육(σㄻωπ κα  α μα)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또 상속받을 수 없으니 이 상속을 위해 썩어질 상태인 혈과 육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전 15:42-44). 그러므로 둘째 사람 마지막 아담이 살려주는 영으로 변화되었고, 또 그의 재림시 그에게 붙은 자들에게도 비슷한 변화가 생길 것이다. 즉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3:Δεㅒ γㄻρ τㅜ φ αρτㅜν τξㅐτξ  νδㄷσασ αθ  φ αρσㄸαν κα  τㅜ  νητㅜν  τξㅐτξ  νδㄷσασ αθ   ανασㄸαν). 그러면 인류에게서 사망의 문제가 해결되고 영생에 이른다(고전 15:54-55).
바로 이 변화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가능해졌고, 또 단지 한 개인에게서 이지만 이미 예수에게서 실현되었고, 그러므로 인류에게 도입되었다. 그의 부활로 살리는 영(ονεㅐμα ω σㄾν)이 되므로 새로운 영의 세계가 도입되었다. 그가 살리는 영이 되므로 새 시대를 열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새 인류가 조성되기 위하여 자기가 담지한 영을 파송하였다. 영을 파송하여 그의 영으로 백성 가운데 내주케 하시므로 그는 생명의 주( ρχηγㅜζ τ ζ ω  ζ)가 되었다(참조 행 3:15, 5:31, 히 2:20, 12:2). 그러므로 종말론적인 새 시대가 도입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아담 예수는 살리는 영이 되므로 그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인류에게 와서 거할 수 있게 길을 열었다(Suh, op. cit., p.307f). 그 영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내주하였던 영 곧 그가 담지했던 영이다. 이 영이 먼저 예수의 인성에거하였고, 예수의 사죄사역 때문에 그의 백성들에게로 내주가 확장되었다. 이 내주에로의 통로는 예수의 부활이요, 또 살리는 영이 되어 생명의 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 관점에서 그는 부활로 주(主 κㄷρθξζ)가 되었다.
예수의 성령 파송은(행 2:33) 부활이 결정적이나 부활후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타나심이 또 필수적이다. 이 진리를 사도행전 2:33(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에서 베드로도 가르치지만, 히브리서 10장은 이 진리에 관해 자세하다. 그리스도께서 피흘리사(히 10:22),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이루시고(히 10:12)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 성소는 땅에 있는 지상 성전의 성소가 아니고,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의 참 성소 곧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타나셨다(히 9:24). 하나님 앞에 나타나사 구속을 위하여 희생의 제물로 바쳐진 자기 몸을 아버지 앞에 보이시므로 그의 속죄 사역이 하나님께 만족함을 얻으셨다. 그 표가 바로 오순절날 예루살렘 교회에 부어주신 성령이시다. 인류를 위한 이 성령의 획득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공로이다. 이 구속 사역에 근거하여 아버지께 성령을 인류에게 보낼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부활이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과 만족의 승인이라면, 성령 보내심은 그리스도의 구속이 완전하여 죄를 완전히 속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창조에의 거주를 기뻐하심의 표이다.
바울의 논의에 의하면 성령이 부어질 수 있음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이다. 그가 우리의 범죄를 인하여 희생 제물이 되어 죽으시고 살아나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롬 4:25).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되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권리를 받았으니 더 이상 그의 진노를 두려워 하지도 않고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롬 5:1). 하나님과 화해되었으니 더 이상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한다(롬 5:10-11). 이제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왔기 때문이다(롬 5:17-18). 이 일은 생명의 영이 오므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고(롬 8:2), 또 그가 내주하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 영생에로 연결될 줄 확신한다(롬 8:14-17).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와서 거주하시니 우리가 영생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하늘에 속한 모든 복과 영광과 창조를 상속받을 것이다(롬 8:17). 그러므로 우리의 영광과 모든 축복에의 문은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렸고 가능해졌다.
그리스도가 구속을 이루어 백성들의 죄를 사하고 의롭게 하였으니 성령이 오셔서 사람중에 내주하시게 되었가. 그리스도가 구속으로 성령을 획득하여 파송하였다. 그러므로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의 공로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 부터 획득하여 우리에게 파송한 성령은 자기의 인성에 내주하고 담지되었던 영이다. 여기서 성령 오심의 통로를 생각할 때 예수와 영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국면을 살필 수가 있다.


11-5. 성령 = 예수의 영 : 예수의 위격 = 성령 오심의 통로

우리에게 파송된 성령은 구속 이전의 하나님의 영으로서 오신 것이 아니다. 물론 창조주의 영으로서 하나님의 영이 자연과 인류의 생활에 역사하고 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관심하고 있는 영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 획득되고 그의 인성에 의해 담지되었다가 우리에게 부어주신 성령이다. 여기의 강조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의해 충만의 형식으로 담지되었던 사실과 또 이 담지되었던 성령이 부활로 방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인성과의 연관이 계속 주의를 받는다.
부활후 우리에게 파송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롬 8:9, ονεㅐμα  Χρθστξㅐ) 그리스도의 인격과 긴밀히 연락된다. 그리스도의 위격은 로고스의 위격으로서가 아니고 신인위격(神人位格) 곧 중보자(仲保者)의 위격을 말한다. 즉 인성을 부착한 그리스도의 위격과 분리 불가하게 연결된다. 바로 이 점이 그리스도의 구속 이전의 창조주의 영으로서 성령과 구속 이후의 구속주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영 간에 구분을 지워주는 점이다. 하나님의 제 3위격으로서 동일 위격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나 사역 면에 있어서 또 그 오심의 통로에 있어서 큰 차이를 낸다.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오신 성령은 근본적으로 기독론적이다. 즉 그리스도에 의해 획득되었고, 그에 의해 보내어졌고, 그의 사역을 계속하기 위해서 오셨으며, 많은 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 이후에는 성령론이 기독론적으로 전개해야 하고, 또 바로 그 조망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에 의해 획득되었고 파송되었기 때문에도 기독론적이지만 그리스도에 의해 담지되었으므로 오순절 후의 성령은 기독록적으로 특색지워진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인류에게 오실 때 그리스도에의해 담지되었던 영이지만 또 인성이 부착된 위격을 통해서 오셨다. 그리스도에게서 인성과 신격은 결코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우기 부활로 예수 곧 마지막 아담이 살려주는 영이 되므로(고전 15:45), 그의 인성이 성령 오심의 통로를 이루었다. 바로이 점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있어서 대 전기(大轉機)이다. 그의 인성을 통해서 성령께서 오실 수 있으므로 하나님과 인류와의 관계는 새로운 질적 관계이고, 종말에서 신인 연합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Suh, The Creation - Mediatorship of Jesus Christ, pp.307-309). 이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칼빈의 해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요한복음 6:51 주석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생명의 원천이듯, 그의 육은 본래적으로 그의 신성 안에 있는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는 통로이라'고 하였다(Calvin, Commentary on the Gospel auordinf to John 6:51, New Translation, p.167, et passim). 그리스도의 신성안에 있는 생명은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매개되고 또 성령이 그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성령의 통로 때문에 예수와 성령의 관계가 독특하다. 이 통로가 성령을 승귀하신 그리스도와 일치시킬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이고 대표일 뿐만 아니라(H.B. Swete, the Holy Spirit in the New Testament, 1919, p.300, Veenhof, De parakleet, 21에 인용됨), 예수의 제 2의 자아(alter ego)이다(James D G Dunn, Jesus and the Spirit, 19782, 353), 혹은 다른 예수이다. 예수가 부재할 때 예수의 현존이다(C.R.E. Brown, The Gospel auordinf to John, 1970, 1139, Veenhof, De Parakleet, 16). 그러므로 성령은 합당히 예수의 영이라(행 16:7)고 불리운다. 예수는 그의 영을 통하여 승귀한 그리스도로서 지상에 돌아와 그의 영을 통하여 자기 사역을 계속하신다고 페인호프와 함께 말할 수 있다(Veenhof, De Parakleet, 21).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현존이다(Veenhof, Ibid).
이처럼 성령은 기독론적으로 특징지워지고 또 그리스도는 성령적으로 특징지워진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를 자기의 방식으로 대표하기 때문이다. 또 영에 의해 대변된 예수도 승귀된 그리스도로서는 영으로 체험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셔서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부활후에 사람들에게 오신 성령은 승귀하신 그리스도로 체험되고 별도 성령으로 체험되지 않는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증거하고 그를 영화롭게 한다. 그리고 성령이 오심으로 가져오는 능력은 고유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권세이다. 사람이 그의 옛 본성에서 죽고 새 사람으로 나는 일은 다 성령의 고유 능력에서가 아니라 그가 매개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권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실제로 오신 분은 성령이셔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체험한다. 요컨데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적용하므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시고 연장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가 기독론적으로 이루어진다. 즉 그리스도는 성령과 구분해서 생각할 수 없으므로 영적 기독론(pneumatic Christology)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항상 성령의 인격 내에서 또 그 인격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신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모심과 성령을 모심은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오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이루어 놓은 결과이다.


11-6. 그리스도 사역의 승계 : 보혜사로 역사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을 보면 양자간의 일치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위격적 구분은 유지되나 부활후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간에는 구분이 어려워 오히려 사역의 일치를 말하게 된다. 성령은 보혜사로 약속되었고(요 14:16, 16:7), 그 약속된 보혜사가 원 보혜사(=예수자신)의 자리를 대신하였기 때문이다(요 14:16). 요한복음 14장 16절에 처음으로 보혜사가 언급되었는데 다른 보혜사(ㄶλλξν οαρㄵκληθξν)라고 하므로 사도 요한의 어법에 맞추어 보면 원럐 보혜사는 그리스도 자신임을 알 수 있다(요일 2:1 οαρㄵκλη-τξν  χξμεν도 참조).
본래 그리스도 자신이 보혜사이신데, 자기 자리에서 제자들을 위로하고 보호하며 진리에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에(요 16:7-14) 성령을 보혜사라고 지목하셨다. 그러므로 이제부터서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위격 내에서 일하시게 된다. 성령의 위격 내에서 오시고 혹은 그 위격을 통해서 오시고, 성령에 의해 대표된다. 이에 근거해서 요 16: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 말씀을 요 16:22과 연관해서, 부활 후 제자들을 부활체 안에서 만나신 것을 뜻하셨지만, 또 성령의 위격 내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오사 영구히 그들과 함께 계심을 뜻하셨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진리는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확증되었다. 행 3:20에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라고 베드로가 가르쳤는데, 그는 이 절에서 사람들이 믿으면 받을 성령을 지시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리스도 자신이 이 진리를 요 14:28에 분명히 하셨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즉 일단 아버지께로 가셨다가 오실 때는 성령의 위격 내에서 다시 오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오신 그리스도 혹은 성령은 예수의 자리에서 제자들을 위로하고 진리의 길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보혜사의 칭호가 합당하다(Veenhof, De Parakleet 참조).
바로 이 까닭에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사역을 계속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자기 자리에 보내셨다. 그 계속되어야 할 사역은 바로 구속 사역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십자가의 부활로 완성되었으니 그 다음 단계의 구속 사역은 이 구속을 적용하고 확장하는 일이다. 부활로 완성된 구속을 사람들에게 충용(充用)시키는 일이 그 다음 단계의 사역으로 이 일은 성령에 의해서 진행된다. 이 까닭에 통상 조직신학에서 구원론을 성령론이라고 말한다.
성령께서는 객관적인 구원을 주관화(主觀化)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 구원을 개인에게 적용시키고 그의 소유가 되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이 그 안에 있으나 성령 파송(派送)을 통해서 그 구원이 인간에게로 이월되게 되었다. 오직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각자 안에 있게 하신다.
이 적용으로 인하여 회개와 믿음 칭의 성화의 과정들이 개인들에게 나타나 구원이 자기 소유가 된다. 그리고 이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개인의 소유임을 확신시키고 지속적으로 소유하게 역사하신다.
이 구원의 확장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 사람들을 감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다. 이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확장된다. 이 확장은 지리적으로는 전 지구상 모든 곳에 까지 이르고 시간적으로는 지상 역사의 마지막 날까지 계속된다.
이렇게 사람들을 예수 믿어 죄용서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죄로 굳어진 심령들을 감화하여 저들의 적대감정을 내려놓고, 의식의 혼미를 개명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게 역사하신다.
이 구원의 적용과 함께 성령은 성도들에게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구원 얻은 성도들의 특징이 기쁨과 즐거움이다. 이것은 또 생명의 희열이다. 새 생명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에서 오는 참 기쁨이다.
이에서 나아가 성령은 신자들을 그들의 생활의 어려움과 질고에서 위로하시며 소망을 주신다. 성도들이 역경에서 힘을 잃고 낙심할 때 저들을 위로하고 하늘의 소망과 내세 소망을 일깨워주어 힘을 내며 새로워지게 역사 한다.
나아가 구원 얻은 백성들을 인도하여 그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시며 그렇게 하도록 또 그들을 주장하신다. 이렇게 하여 자기의 구원 확장과 전파에 사람들로 동참케 하신다.
이 관점에서 성령의 은사들을 고찰해야 한다. 성령의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와 그 구원의 적용이면, 성령의 은사들도 이 목적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성령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와 그의 구속의 완성을 위해서 진행되므로, 그가 가져온 은사들도 이 목적에 종속한다.
방언의 은사도 방언하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할 수 없고, 그 방언함으로 성령의 세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미 앞에서 밝혔득, 방언은 복음 증거와 새 시대의 도래를 분명히 하기 위해 주어지신 것이고, 성령 세례의 표현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방언도 성령의 기본 사역에 연결지어서 바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치병과 투시, 예언등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 증거에 성립한다는 것을 다시 강조해야 한다. 이 관점에서 성령의 은사들을 고찰해야 바르다. 그렇지 않고 성령의 은사들 자체에서만 보면 방언의 은사 자체, 치병의 은사 자체만을 강조하고, 그 은사 받음과 그 은사의 고귀성만을 강조하지, 왜 그 은사가 주어졌는지 그 본래의 부여 목적은 망각하게 된다. 소위 이런 현상들이 은사 운동이 나타내는 문제 현상들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사역 수행을 위해 많은 은사들을 받으셨고 이 은사들을 동원하셨는데, 이제 그리스도의 사역을 승계한 성령께서도 많은 은사들을 활용하시는데 그 은사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 지체들에게 주시므로 그리스도의 사역이 계속되게 하신다. 즉 그의 이름의 권세와 그의 구원을 증거하여 확장되게 하고 구원이 나타나게 하신다. 이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


11-7. 성령 사역의 목표 = 그리스도의 榮化

성령의 또 다른 주요 사역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일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함을 그의 목표로 삼았듯, 이제 차례를 바꾸어 성령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함을 그의 사역의 목표로 삼는다.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그 영화에서 자기의 영화를 보았다(요 17:1ff). 아들은 아버지의 영화와 자기의 영광을 분리하지 안했다. 아버지께서 영광 보심에 자기도 동참하였다.
그런데 성령은 아들의 영화에서 영광을 보며, 그 영화에서 자기도 신적 영광에 동참하신다. 아들이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갖듯(cf 요 3:11, 17:10), 성령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서 갖는다(요 16:13-15).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광이 곧 자기의 영광이요, 그리스도가 영화됨이 자기가 영광에 이르는 길이다. 성령은 자기 스스로를 영화롭게 함이 없다. 그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시 위해 보내어 졌으니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함에 크게 역사하신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를 영화롭게 함에 성립한다.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함은 그를 증거함에 성립한다.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그의 이름이 확장되고, 그의 이름이 고백되고 믿어짐에 그의 영광이 성립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많은 생명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에로 모아온다. 즉 그리스도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고 그의 이름의 권세로 사는 일이 그리스도의 나라인데, 이 일을 성령께서 하신다. 이 나라의 확장이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보시는 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어 살게 하심이 성령의 역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말씀대로 사는 일은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로써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잎에서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보신다. 왜냐하면, 이 일에서 그리스도께서 왕이시기 때문이다.
이 방식들로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 그러면 결국 이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보시게 된다.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로 귀착한다.


11-8. 예수 = 부활의 첫 열매 : 성령 = 그 보증금

부활은 예수의 생(生) 자체에도 큰 전환이다. 지상적 생(生)에서 천상적 생(生)에로의 전이이다. 그가 정상적인 선량한 사람으로는 도저히 이르러 갈 수 없는 치욕적 죽음에서 영광의 생(生), 천상의 영적 생(生)에로 전환하였다. 부활이 그로 하여금 지상적 생(生)에서 천상의 주로, 성령 담지자에서 성령 파송자로 승귀되게 하였다. 그가 지상에서 종의 형상으로 봉사하였는데 주(κㄷρθξζ)로서 우주의 통치자의 位에로 승귀되었다. 그의 통치 방식이 은혜와 말씀의 길이어서 아직도 간접적이고, 이 면에 있어서는 은폐된 형태의 종의 형상(形相)의 면을 가지나 더 이상 지상에서의 종의 형체는 없다.
그의 부활은 그의 개인적 운명에만 결정적 변화를 가져 온 것이 아니다. 그의 부활은 한 개인으로서의 부활이 아니고 마지막 아담 곧 새 인류의 아버지로서(Suh, The Creation - Mediatorship of Jesus Christ, p.309)의 부활이어서 그의 부활이 인류의 운명을 전적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는 교회의 머리(골 1:18, 엡 1:22-23)로서 부활하셨으므로, 그의 부활이 그의 몸 곧 새 인류의 부활이 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부활로 자기의 백성을 자기의 몸으로 구성하였다. 이 유기적 관계 때문에 머리인 그리스도에게 생긴 일은 곧 그 몸에로 확장되어 몸도 동일한 운명에 이르게 되었다. 예수의 부활은 모든 인류에게 부활을 도입하되 새 인류의 머리로서 부활에 이르므로 부활이 전 인류에게 미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부활은 그의 몸 곧 새 인류가 동참할 부활의 첫 열매이다( οαρχ ).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외쳤다(고전 15:20 Νυν  δ  Χρθστㅜζ  γ γερταθ  κ νεκρㅣν  οαρχ  τㅣν κεκξθμημ ν ν.).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로서 이것이 그에게 붙은 인류의 것이 될 것임을 23절에서 밝힌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고전 15:23)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이고 그리고 이 부활이 모든 자의 것이 되는 것은 그의 강림 때인데, 그들도 부활에 동참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붙어있기 때문이다(고전 15:23  οαρχ  Χρθστㅊζ   οεθτα ξㅉ τξㅐ Χρθστξㅐ  ν τㅿ οαρξυσㄸα αㅂτξㅐ) 그들이 혹은 새 인류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에게붙어 있음 혹은 원문대로 그리스도의 소유(ξㅉ τξㅐ Χρθστξㅐ)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 것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게 된다.
여기서 바울이 첫 열매와 추수와의 관계로 부활의 순서를 설명한다. 추수 때가 되어 농부가 첫 벼를 베다가 햇 곡식으로 첫 식사를 해 먹게 되면 들에 있는 익은 곡식들을 추수해 들이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첫 열매를 추수했으니 나머지 벼들을 추수해 들이는 것은 분명하고 확실하다. 나머지 벼들이 추수에동참하지 않으리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않는다. 그것처럼 당연하고 확실한 것이 없다. 첫 낫을 벼에 댄 농부의 눈에는 모든 벼가 다 익어 추수해 들일 것이 훤하고 확실하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셨으니 그에게 붙은 몸이 부활에 동참하지 못한다고 상상할 수가 없다. 이미 첫 열매로서 부활이 발생하였으니 나머지에게 부활은 확실하고 분명하다. 그 때는 그리스도의 강림(οαρξυ-σㄸα) 때이다.
그런데 바울에 글에 나타난 진리에 의하면 부활의 확실성은 첫 열매의 비유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부활의 첫 열매로서 그의 부활이 우리 것이 되는데는 우리에게 보증을 주셨다. 고린도후서 5장 1절부터 5절까지에서 바울은 우리가 죽음의 상태에서 죽지 않음의 상태로 전이될 것에 대한 보증으로 혹은 희랍어 단어대로는 보증금( ρραβ ν)으로 성령을 주셨다고 전개하고 있다. 에베소서 1장 13절 14절에서 이 진리를 또 잘 전개하고 있다. 우리가 얻을 영원한 유업을 약속하신 성령으로 인치셨는데, 그 성령이 곧 우리가 그것을 받을 것이라는 보증금이다. 이 아라본( ρραβ ν)은 원래는 셈계 히브리어에서 차용한 단어인데, 후에 되돌려 받을 저당물(Pledge)의 뜻으로 쓰이며, 또 진 빚의 총액에 대한 기탁물(deposit)이어서 법적으로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또 한 계약 체결의 보증금(earnest-money)이다. 이 아라본( ρραβ ν), 보증금 혹은 보증은 더 큰 어떤 것을 위해 계약하는 행동을 포함한다고 벰(Behm)은 설명한다(Behm,  ρραβ ν,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by Gerh And Kittel, ET, by Geoffry W. Bromiley, 1, 475). 이들 세 뜻이 다 타당하겠지만 보증금이 가장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큰 액수의 돈이 걸린 어떤 계약을 할 때 보증금을 걸고 계약하는 것은 그 계약 조건을 다 이행하겠다는 서약이요, 그리하여 그 큰 돈이 걸린 거래를 이룰 것임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큰 유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이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징표 곧 보증금( ρραβ ν)을 걸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자기의 약속을 이루시겠다고 우리에게 주신 보증금이 바로 성령이시다(고후 5:5, 엡 1:1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부활에 동참케 하셔서 영생에 이르게 할 것은 분명하고 확실하다. 그런데 보증금으로 주신 영은 다른 이의 영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으로, 이 영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게 하셨으니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처럼 우리 안에 거하세 하신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죽을 몸을 살리실 것이다(롬 8:11 εㅃ δ  τㅜ ονεㅐμα  τξㅐ  γεㄸραντξζ τㅜν ⅩΘησξㅐν  κ νεκρㅣν ξㅃκεㅒ  ν ㅈμㅒν  ㅌ  γεㄸραζ Χρθστㅜν  κ νεκρㅣν ωιξ-  οξθ σεθ κα  τㄻ  νητㄻ σㅇματα ㅈμㅣν δθㄻ τξㅐ   νξθκξㅐντξζ αㅂτξㅐ ονεㄷματξζ  ν ㅈμㅒν). 우리의 부활과 영원한 유산 상속을 위해 그 보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그 동일한 영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셨으니, 예수의 부활이 우리 것이 될 것임은 더 없이 확고하고 확실하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보증금을 걸으셨으니 자기의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한 이 약속은 불변이고 또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한 개인의 일이 아니고 우리 전체에게 미칠 우주적인 사건이다.
이토록 예수의 부활이 죄와 사망이 해결되고 신천신지가 열리는 관문이다. 비록 한 사람이 부활하였으나, 그 부활이 사망의 권세를 깨침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 사람이 부활로 사망의 권세와 법을 깨트렸으면 언젠가는 그 사망이 모두에게 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라"고 외쳤다(고전 15:26). 이렇게 해서 이미 죽음은 정복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호세아 13:14을 인용하여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담대히 외칠 수 있었다(고전 15:55). 그런데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나(고전 15:56), 죄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처리되고 율법이 성취되었으니, 사망이 더이상 왕노릇 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으니(고전 15:57) 죽음을 두려워함 없이 살고 또 죽어도 부활의 소망과 보증금 때문에 평안히 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또 일면 성령의 첫 열매라고 할 수 있다(롬 8:23 :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구속 받은 백성은 새 인류로서 첫 열매라고 할 수 있다(계 14:4b :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11-9. 영 = 종말 세계의 생(生)의 원리(原理)

여기서 조금 확장하여 종말 세계의 생의 원리에 대하여 몇마디 언급해도 좋을 듯하다. 우리의 육체의 부활의 보증금으로 우리 안에 와 계신 영 혹은 성령은 우리가부활한 후에는 우리를 떠나가시고 그 임무를 다 마감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떠나시지 않고 영구히 계시기 위해서 오신 성령은(요 14:16) 종말 세계에서도 우리를 떠나시지 않는다. 또 우리를 살리신 그 영이 우리의 생의 원리가 된다. 종말에서 하나님의 편만이 그의 영으로 이루어질 것이니, 우리의 생명도 그의 영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더 이상 우리의 생명이 자연의 순환 과정에 의해서 존속되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영에 의해서 살게 될 것이다. 전통적으로 만물이 아버지에게서 유래하고 아들이 만물을 조성하였지만 그 생명은 성령을 통해서 받는다는 것이 기독교의 공동 자산이었다(cf. Suh, The Creation - Mediatorship of Jesus Christ, p.159; A. Kuyper, E VOTO,I, 207, et passim). 그러므로 이 종말 세계에서는 영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고 유지되며 영위되는 생을 살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성령의 내주와 충만은 다 종말 세계에서 우리가 누리고 살 풍성한 영의 지배의 예표라고 할 것이다. 이 면에 있어서도 성령의 내주는 종말론적이다. 종말 세계에서는 현세계의 자연 순환 과정에 그치므로, 이방식에 의한 생명유지가 그치고 영에 의해 유지되는 영체(靈體)의 삶을 살 것이다.
예수의 지상생(地上生) 동안 성령을 한량 없이 받음이 우리가 종말에서 누릴 영의 충만의 예표라고 해야 바를 것이다.


12. 성령의 위격 문제

초대교회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의 확림은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에서 시발(始發)하고 결말되어졌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첫 에큐메닉 공회의(Oecumenicum 1)인 니케아 공회의(325)의 정통 신학에는 성령에 대한 아무런 교리 결정이 없이 단지 "그리고 성령을 믿사오며"(κα  εθζ τㅜ ㄺγθξν  ονεㅐμα  et in Spiritum Sanctum)을 부록으로 달앗다. 그후 갑바도키아 신학자들(대바실, 나지안지아의 그레고리와 닛사의 그레고리)의 신학적 작업의 열매로 제 2 에큐메닉 공회의(Oecumenicum 2)인 콘스탄티노풀 공회의(381)에서 성령의 위격과 특성을 공식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령을 믿사온데, 주님(τㅜ κㄷρθξν, 독립적이시며의 뜻)이요 살리시는 자요(τㅜ ω ξοξθㅊν),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자요(τㅜ  κ τξㅐ οατρㅜζ  κοξρευㅊμενξν),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동일하게 경배 받으시고(τㅜ σㅛν οατρ  κα  υㅉι  συμορξσκυνξㄷμενξν), 함께 영광을 받으시는 자요(κα  συν-δξπαωㅊμενξν),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이시라"(τㅜ λαλ σαν δθㄻ τㅣν ορξφητㅣν)고 결정하여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므로 출래(出來 Processio)가 성령 위격의 특성임과 아버지와 아들과 동등되심을 밝혔다. 여기서 출래는 아버지에게서이고 아들에게서도(Filioque)는 아니어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동등됨은 밝혔으되 아들과의 관계는 논외(論外)로 남겼다. 후에 서방교회가 Filioque는 추가하였고, 톨레타노 공회의(Concilium Toletanum ⅩⅠ, 675)에서 결정하기를 아버지와 아들 양자로부터 출래하신다(Ab utrisque Precedentem)고 하였지만(H. Denzinger, enchiridion, 193723, p.128 참조), 끝내 아들과 성령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는 신약이 가르친대로 규명짓지 못하였다.
이제 20세기 후반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교파의 경계선을 넘어서 주의를 받게 되자 성령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예수와 성령과의 관계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새 연구가 예수와 성령의 바른 관계에서 진행되기는 하나 공교회(公敎會)의 전통적 신학(傳統的 神學) 혹은 교리의 선에서 진행되고 있지 않은 것이 현금의 추세이다. 즉 예수와의 관계에서 성령을 보는 것은 초대교회가 해결하지 않고 남긴 지점에서 출발하니 바르고 합당해서, 이 관계가 신약이 가르친대로 규명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공교회(公敎會)의 교리적 전통 곧 성령을 신적 위격(神的 位格)으로 보는 데는 눈이 없고, 오히려 능력으로 생명으로 속은 지혜로 보는 차원에 사므로 복음주의 교회들이 이에 대한 반동으로 성령의 인격성(人格性)을 구호식(口號式)으로 강조하나 신약의 가르침에 근거한 신학적 정립은 아직 없다.
고대교회가 중단한 예수와 성령, 혹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는 신약이 가르친대로 바로 이해되고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교회의 교리적 전통에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12-1. 발트의 성령론 논의

20세기 성령 연구가 전통적인 성령의 신성과 위격(位格) 인정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예수의 부활의 능력과 생명 정도로만 보는 선에서 논의가 진행됨에는 칼 발트(Karl Barth)의 신학이 그 길을 정립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발트만큼 삼위일체를 많이 언급하는 신학자도 없을 것이다. 그의 교회 교의학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그처럼 자주 반복되어도 전통적 신관의 삼위일체론은 아니다. 그는 위격(Pesona)을 존재의 방식(Seinsweize, exiztentia)으로 바꿔 한 하나님 곧 한 위격적 하나님(dev eine Pers nliche Gott Kirchithe Dogmatik, 1/1, 379, 이후에는 KD로 약)을 가르친다. 그의 교의학에서 발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간단없이 언급하여도, 그는 이로써 전통적 삼위일체를 지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의 계시론적 삼위일체론을 지시하기 위해서 이다. 발트는 '위격들'(Persons)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한 하나님의 '존재방식'(Seinsweise)을 채택한다. 그에 의하면 세 위격들의 사용은 삼신론(三神論 Tritheism)이 된다는 것이다(KD, 1/1, 379,381). 그가 위격을 존재방식으로 바꾼 것은 칼빈의 자취를 따름으로서, 'Subsistentia in Dei essentia'를 취택한다고 한다. 발트에 의하면 성경 계시가 삼위일체 교리의 뿌리이고 우리의 신지식의 원천이므로 자기의 삼위일체 교리의 이해를 성경 계시에 기초시킨다고 한다(KD, 1/1, 320ff). 따라서 그는 삼위일체 교리를 계시적으로 전개한다. 즉 계시의 구성 요인들 곧 계시의 원천인 계시자, 계시가 이루어지는 계시 행동, 또 계시 행동의 결과로서 전달된 계시의 내용 곧 계시된 것을 삼위일체로서 전개한다. 계시의 세 구성 요소인 계시자, 계시 행동 혹은 계시, 계시된 것에 전통적 삼위의 이름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대응시켜 자기의 계시론적인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 발트의 출발점은 하나님은 자기를 계시하시는 분이라는 데서 시작한다. 이제 그의 논의를 간략하게 개요해 보자. 자기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자기 계시함(Sein Sich-Offenbaren)이라는 것이다(KD, 1/1, 314-315). 그러므로 계시는 하나님의 술어인데, 이 술어는 하나님 자신과 일치한다. 말을 바꾸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계시와 사람에게 미친 그 영향이라고 한다. 그런데 계시하시는 하나님과 계시와 그 결과간에는 해소 불가한 통일(Einheit Unity)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삼중 존재 방식에서 동일한 일자(一者)로서 존재한다(KD, 1/1, 315). 왜냐하면 계시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인격(Dei loguentis Persona)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KD, 1/1, 320). 이 신적 계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Das Wort Gottes)은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 된다(KD, 1/1, 321).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그의 자기 계시이기 때문이다. 성경 계시의 증거에 있어서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그 본질의 통일에 있어서 교회의 교리적 표현에 의하면 한 하나님(Der eine Gott)이나, 성경적 계시 증거에 있어서 한 하나님은 위격들의 상이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시라는 것이다(KD, 1/1, 324). 이 방식으로 성경 계시 자체가 삼위일체 교리의 뿌리를 구성한다(KD, 1/1, 325,329, et Passim).
계시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을 자신에게서 구분할 수 있지만 동일한 분으로 남는다. 계시되신 하나님(Deus revelatus)은 은폐된 하나님(Deus absconditus)이시다(KD, 1/1, 337-338). 즉 하나님은 계시하시면서 자신을 숨기시고, 계시에서 형태(Gest alt)를 취하신다(KD, 1/1, 349). 왜냐하면 계시는 하나님의 계시된 존재(eines Offenbarseins Gottes)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KD, 1/1, 34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지시하는 것은 하나님은 삼중 반복에서 한 하나님이시고, 이 반복은 그의 신성에 정초되어 있다는 것이다(KD, 1/1, 369). 말을 바꾸면 계시된 ㅌ8의 계시된 통일성의 개념은 하나님의 본질 내에 구분이 존재함을 지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구분은 세 '위격들'의 구분이 아니고 하나님 내에 있는 존재의 세 양태(Ddrei Seins Weisen' in Got)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발트는 위격들이란 전통적인 개념을 취택하지 않고 대신 존재 방식들을 채용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존재의 세 방식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안에서 하나이시다. 즉 그는 한 하나님, 한 주, 그러므로 한 위격적인 하나님(Der eine Pes nliche Gott)이시다(KD, 1/1, 379). 계시에서 한 하나님의 셋 됨(Dreiheit)은 계시자와 계시와 계시된 것인데, 이것은 거룩과 자비와 사랑의 삼중성에 상응하고 또 각각 창조주 하나님, 화해자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께 상응한다는 것이다. 계시자와 계시와 계시된 것의 삼중에 있어서 계시자는 계시의 기원과 근거를 즉 계시와 구분되는 계시자 자신을 지시하고, 계시는 계시자의 신비에 대해 계시안에 새롭게 현시된 어떤 것을 지목한다. 계시된 것은 계시자의 의도를 그러므로 계시의 의미를 지시한다. 말을 바꾸면 이 삼중성은 하나님의 은혜와 현시와 통화를 지시한다(KD, 1/1, 383). 발트는 하나님의 삼중성을, 얘기하는 사람(speaker), 그의 말과, 그 화자(話者)와 그 의미의 매체인 말의 의미의비유로 설명한다(KD, 1/1, 384). 그러면 하나님 내의 세 위격들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한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이름함이다(KD, 1/1, 386, 403). 아버지오 그의 자기 은폐와 거룩에서의 하나님을 지목하고, 아들은 그의 자기 현시와 자비에서의 하나님을 지시하며, 영은 그의 자기 통보와 사랑에서의 하나님을 이름한다(KD, 1/1, 401-402). 이 방식으로 발트는 계시자를 아버지와 일치시키고, 계시를 아들과 계시된 것을 성령과 일치시킨다(KD, 1/1, 294).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계시에서 삼위일체자(the Triune)로 존재한다(KD, 1/1, 364).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그의 계시의 행동이기 때문이라고 한다(KD, 1/1, 293).
위에서 우리가 살핀 바에 의하면 발트의 삼위일체론에는 전통적인 위격 개념들이 소실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서의 구분은 계시 과정에서의 일이요 하나님의 존재 자체 내에 있는 구분이 아니다. 위격으로서의 존재는 계시자로 지목된 아버지 뿐이요, 아들과 영은 계시과정 혹은 동작, 그리고 계시된 내용일 뿐이다. 이 경우 성령을 계시내용과 일치시킨 발트의 삼위일체론에서는 영은 위격적 존재가 아니다. 삼위일체는 단지 계시 과정에서 변증법적으로만 성립 가능한 것이다.
발트의 신학에서 성령이 위격적 존재가 아님은 그의 교의학 4권에서 전개하는 성령론과 교회론에 나타난 성령의 정의에서 명백하다. 그는 그의 교의학 4/1, $62의 제목을 '성령과 그리스도 교회의 회집'이라고 하고서 성령을 소생시키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몸 즉 자기의 지상(地上)의 역사적 실존 형식을,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를 창조하고 계속적으로 갱신시키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KD, 4/1, 718 : Der Heilige Geist ist die erweckende Macht, inder sich Jesus Christus seinen leib, d.h. seine eigene irdisch- feschichtliche existenzform, die eine, heiliqe, allfemeine, apostolische Kirche fcschaffen hat und fort und fort erneust.). 발트는 이와 비슷한 정의를 $과 그 다음에서 반복한다. 성령은 회생시키는 능력으로서 교회와 신앙의 전제인데, 그가 곧 성령이라는 것이다(KD, 4/1, 723). 발트는 성령은 예수가 자신을 증거하고, 또 사람들 중에서 들음과 순종을 조성해 내는 능력이라는데 그 강조를 둔다(KD, 4/1, 724). 바로 이 능력 곧 성령으로 교회와 새 인류가 살아난다는 것이다(KD, 4/1, 741, 743). 발트는 조금 말을 달리 하여, 성령을 소생케 하는 능력이라고 KD, 4/1, $63에서 정의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죄있는 인간을 자기의 교회로 부르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를 믿도록 부르는 소생력이라고 정의한다(KD, 4/1, 826, 836).
발트는 더욱 논의를 전개하여 그의 교의학 4/2, $64에서 부활과 연관시켜 이렇게 정의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현존과 행동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즉 그의 부활의 능력에서 예수 그리스도 즉 그의 부활과 함께 시작하고 거기서 더 확대 작용하는 그의 계시의 능력이라고 한다(KD, 4/2, 361).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 가운데 사는, 그로써 그들을 자기의 증인으로 만드는 능력이다(Ibid).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영, 즉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계시됨의 능력이 그의 영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그는 성령이다(Ibid). 이 성령은 또 아버지의 영이고(KD, 4/2, 371ff)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Ibid, 361ff, 387f).
성령을 능력으로 보는 발트의 논의는 더욱 계속된다. 그의 교의학 KD, 4/1, $67에서 성령은 소생케 하는 능력과 비슷하게 정의된다. 성령은 주 예수가 세상에 있는 기독교 세계를 자기의 몸으로 곧 자기의 지상에 있는 역사적 실존 형식으로서 자라게 하고, 유지하고, 또 자기의 성도들의 공동체로서 정립하고, 또 전 인류계를 거룩케함을 임시적으로 현시하는데 유용하게 하는 살게하는 능력(Dei helebende Macht)이라고 정의한다(KD, 4/1, 695). 부활자 곧 살아 있는 주님이 능력있게 살게 하는 방향 지시가 성령인데, 그를 성화의 원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방향 설정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또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사상이 사건화 된다(Ereigniswersen). 그리하여 기독교 세계와 따라서 개별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을 역사한다(Ibid). 비슷한 정의가 반복된다. $68에서는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죄있는 인간을 그의 교회로 옮기고, 그러므로 그에게 자유를 주어 사랑으로 그리스도에게 헌신하고, 또 동료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증인으로 나타나게 하는 활력이다(KD, 4/2, 825). 발트의 성령을 능력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의 교의학  4/3,2,에서도 계속된다. 여기서는 성령을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조명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KD, 4/3,2, 780, 1035).
발트에게 있어서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하는 능력이다. 예수의 임재와 행동이고, 그의 부활에서 나오는 소생시키고 살리는 능력이다.
물론 우리가 영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권세로 이해하고, 따라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분리해서 특히 부활 후에는 더욱이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지만, 그러나 발트식의 능력으로만 정의함에는 성령의 위격적 존재가 자리를 가질 수가 없다.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만 본다 할지라도 성령을 능력으로만 간주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성령은 기독론적이 되었고, 또 그리스도도 성령론적으로 되어 둘의 일치를 신약이 강하게 강조하여도, 성령을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능력으로만 말하지 않는다.


12-2. H. 베르크호프의 성령론 논의

발트의 성령에 대한 신학적 전개는 그의 후계자들에게 계승되어 성령은 인격적 존재로서가 아니고 능력으로 보는 관점에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발트 이후의 신학적 논의에서 이 정해진 방향이 변경된 것을 볼 수가 없다. 우선 오래도록 자신을 발트주의자(Barthian)으로 지목 받기를 거절하지 않은 화란의 헨드리쿠스 베르크호프 부터서 잠시 살펴 보자. 그는 신구약에서 영을 표시하는 단어인 하 ㅺ(ruach, 루아흐)와 ονεㅐμα(Pneuma,프뉴마)가 다 그 본 뜻이 바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 그의 성령론을 시작한다(H. Berkhof, The doctrine of the Holy Spirit. Atlanta : John Knox Press, 19772, 135). 베르크호프에 의하면 구약에 예언된 영의 종말론적 선물은 선택되었으나 불순종한 백성의 재창조와 재생의 기적을 뜻한다(Ibid, 15 : The eschatological giff of  the Spirit mearss the miracle of re-creation and reqeneration of the chosen but disobedient people). 하나님이 영이라고 할 때도, 그 뜻은 하나님이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시고 행동하시며, 새 활력을 허락하심으로 이해한다(Ibid, 16).
베르크호프는 영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있어서 2중관계를 인정한다. 그리스도의 수태와 세례에 있어서는 영이 신적 우선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때문에 그리스도가 영의 담지자가 된다. 그러나 부활 후에는 그리스도가 영의 파송자로 신약에는 기술됨을 말한다(op. cit., 17-20).
그런데 베르크호프는 그의 특유의 삼위일체론 특히 영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전개하기 위해 전통적인 로고스 기독론(Logos-Christology)에로 복귀하기를 제창한다(op. cit., 21). 그는 발트의 성령 이해 곧 성령은 계시의 주관적 실재(KD, 1/2, 16)에 연결하여 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계시의 적용의 능력이라고 정의하여 그가 영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어찌 정의하고 전개하려는지를 미리 암시한다. 영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다룸에 있어서 베르크호프는 영을 승귀한 그리스도의 행동이란 제목 아래서 전개한다(op. cit., 21). 이 정의를 신약에서 증명하기 위하여 영과 그리스도와의 동일화를 증거하는 성구들을 열거한다(요 14:18, 마 28:20, 요일 3:24, 계 2:7, 고후 3:17a). 이에 앞서 개혁교회는 영을 그리스도에게 종속시켜, 객관적 실재만을 강조하고, 오순절파등은 영을 그리스도에서 분리시켜 개인의 종교에 연결시키므로 성령을 독립적 실재로 보는 실수를 지적한다(H. Berkhof, The doctrine of the Holy Spirit., 235).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영은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키면, 영은 기능적 개념이 되어, 영은 행동하시는 그리스도라고 해야 바르다는 것이다(op. cit., 25f). 영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취하시는 존재와 행동의 새 방식이라는 것이다(op. cit., 27). 왜냐하면 영으로서 그리스도는 자기에게 시작된 새 형상을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하여(성화), 자기와 교제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op. cit., 27).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부활의 능력에 있어서 우리에게로 오는 한 그는 영이라는 것이 베르크호프의 결론이다(op. cit., 29).
베르크호프의 이 논의는 그의 조직신학 책인 기독교 신앙(Christelijk filoof)에 좀더 길게 개진되고 있다. 영과 그리스도를 일치시키므로 그에게 있어서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가 인정되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소실된다. 발트에게서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신자(神子)가 아니고 순전히 역사내의 인물이듯, 베르크호프에게서도 동일하다(자세한 참조, Chul Won Suh, The Creation - Mediatorship of Jesus Christ, pp.109-113).
베르크호프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새 창조 활동 때문에 새 사람이고(Christelijk geloof, 302, 이후에 이 책은 CG로인용) 신형상에 따른 실질적인 인물이다(CG. 307). 그러므로 그는 종말론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CG. 302). 하나님은 이 새 사람을 창조하므로 은혜와 구속의 사역을 시발하셨다(CG. 517). 이 새 사람 예수가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므로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었다(CG. 318). 하나님은 화해를 위해서 이 사람 예수를 창조하셨다(CG. 319). 이 새 인간 예수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언약에서 인간의 대표로서 동사자로 역사하였다(CG. 298). 하나님은 언약에서의 이 동사자를 마련하셨는데, 언약 관계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CG. 302).
이 언약 관계와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하신 하나님, 삼위일체의 제 2 위 이실 수 없고, 단지 언약의 인간 당사자이다(CG. 355). 삼위일체는 언약 구조의 기술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영원에서의 한 존재가 아니고 시간내의 한 역사이다(CG. 349). 베르크호프에 의하면 언약 관계로서 삼위일체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는 신적 당사자이고, 아들은 인간 대표이고, 영은 이 양자간의 결합이고 그러므로 아들과 이 아들이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아들들간의 결합의 띠(bond)라는 것이다(CG. 348-349). 이 관계의 부정이 삼위일체 문제를 야기하였다(CG. 355). 그리스도의 천적(天的) 기원에 관한 진술은 상징적 언어로서(CG. 187) 그리스도의 창조에 나타난 신적 기선과 겸비라고 베르크호프는 주장한다(CG. 305).
이 인간 예수가 순종의 길로 신인을 다시 결합하였다고 베르크호프는 주장한다. 예수는 하나님을 대변하여 하나님과 일치해서 살므로 언약관계를 회복하였고(CG. 302), 순종의 길에서 소외된 인간을 결합시키므로 그가 신인을 결합하였다(CG. 319). 신인의 이 결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는 죽음의 길을 가서 우리의 죄과를 제거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키므로 그의 생을 합법화하고, 또 승귀시켰다(CG. 332). 이 승귀된 그리스도에게서 성령이 나가서 우리를 이 새사람에 같아지게 한다(CG. 344).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영은 바로 이런 생을 산 그리스도의 정신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 영이 그리스도에게서 나올 뿐 아니라 그의 사역을 계속한다. 이 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영은 또 동일하다고 베르크호프는 주장한다(CG. 342). 영이 세상에서 일하고 내주하며 하나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하니, 영은 우리 가운데 일하는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정의한다(CG. 343). 그러나 신인의 가장 깊은 결합이 문제이므로 영은 예수를 창조하고, 예수는 영을 보내는 2중 관계가 성립한다. 혹은 영은 승귀한 그리스도의 행동이고 또 예수의 아들됨으로 가능해진 하나님의 별도 행동이라고 베르크호프는 말한다(CG. 346). 이 행동 혹은 역사적 세력으로서 영은 우리를 이끌어 새 무리를 이루게 하고, 그리스도를 닮게 한다고 한다(Ibid).
베르크호프는 첫째로 전통적 공교회의 삼위일체를 영원에서의 일이 아니라 시간내에서의 하나의 언약관계라고 하므로, 영을 인격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전통적 의미의 역사적 부활이 아니므로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영이 하나의 인격이 아니고 예수의 정신이고, 감화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가장 충실하게 베르크호프는 발트의 신학을 재현하고 있다고 믿는다.
20세기 오순절 운동이 전 세계적이 된 이후 성령에 관하여 가장 조직적인 연구를 한 신학자는 독일 파덴보른(Paderborn)의 신학부에서 교의학을 가르치는 로마교회의 헤리베르트 뮐렌(Herbert M hlen)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현대 사회가 사회화(社會化 Sozialization)를 이루므로 과거 신학이 출발점으로 삼은 창조신학 혹은 '자연'은 지금의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한다{Herbert M hlen, Sozial Geisterfabrung als Antriort auf eine einseitige Gottes lehre, in : Erfahrung und Theologie des Heiligen feisks, Hisg. von claus Heitmann und Herbert M hlen (Hamburg : Afentur des Rauhen Hauses, 1974, 253)}. 여기서는 뮐렌이 편집한 '성령의 경험과 신학'이란 책에 실린 그의 글 '일방적 신론에 대한 답으로서 사회적 영 경험'(pp. 253-272)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렇게 사회화(社會化)된 현대 공업사회에서 신학은 사회성(社會性) 즉 우리(Wr)를 나타내는 영(Pneuma)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나타난 아버지와 아들의 자기 수여 행동으로서, 신적 우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회성은 '나'와 '너'가 우리로 결합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뮐렌에 의하면 신론은 모든 세대에 있어서 일정한 자기 경험과 세계 경험을 포함하는데,饔기술 공업사회에서 창조 신학 즉 포괄적 의미의 자연과 합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사회화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op. cit., 253). 20세기 중반은 농업 문화에서 공업 문화에로 이월하여 인류 역사에 신기원을 도입하였으므로...
(이하 미완성)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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