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omi 2006. 12. 28. 06:53
출처 블로그 > 신학
원본 http://blog.naver.com/pleeq/80022117983

많은 사람들이 성화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성화의 본질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성화와 선행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성화: 거룩하게 되는 것.  선행: 착한 행실. 조금만 유심히 살펴 보아도 성화와 선행은 전혀 다른 개념인데도 불구하고 의외로 선행과 성화를 구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성화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은 너무나 명확하게 성화를 정의하고 있다.

 

문35. 성화가 무엇인가?

 

답: 성화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사역인데,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전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되어 점점 더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는 살게 된다.

 

이 교리문답은 성화에 대한 여러가지 잘못 된 오해들을 제거해 준다. 먼저, 성화는 칭의의 결과가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칭의와 성화사이에는 어떤 인과관계, 심지어 논리적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성화는 본성 변화이지 어떤 행위가 아니다. 따라서, 성화는 선행이 아니다. 셋째, 성화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다. 따라서 칭의는 하나님의 사역이고 성화는 인간이 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 둘 다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다. 차이가 있다면, 칭의는 우리 밖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사역이고, 성화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사역일 뿐이다.

 

칭의는 우리 밖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 되는 것이라면, 성화는 우리 안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전인을 변화시키시는 것이다. 이 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칭의와 성화의 구분은 은혜가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방식의 차이에서 온다.  성화와 칭의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기 때문에 칭의와 성화는 어머니인, 하나님의 은혜가 낳은 쌍둥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한 가지(은혜)에서 나온 두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성화가 은혜의 사역이라면, 우리는 성화없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즉, 우리의 전인이 변화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개혁신학은 어떤 곳에서도 성화를 구원에 부차적인 것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성화는 우리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 말을 오해하여서, 선행도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다시 말하지만, 성화와 선행은 이 점에서 구분되어야 한다. 성화는 우리의 심성에 관한 것이고, 선행은 우리의 행위에 관한 것이다.

 

선행은 칭의와 성화, 모두의 결과이다. 성화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지만, 선행없이는 구원받을 수 있다. 유아로 죽은 수 많은 영혼 중 선택 받은 이들은 어떤 행위도 없이 구원을 받았다.  또한,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예도 있다. 그는 예수를 믿고 구주로 고백하였다. 그 순간 그는 은혜의 사역으로 그의 전인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는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에 어떤 선행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원을 받았다. 성화가 구원에 필수적이지만, 선행이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이다.

 

성화와 관련되어 선행이라고 할 때, 우리는 조심할 것이 하나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선행은 막연한 도덕적 선행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선행은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때로는 불신자들이 신자보다 훨씬 나은 선행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선행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선행인가라는 것이다.

 

어떤 선행이 하나님께 받으실 만할 것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할까? 먼저 그 사람 자체가 선해야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성화는 은혜의 역사이다. 하나님이 성도의 선행을 받으시는 이유는 우리의 행위 그 자체가 예뻐서가 아니라, 바로 은혜의 역사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아무리 우리의 행위가 성화의 결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 선행 역시 죄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어떤 선행도, 그것이 비록 성화의 열매로 맺어진 것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칭의의 은혜이다. 즉,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그 선행을 기쁘게 받아들이신다.  그렇다면, 선행은 성화와 칭의, 모두의 결과이지 어느 한 쪽의 결과가 아니다.

 

선행이 구원에 필수적이 아니라는 주장이 선행을 무시하게 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개혁신학은 선행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선행을 제자리에 위치시킨다. 선행은 신자들의 삶에 관한 문제이다. 그 삶은 감사의 삶,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개혁신학이 신자들의 삶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선행이 구원에 필수적인 아니니까, 선행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구원만이 최고로 중요하고 나머지는 별 볼일 없다고 주장하는 구원 지상주의가 낳은 비극이다. 개혁신학은 선행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문제는 어떻게 중요한가일 뿐이다.  선행이 구원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중요한가? 아니면,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에 중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