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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baromi 2006. 12. 27. 17:26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사도행전은 “성령세례 논쟁”을 위한 책인가? Nein! 사도행전의 주된 가르침은 행 1:8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사도행전은 “선교를 위한 주권적인 성령의 역사의 진행”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놓칠 수 없다. 주권적인 성령의 역사는 행 1:8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는 표현을 유의하여 볼 때 그 핵심이 드러난다. 성령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임하셨고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임하신다. 이것은 “오순절의 단회성”을 부정하는 발언이 아니라, 주권적인 성령의 역사의 진행을 언급함과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 역시도 1세기 당시의 사도들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증인은 순교자를 뜻한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그것을 이루려 함에는 나의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하였던 바울, 우리는 그가 같던 길을 가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도들이 섬겼던 성령님과 동일한 성령님을 섬기고 있다.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우리는 사도행전을 대하면서 바로 이 점-주권적인 성령의 역사가 오늘도 진행되고 있으며, 그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을 놓칠 수 없다. 주권적인 성령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 사도들은 주는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였다.


그러나 “주권적인 성령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핵심일지라도 오늘날의 현실적인 논쟁을 간과하고 넘어가서도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소위 “성령세례 논쟁”이다. 이 논쟁은 개혁주의자와 은사주의자들의 첨예한 논쟁이기도 하다. 은사주의자들은 소위 “제2의 축복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개혁주의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은사주의자들의 그러한 주장들에 대해서 마귀 짓이라고까지 혹평하는 이들도 있는 듯 하다. 개혁주의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그렇게까지 혹평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성경계시의 종결에 대한 신앙고백”을 견지하려는 것으로 추측해 본다. 그러나, 아무리 개혁주의자들이 가상한 이유와 동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분열을 조장한다면 그것은 잘못일 것이다. 은사주의에 대한 부정적 기여와 더불어 긍정적 기여도 같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은사주의가 끼친 부정적 기여는 상당하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체험 또는 은사체험을 통해서 (관념적이 아니라) “체험적인 신앙”을 추구했다는 것만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여긴다. 본인은 방언을 할 줄 모른다. 또한 본인은 은사주의가 그리스도 교회에 끼친 긍정적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적 측면이 더욱 크다고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축복설을 경계함과 동시에 분열을 조장하는 태도 또한 경계되어야 한다.


일단, 성령세례 논쟁에 끼어들게 되면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성령의 주권과 자유”와 더불어 “성경(계시)의 범위”에 대한 고려이다. 은사주의자들 중에 어떤 이들은 “개혁주의자들이 성령의 주권과 자유를 제한한다”고 종종 불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성령의 주권과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개혁주의는 하나님 중심 사상으로서 “하나님 절대주권”을 강조한다. 성삼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것이요, 성령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성령님의 주권과 자유를 침해하고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성령의 주권과 자유와 더불어 성경계시의 범위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계시(특히, 성경)의존적 신앙과 신학”이다. 개혁주의는 성령의 주권과 더불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님은 그 주권을 행사하심에 있어 성경의 권위를 침해하고 무너뜨리면서까지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개혁주의는 성삼위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계시의존적 신학임을 분명히 하고 나서야 비로소 성령세례 논쟁에 본격적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1.고전적 오순절 신학과 신오순절 신학의 차이

중생 후 성령세례의 도식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선 양자가 동일하다. 중생 이후에 성령세례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제2의 축복”이다.


고전적 오순절 신학에서는 성령세례를 “도덕적 완전주의”로 이해하고 있다. 완전주의하면 웨슬리-웨슬리를 고전적 오순절 신학 안에 분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를 떠 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요한 웨슬리는 완전주의를 완전한 사랑의 영적인 능력을 받는 것으로 제한시켰다.1) 또한 일부 완전주의자들은 “제2의 축복”을 “고의적인 죄와 단절된 삶”과 연관시킨다. 고전적 오순절 신학이 성령세례를 “도덕적 완전주의”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완전성화를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여하튼, 고전적 오순절이 “도덕적 완전주의”를 성령세례와 연관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성화”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즉, 고전적 오순절에 있어서 성령세례는 중생 후 성령세례(제2의 축복)로서 성화의 개념과 연관성 속에 있다. 개혁주의자들의 이에 대한 반론은 완전주의-그것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완전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의적인 죄를 범하지 않는다 할지라도-에 대한 반론이다. 그 반론은 완전주의 신학에 나타나는 경향이 하나님의 율법의 엄격한 요구들을 감소시키거나 영적 성취에 대한 개인의 인식을 부풀리고 있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자기가 죄 없이 살고 있다는 확신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면밀히 검사하기를 피하거나 자신의 행위를 면밀하고도 정직하게 검사하기를 피하고 있다는 것이다.2) 


반면, 고전적 오순절 신학과는 달리 신오순절주의 소위 은사주의 신학에서는 중생 후 성령세례 도식에 있어서 성령세례를 능력을 받는 것이나 사역을 위한 은사를 받는다는 개념과 연관시키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신약성경보다는 구약성경에 더 유사한 견해를 전달하고 있다.3) 고전적 오순절을 제1의 물결이라고 한다면, 신오순절 주의 소위 은사운동은 제2의 물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방언은 (중생 후) 성령세례의 외적 표징이 된다. 제3의 물결은 소위 빈야드 운동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여기서는 치유가 방언을 대신한다.4)          


2.중생 후 성령세례, 정당한 주장인가?

성경 특히 사도행전은 중생 후 성령세례를 주장하는가? 은사주의자들 중에는 성령의 중생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으로의 세례 소위 성령세례를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은 세례자에 따른 구분이다. 중생에 있어서 세례자는 성령님이시지만 성령세례에 있어서 세례자는 오순절에 승천하신 그리고 성령세례를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먼저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성령에 의한(by) 그리고 성령의(of) 세례(중생 시)가 있으며 성령 안에서(in) 그리고 성령으로(with)의 세례(중생 후에 일어나는)가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 “안에서” 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는 않는다.5) 중생 후 성령세례라는 도식에 있어서 성령세례는 성령으로의 세례를 말하는 것으로 성령의 중생 사역과 성령으로의 세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중생과 성령세례가 불일치함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 중생 후 성령세례”의 도식을 갖게 된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구절은 일곱 구절로서 마3:11, 막1:18, 눅3:16, 요1:33, 행1:5, 11:16, 고전12:13이 있다.


사도행전에서 중생 후 성령세례의 견해를 지지한다고 여겨지는 논쟁적인 본문은 행2:1~13의 120명의 그룹과 행2:38의 3000명의 그룹, 행 8장의 사마리아 사건, (독특하긴 하지만) 행 9:1~18의 바울의 극적인 회심(이 경우에는 그의 회심과 성령 충만 사이에 삼일간의 간격이 있다), 행10장의 고넬료 사건, 행19장의 에베소 사건이 그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은 이 본문들을 근거로 중생 후 성령세례의 견해를 주장한다. 그들은 사도시대 때 초대교회 때 역사하셨던 성령님께서 오늘날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고 주장한다.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이 경우들이 오늘날의 성도의 경험에 있어서 모델이 된다고 여기고 있다. 따라서, 중생 이후 성령세례를 체험해야 하며, 외적 표지로서 방언 등의 사역을 위한 은사나 능력을 체험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는가? 이 모든 경우들(행2,8,9,10,19장)은 아주 독특한 경우들이다. 이 경우들에 있어서는 중생 후 성령세례를 성경이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이 오늘날에 있어서도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 예외적인 특수한 경험들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의 사도시대였으며, 신약교회-구약도 교회라고 볼 수 있다면-가 오순절 성령강림과 더불어 이제 막 태동하는 시기였으며,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 특히 사마리아와 그리스·로마인 등에게로 확장되고 있었던 시기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사도들의 신앙과 일치된 신앙을 위해서라도 중생 후 성령세례와 그 외적 표징들(특히, 예언과 방언 그리고 신유 등)이 필요한 시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2,8,10,19장 등 은사주의자들이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있어서도 표준적인 “중생 후 성령세례”의 견해를 주장하기 위해 제시된 본문들은 사실상 타당성이 없는 예외적이고 특수한 체험들을 기록한 본문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본문들이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 본문들이 예외적이고 특수한 시대상황 속에서 기록된 것이기에 오늘날의 신자들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사도행전 기록된 본문들은 성령의 주권적 사역이 복음의 확장이라는 결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도들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신다. 이 점만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오늘날도 여전히 그의 주권적인 역사 가운데 그의 사람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계신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중생 후 성령세례를 오늘날의 성도들의 경험으로까지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것은 오늘날이 성경이 완성된 사도시대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중생 후 성령세례라는 도식은 두 수준의 그리스도인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세례를 체험한 그리스도인들과 체험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 이미 중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세례를 체험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있게 된다. 성령세례를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소위 제2의 축복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로서 성령세례를 체험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 보다도 좀 더 높은 수준과 우월의식 속에 있게 된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주재권 구원 논쟁과도 일맥상통한다. 주재권 구원(Lordship Salvation) 논쟁에서는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영적인 그리스도인을 구별한다. 이미 거듭난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고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육적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말한다. 그 보다 높은 수준의 단계에 있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들로서 영적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육적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육적이라는 용어와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로서 중생과 더불어 성화의 삶이 시작된 그리고 성화의 삶을 살아내어야 할 영적 그리스도인 곧 신령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의 신령한 비밀 곧 십자가의 비밀을 아는 신령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성령께서는 성도의 삶 가운데 십자가와 분리된 자기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십자가를 밝히 보이시고 증거 하신다. 십자가의 진리를 아는 자들은 결코 자기 의를 추구하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내 버려두시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피를 주고 사신 자들을 성령께서 간섭하시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그리스도인들로서 성경의 진리에 따라 회심과 성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요구받고 있다. 두 수준의 그리스도인은 결코 있을 수 없다. 회개하는 그리스도인 하루 하루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고 있는 성화의 삶을 성령님의 인도 가운데 진행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은혜로 인하여 되는 삶이다. 두 수준의 그리스도인은 결단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우월의식도 있을 수 없다.(마찬가지로 열등의식도 있을 수 없다. 그런 의식이 있다면 회개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하셨던 그 성품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만이 있을 뿐이다.        


3.중생과 성령세례의 일치, 정당한 주장인가?

오순절과 신오순절이 중생 후 성령세례를 주장한다면 개혁주의는 중생과 성령세례가 일치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것은 정당한가? 중생과 성령세례는 항상 일치하는가? “항상”이라는 단어가 삽입되면, 곤란한 부분들이 생긴다. 오늘날의 성도가 구원의 실재를 경험하는데 있어서 중생과 성령세례는 일치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것은 고전 12:13을 근거로 한다. 행2:38의 3000명의 그룹도 참고해 볼만하다. 그 본문은 회심 시 성령세례(또는 성령의 선물) 받는 것을 말하고 있다. 회심은 중생과 동전의 양면이다.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논리적인 순서 제시로 볼 때, 중생이 회심에 선행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성경적이며 개혁주의적인 발언이다. 중생은 회심(회개와 믿음)에 선행한다. 그러나 중생과 회심은 동전의 양면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여하튼 중생(회심)과 성령세례는 일치한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음을 성경이 보여 주고 있다. 사도 시대 당시에는 예외적이고 특수한 경우들이 있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이 예외적이고 특수한 경험들 즉 중생 후 성령세례는 적용될 수 있는가? 오늘날에도 사도시대와 유사한 정황이 있지 아니한가? 예를 들자면 선교 현장과도 같은 곳을 들 수 있겠다. 그곳은 성경이 들어가지 않은 곳일 수가 있다. 우리는 이미 성경계시가 종결된 시대 가운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지의 상황은 다르다. 그렇다곳해서 마구잡이로 중생 후 성령세례의 도식을 주장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후 1세기의 상황과 유사한 상황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는 중생과 성령세례가 일치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고 본다. 이 말은 주후 1세기에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은 (비록 중생과 성령세례가 일치한다는 개혁주의의 주장이 대부분 옳은 것이어도) 함부로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예외적인 부분을 고려할 수 있는 여지 정도는 남겨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물론, 중생과 성령세례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개혁주의적인 견해가 더욱 성경적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발언이 성경계시 종결에 대한 우리의 고백의 타당성을 허무는 것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은사주의에 한 층 더 발전, 심화되어 신비주의로까지 나아가는 극단적인 경향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4.선교를 위한 주권적인 성령의 역사  

중생 후 성령세례의 견해 즉 중생과 성령세례가 불일치한다는 주장 보다는 중생과 성령세례가 일치한다는 주장이 더욱 성경적인 듯 보인다. 오늘날은 사도시대의 상황과는 분명히 다르다. 성령님께서는 자유롭게 일하시지만 시대를 경영하시는 방식에 있어서는 반드시 차이가 있을 것이다.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의 시대를 경영하시는 방식-이것은 그분의 성품이 불변한다는 교리와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이 달랐듯이, 성경이 기록되고 있는 과정 중에 있는 상황과 성경이 기록된 이후의 상황은 또한 다르다. 그분의 경륜에 있어서도 그러하거니와 성경도 중생과 성령세례의 일치를 주장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중생과 성령세례의 일치를 주장함에 있어서 성령세례(성령론)를 구원론적 차원에서 중생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 뿐 아니라, 교회론적 차원 그리고 종말론적 더 나아가 (특히) 선교론적 차원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것이 더욱 타당한 듯 보인다. 사실, 사도행전의 본래 강조하는 바도 중생과 성령세례의 일치·불일치 논쟁을 해결하는데 있다기 보다는 복음의 확장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행1:8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지상명령이며, 선교명령이다. 그것은 성령세례 논쟁 보다도 더욱 주목해야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이다. 행1;8은 선교를 위한 주권적인 성령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선교를 위한 주권적인 성령의 역사는 사도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다! 사도들의 선포는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해당되는 진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혼란한 세상 가운데 유일한 길이다!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는 성경의 진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하고 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전해야만 한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진리를 드러내어야 한다. 사도행전은 성령세례 논쟁을 위한 책이 아니다. 물론, 성령세례 논쟁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거짓을 드러내기 위해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성령세례 논쟁을 위한 책이기 이전에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가 어떻게 드러났는가(또한 우리 삶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일이 있다. 그리고 이제도 우리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신 일들이 있다. 그분은 지금도 여전히 일하신다. 또한 하나님이 일하시니 우리도 일한다.  


5.성령의 역사의 외적 현상 및 거짓된 기적

어떤 이들은 예언과 방언이 중지되었다는 “은사중지론”을 펴고 있다. 물론, 계시를 가져다 주는 예언과 방언은 성경계시 종결을 부정함으로 크게 그릇된 것이지만, 모든 방언을 비이성적 발성화로 치부해도 좋은 것인지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루터와 칼빈은 방언을 선교사의 설교와 연결시켰다고 추정되며, 웨슬리도 방언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말했다.6) 방언이 비이성적 발성화일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그러나, 아닐 가능성도 있다. 우리는 방언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 있어서 단정 짓는 태도를 피해야만 한다. 두 가지 가능성 모두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난제이다. 방언을 개인의 유익만을 위한 것으로 보기 보다는 선교와의 연관성 속에서 보는 것은 어떨까? 주후 1세기의 상황 속에서 방언이 가능했다면 그와 유사한 선교지의 상황에서 방언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인가? 물론, 이 문제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 모든 기적적인 현상들이 진리에 입각한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그러나 방언에 대한 지나친 경직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 아닌가? 성령세례를 구원론(중생)적 차원과 연결시켜서 이해할 뿐 아니라 선교론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면 방언도 그와 같이 이해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방언이 개인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자 개인의 유익은 교회의 건덕과 분리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중생(성령세례)를 회심과 성화를 포함한 광의의 의미에서 이해하였던 칼빈이 문득 생각난다. 성령세례는 그렇게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좁은 의미에서도 넓은 의미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구원론 뿐만 아니라 교회론, 종말론, 선교론적 차원에서도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중생과 성령세례의 일치여부를 논한다면, 이왕에 논해야 한다면 성령세례와 교회론, 종말론, 선교론적 차원도 함께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방언도 마찬가지로 이해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성도 개인의 유익과 교회의 건덕의 차원에서...


신유의 문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일차적으로 신유는 “주권적인 기도응답”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오늘날은 사도시대의 상황과 다르다. 그러나 또한 사도시대와 유사한 상황들에 대해서 까지 연장하여 신유의 문제를 논의한다면 신유의 은사가 없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중생과 성령세례의 일치여부도 문제이지만 더욱 어려운 난제는 성령세례 논쟁 보다도 성령은사론인 듯 보인다. 이 문제에 있어서 개혁주의와 은사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이 문제들과 관련하여 제2의 축복설을 경계하는 가운데 어떻게 분열을 막고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성령세례, 성령은사론, 성령충만, 성령의 열매, (성령의 위격, 구약의 성령은사 등등)

  



        

                 


1) R. C. 스프룰, 성령의 신비 p.132참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결혼식에서 자주 사용되는 “완전한 사랑”(O Perfect Love)이라는 찬송가는 원래 웨슬리의 성화 교리의 표현에 기원을 둔 것이었다.


2) 위의 책, p.133


3) 위의 책, p.141


4) 유해무, 개혁교의학 p.418 참고/ 제1의 물결은 금세기 초의 오순절 운동이요, 제2의 물결은 60~70년대에 로마교를 포함한 초교파적인 은사운동이라 하겠다. 제1.2물결은 성령세례에 방언이 필수적이라고 보는데 반해, 제2의 영향을 받은 제3의 물결 추종자들은 치유가 필수적이라 한다.


5) R. C. 스프룰, 성령의 신비 p.134


6) 위의 책, p.139/ 위대한 성도들이 방언의 문제를 무시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루터와 칼빈은 방언을 선교사의 설교와 연결시켰던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 은사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말했다. 웨슬리도 방언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력적인 믿음의 사람들이 직접 방언을 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열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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