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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언약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시리즈 칼럼 (1-14, 부록 2개 포함)

baromi 2006. 12. 20. 21:43

 

 


* 본 연재 칼럼은 런던 양무리 교회의 주보에 게재된 것을 모은 것입니다.



“언약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시리즈 칼럼



                                                                                                             Horace  목사



언약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1)

언약은 관계입니다


     저의 목회에 세가지 주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회심이요, 둘째는, 문화요, 그 세 번째가 언약입니다. 이 세가지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는 것이 저의 칼빈주의,개혁주의신학과 신앙적 고백입니다. 특별히 이 언약의 개념은, 회심과 문화를 매개하면서 그 두 가지 개념을 더욱 풍성하게 보충해 줍니다. 회심만을 강조하게 되면, 자칫 그것은 개인주의화 되기 쉽습니다. 문화만을 강조하게 되면, 자칫 그것은, 집단주의 혹은 관념주의 속에서 개인의 의미가 희석되어 버리기 쉽게 합니다. 회심에 대한 강조가 개인주의에 빠지는 것을 막고, 문화에 대한 강조가 집단주의와 관념주의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언약에 대한 강조입니다.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언약이라는 주제는, 언약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언약이라는 우산 아래에 오히려 회심과 문화라는 주제를 소개하는 것이 제격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그만큼 언약사상은 포괄적이고 심오합니다. 지금까지 강조해 왔던 회심이 불교적, 유교적 회심과는 다른, 기독교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그런 회심이었고, 문화도 또한 그런 것이었습니다. 실상, 그런 차이가 가능한 것은, 언약이라는 개념이 순전히 기독교적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언약’개념이 강조되고 있지 않습니다.

     2006년도를 준비하면서 저는 이 언약사상을 목회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묵상해 왔습니다. 어쩌면 이 언약이라는 개념이 신학적으로는 논의가 되어져도 기독교인의 일상생활속에서는 왠지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 언약이라는 성경적 개념을 목회적 차원에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 언약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첫설교부터 언약과 관련된 설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설명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한 두번의 설교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칼럼으로도 조금씩 이것을 설명하려고 계획했습니다. 몇 회 정도로 끝나게 될 지를 예상하지 않은 채로 이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오늘은, “언약은 관계”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관계를 맺게 되는 두 실체들의 사이에 존재하는 그 관계의 양상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이 언약입니다. 나라는 존재와 나 아닌 존재 사이에 가지게 되는 여러 가지 관계의 양상들 중에서 언약이라는 양상(modality)이 있다는 것입니다. 언약은 무엇보다도 나와 “관계”된 그 무엇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언약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이렇게 나와 관계된 무엇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된 관계들을 예를 들자면 나와 아버지, 나와 어머니, 나의 아내, 나의 남편, 혹은 나와 친구, 나와 세상, 나와 물질, 나와 하나님 등의 관계들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언약을 이렇게 나라는 관점에서부터 설명하는 것을 어떤 분들은 나중심적인 사고방식에 타협했다고 비평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를 시작할 때 바로 이 나에 대한 지식에 대한 관심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 종국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언약이 나와 관계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이 언약이라는 개념을 관념적이거나 피상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매일같이 밥을 먹고 호흡을 하는 것과 같이 꼭 그것같이 아니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바로 이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밥이 밥이 되려면, 그것이 나와 관계되어야 합니다. 나의 생물학적 요소로서의 몸에 영양을 제공해주거나 나의 혀의 미각에 즐거움을 제공해주는 관계가 전제되어야, 밥이 밥일 수가 있습니다. 호흡하게 되는 공기도 나의 존재에 그렇게 전제되어야, 호흡한다는 것이 의미있게 됩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밥을 먹는 것, 호흡하는 것과도 같이 나에게 아주 그리고 너무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와 문화에 밀접하게 연관된 언어에 대해서도 이 언약과 관계해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이 언약과 더불어서 하나님과 세계경영을 관련시켜 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언약은 참으로 나의 “밥”이요, 나의 “피”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나에서 우리로 관심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계획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새해는 이 언약의 하나님과 더불어 참으로 복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언약의 하나님,우리의 하나님(2)

언약신학에 언약이 없다(I)

     언약은 관계라고 하였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이 운행하도록 허락하신 그 존재의 법칙이다. 빛이 빛으로서 존재하는 법칙이며, 해와 달과 별이 운행하는 법칙이며, 또한 모든 생물들이 그 생명의 호흡을 보존하고 번식하는 법칙이다. 이런 자연법칙으로서의 언약개념을 전제하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이 고려되어야 한다. 인간이 이런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법칙 안에 있을 때의 법칙을 “생의 법칙으로서의 언약”(the covenant as a law of life)이라고 한다. 이 언약이 바로 “자연법칙으로서의 언약”(the covenant as a law of nature)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이 “자연법칙으로서의 언약”과 “생의 법칙으로서의 언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로 소위 “언약신학”이란 것이 개진될 때에 많은 오해가 생기게 된다. 그것을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오늘은, 이 점과 관련해서, 언약이 관계로되, 어떤 관계냐는 것을 살펴보자. 어떤 사람들은, 인간 외의 자연(특히 동물)이, 인간과는 전혀 무관한 채로 “스스로”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모든 존재는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각각 잘못된 주장들을 하기 때문이다. 1997년도 영국의 리버풀대학에서 있었던 토론이 이런 주장들을 드러낸다. S.R.L.Clark교수는 만물들이 “만물 자신을 위해서”(for their own sake) 존재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J.Goldingay교수는 모든 만물이 “인간을 위해서”(for our sake) 존재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한다(M.J.Cartledge et al. ed., Covenant Theology:Contemporary Approaches, London: Paternoster Press, 2001). 이런 주장은 각각 옳게 강조하는 면들이 있지만, 참으로 중요한 면들을 잊어버리고 있다. 현대의 언약신학이 잘못 흘러가고 있는 특징들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만물 자신만을 위해서도 아니고, 인간만을 위해서도 아니고,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임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깊은 심해에서 인간세계에서 발견되지도 않은 채로 수천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번식과 보존을 거듭해 온 생물들이 어떻게 인간을 위해서 존재해 왔다고 할 수 있는가? 지구와 관계없이 은하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별들이 어떻게 인간만을 위해서 했다고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또한, 바울사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밭을 가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이 어찌 하나님께서 소를 위하여 염려하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고전9:9) 바로 우리를 위해서 주신 율법이라는 것이 바울사도의 논지이다.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만물 자체만으로도 존재하고, 또한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면서, 그것이 모두 옳은 수 있는 것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인식의 틀 안에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시편기자가 외쳤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여호와의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14). 바울사도가 또한 선포하지 않았는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20).

     언약이 이렇게 자연법칙으로서의 언약임을 전제하게 될 때, 성경을 빙자하여, 과도한 채식주의를 주장할 수 없다. 또한 성경을 빙자하여, 자연을 인간의 욕구대로 훼손하는 방자한 논리도 설 자리가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동물을 인간의 음식으로 사용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맡겨진 자연과 만물을 겸허하게 맡아 관리하는 자세가 요청되는 것이다. 이런 자세들이 모두가 성경적인 언약신학에서 파생되어 나온다. 무엇보다도 언약신학이 재정립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이런 아주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려할 때에 제기되는 것이다.

     놀랍게도, 언약신학의 “언약”이라는 말 자체가 바로 이 점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글, 혹은 한자어로서의  ‘언약’이라는 말 자체가 전혀 언약신학의 중심적, 곧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는 그 목적”에 못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한글에서의 “언약”이나, “약속”이라는 용어만이 아니고, 영어권의 “Covenant”나 “Promise”라는 말 자체가 “언약”이라는 말로 번역되고 있는 성경의 “베리트”(구약성경의 ‘언약’을 나타내는 용어. 히브리어)나 “디아세케”(신약성경의 ‘언약’을 나타내는 용어. 헬라어)라는 말의 의미를 담기에는 모두 함량미달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흔히들 사용하고 있는 구약(Old Testament), 혹은 신약(New Testament)이라고 할 때의 이  “Testament”(유언)라는 말 또한 함량미달이다. 언약은 관계로되,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주권적 언약관계임을 제대로 강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용어상의 문제점들에 대해서 다음 주일 살펴보기로 하자. 




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부록1)

언약신학에서 사용되는 주요 용어들

               - 약속, 계약, 언약 등과 그 관련어들

     언약신학을 다루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자주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을 잘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먼저, 1)“언약”(言約)이라는 용어들부터 살펴보면서 이 질문의 의미를 살펴보자. “언약”(言約)이라는 한글은 말씀 言, 맺을(묶을) 約이다. ‘말(씀으)로 맺어진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이 “언약”(言約)이라는 말은, “약속”(約束)이라는 말에 ‘말’(言)이라는 말을 덧붙였다가(“言約束”), “束”이라는 말을 탈락시킨 형태의 말이다. 2) “약속”(約束)이란, “어떤 일에 대하여 어떻게 하기로 미리 정해 놓고 서로 어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것”(동아출판사, 새국어사전)인데, 이것에 “말”(말하여지거나 쓰여진, spoken or written)의 요소를 강조하는 것이 “언약”이다. 결국 한글에 있어서, “언약”이란 “약속”이다. 3) 이런 맥락에서 함께 살펴보아야 할 말이 바로 “계약”(契約)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서약 契, 맺을(혹은 묶을) 約이 합해진 말인데, 여기서 契라는 말은, 풀잎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에 칼(刀)이 놓여져 있는데, 큰 大자가 그 아래에 놓여져 있어서, 전체적으로 보자면, 풀잎을 칼로 크게 자르는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契約”이라는 말은, “풀잎을 칼로 크게 잘라서 묶어 놓는 것”이란 의미를 갖게 된다.  

     여기서 공통적인 요소는 바로 “약”(約)이란 개념이다. 이 “約”이란 말은, 실 絲와 구기 勺(작, 혹은 약으로 발음함)의 합성어이다. 실로 어떤 국자 같은 구기를 묶은 형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김선달이 허리춤에 국자를 달랑달랑 매고 다니는 모습을 연상해 보라. 그렇게 실로 달려있는 국자의 모습이 “약”이고, 그렇게 묶여 있는(束, binding) 상태에 놓여있게 하는 것이 바로 “약속”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렇게 서로가 묶여 있는 상태이다. “約속”, “언約”, “계約”이라는 말 모두가 그 각각의 상대방들이 서로 묶여 있는 상호성을 강조하고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 용어들이 사용되는 일반적인 용례들은 어떠한가? 일반인들의 일상적인 생활대화에서 사용되는 것이 “약속”이다. “오늘 갑돌이와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하지, “오늘 갑돌이와 만나기로 언약했다”거나 “오늘 갑돌이와 만나기로 계약했다”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서, “계약”이라는 말은, 무언가 법정적이고 법률적인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다. 집매매계약문서, 사회계약론 등과 같은 용례가 그것이다. 단순한 일상생활의 “약속”이 아니라, 그 약속을 법률적으로 구속력을 가질 수 있도록 공식화시키는 것이 “계약”이다. 그렇다면, “언약”이란 말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언약”이란 말은, 기독교적 용어이다. 성경에서 개진되고 있는 “약속”에 대한 독특한 이해를 표현하기 위해서, 성경 자체에서 사용하고 있는 독특한 용어[“베리트”(구약성경에서 사용)와 “디아세케”(신약성경에서 사용)]를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용어인 셈이다.

     그렇다면, “베리트”라는 말과 “디아세케”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들일까? 그것을 물어보기 전에, 우리는, “약속”, “계약”, “언약” 등으로 번역되는, 영어를 살펴보기로 하자. “언약”은 “covenant”, “약속”은 “promise”라는 말로, “계약”이라는 말은, “contract”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1) promise라는 말은, pro와 mise의 합성어이다. Pro는 “앞으로”라는 뜻이고, mise(mittere라는 라틴어의 변형)라는 말은, mission(파송, 선교)이라는 말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보낸다”(send)라는 뜻이다. 곧, promise라는 말은, “앞으로 내어 보낸다”는 뜻이다. 곧, “미리 앞서서 내어 보내는 그 무엇”이 promise라는 것이다. 이 말은 상호적인 의미보다는, 미래적이며 선행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2) “계약”으로 일반적으로 번역되고 있는 contract라는 말은, con(함께)+trahere(끌어내다, draw)에서 온 말이다. “함께 끌어내온 그 무엇”을 의미한다. 곧 상호협정(mutual agreement)을 의미한다. “언약”이라는 한글로 번역되고 있는, Covenant라는 영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3) Covenant라는 말은 이전에는 convenant라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그 어원이 convene(소집하다, 회집하다)는 뜻에서 온 것임을 보여준다. 이 convene이라는 말은, con(함께)+venire(오다, come)이란 말의 합성어이다. “함께 와서 회의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 셈이다. 곧, covenant라는 말이 상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결국, 동의나 합의(agreement)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이 말이다.

     실제로, 이런 한글이나 영어권에서 사용되고 있는 “약속”, “계약”, “언약”, promise, contrace, covenant라는 말들은,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베리트”(구약에서), “디아세케”(신약에서)라는 말의 어떤 면(곧, 상호적인 동의의 면)만을 말하고 있을 뿐, 그 용어(“베리트”와 “디아세케”)의 의미의 진짜 핵심을 담지 못하고 있다. 이 “베리트”와 “디아세케”라는 말은, 당사자들간의 상호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할 의미는, 당사자들 중의 어느 한 쪽의 주권적이고 우선적인 주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1) “디아세케”라는 말에 대해서 살펴보자. “디아세케”라는 말은 명사인데, 그 동사형태는 “디아티세스싸이”이다. 이 동사는, 일반적으로 “자신을 위하여 처분하다(혹은 배열하다)”(to dispose for one’s self)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dispose라는 말은, “처분하다”는 뜻도 되고, “배열하다”는 의미도 갖는다. Dis(떼어낸, apart, asunder, or seperately의 의미를 가짐) + poser(장소, place)의 합성어인 이 단어는, “떼어내어서 장소를 정리하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게 한다. “떼어내어서 장소를 정리하는 것”에서 “처분하다”는 의미만 아니라, “배열하다”는 의미를 가지는 단어로 진화되는 것을 상상해 보는 것은 그렇게 별로 어렵지 않다[여기서 언급하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이 dispose의 명사형인, disposition이라는 말이 비유적으로 사용되어서 “마음의 배열”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어서 결국 “기질”, “성향”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회심”이라는 것이 단순히 “마음의 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의 변화라는 것이 “어떤” 변화인지를 추측하게 해 주는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이 문제는 이 글의 본시리즈에서 좀 더 깊이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문제는, “자신을 위하여 처분하다”는 의미를 가진 “디아티세스싸이”라는 말이 두 가지의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단어로 발전해가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는, 상호결속력을 가지고 있는 법을 체결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과 동시에 또 다른 의미로는 죽음을 예상하고 자신의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는 의미, 곧 유언이나 상속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전자(곧, 상호결속력의 법체결)의 의미는, “협정체결”의 의미를 가진 라틴어의 pactum(이 단어는 영어의 compact) 혹은 foedus [이 단어는 영어의 federal이라는 말로 발전하게 되고, 이 말에서 “federal” theology(“연방”신학)이라는 말이 형성된다]를 가지는 말로 발전하며, 두번째 의미(곧, 유언상속)는 “유산” 혹은 “유언”이라는 뜻과 연관된, 라틴어의 testamentum>영어의 testament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어서 발전된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 단어의 공통의 뿌리가, “처분하다”(dispose)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협정”이든, “유언”이든, 그 협정의 어느 한쪽 편이나, 유언을 하는 사람의 주권적이며 주도적인 성격을 암시적으로 전제한다. 이것을 전제하지 않고, 성경의 “디아세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이라는 말로 번역되고 있는 “Bible”, “Scriptures”, “testament”라는 말의 유래들도 짚고 넘어가자. 잘 아는 것처럼, Bible이라는 말은, papyrus(파피루스, 그 위에 글을 쓸 수 있도록 갈대잎을 얇게 펼쳐서 서로 엮어놓은 것)는 말을 그리스 사람들이 번역한 biblos나 bublos에서 온 말이다. 이것에 반해서, scripture라는 말은, “쓰다”(write)는 뜻을 가진 라틴어 scrite에서 온 말이다. 일반적으로 영어권에서는, Bible이라고 하지, 복수형태의 Bibles라고 쓰지 않는 반면, Scriptures는 66권 성경의 각권을 염두에 두면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Scripture라고 단수형태로 쓰는 경우는, 66권의 성경 중의 어느 한 권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기 때문에, Scriptures라는 복수형태는, 66권의 각권을 염두에 둔 표현인 셈이다. 이것에 비해서, Bible이라는 말은, 성경66권의 각 권을 염두에 두기 보다는 성경 66권을 전체적으로 염두하면서 사용하는 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testament라는 말을 사용해서, 성경의 두 부분인, “구약”과 “신약”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testament는 “유언”의 의미인데, 과연 성경의 “구약”과 “신약”이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의문은, 성경의 “디아세케”라는 말이 “유언”이라는 의미를 가진 채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9:16 등에서 사용된 예가 “디아세케”가 “유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수많은 부분(너무 많아서 일일이 옮기는 것이 힘들 정도이다)에서 “디아세케”는 “유언”이라는 의미로는 번역할 수 없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다. 이 히브리서9:16에서의 “디아세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예상하면서 한 약속의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유언”으로 번역될 수 있다. 하지만, “디아세케”라는 말은, “유언”이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는 의미보다는 더욱 광범위한 상황을 전제한다. 만일,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 그 분의 “유언”으로서 이 “디아세케”를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디아세케”를 “하나님의 유언”이라고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죽으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디아세케는 “유언” 그 이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베리트”와 “디아세케”를 강조하는 표현인, “구약”(Old 베리트), “신약”(New 디아세케)라는 말들을, 각각 Old Testament나 New Testament로 번역하는 것은 적당치가 못하다. 영어사용이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글번역어인, “성經”과 “성書”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일반적으로 “성경”이라는 말은 보수적 진영에서, “성서”라는 말은 진보적인 진영에서 선호하는 말들이다. “성서”라는 말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사서삼경”이라는 용어가 정착된 것을 고려해서, “삼경”이라는 말보다도 “사서”라는 말이 앞에 나오기 때문에, “성경”이라는 말보다는 “성서”라는 말이 더욱 우선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성급하다고 하는 것은, “사서삼경”이라는 어휘가 정착된 싯점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왜 “삼經사書”가 아니고, “사書삼經”이라고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삼경”이 중요한가? “사서”가 더 중요한가? 어느 쪽을 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따라서 그 어느 쪽을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런 질문들은, 중국고대사상사에 대해서 좀 더 차분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단지, “삼경”(시경, 서경, 역경)이 “사서”(논어,대학,중용,맹자) 보다도 역사적으로 “더욱”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사서”는 공자나 공자의 제자들의 어록들이라고 한다면, “삼경”은 공자시대 훨씬 이전에부터 전승되어온 것을 공자가 수집하고 편집한 것이다. 그러니, “사서”를 “삼경”의 빛에서 읽느냐, “삼경”을 “사서”의 빛에서 읽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해석의 관점을 설정하는 것이며, 또한, “삼경” 자체에 대한 해석도 공자의 편집에 공자 자신의 관점이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공자가 수집, 편집했다는 말이 정말이라면!), 이 “사서삼경”의 해석에는 해석학적 관찰이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사서삼경”의 “사서”라는 말이 먼저 나오기 때문에 “서”가 더욱 존중되는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성급한 결론이라는 것이 나의 요지이다. 오히려 “사서”라는 용어나 개념의 성립이나 기원에 대한 해석학적, 혹은 지식사회학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만 지적해 놓자.

     일반적인 측면에서, '經'이라는 글자가 처음 나타나고 있는 것은 금문(金文 : 西周時代 靑銅器인 鍾鼎)에서부터이다. 이 때의 '經'자는 '다스린다'(治)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이에 비하여 허신의 『설문해자』에 의하면, '經'자는 '직조에서 세로 실'(織, 從絲也)이라는 뜻이다. 곧, 사실상 날실(經)과 씨실(緯)은 서로 결합하여 온전한 베로 짜여지는 것이며 서로 보완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베를 짜는데서 날실은 고정되어 있고 씨실은 왕복운동을 한다는 점에서 날실(經)이 기준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곧 “經”이라는 말은 “기준”(canon)이라는 의미를 가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경”이 “사서”보다도 더욱 이전에 기록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이런 견해는 설득력이 있다. 고대의 것이 더욱 권위가 있다고 여겼던 태도를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되는 관찰이다. 이것에 비해서, “書”라는 말은, “대학”이라는 책이 주자에 의해서 “논어”, “중용”, “맹자”와 더불어서 송나라때 쯤(대략 AD 12C전후)에 “사서”로서 등재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유학에서의 그 권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권위가 후대에 성립된 것임을 고려할 때, “경”보다는 “권위가 덜한” 것임을 비교할 수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경전으로서의 Bible이나 Scriptures를 어떻게 번역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그렇게 푸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보인다].

   

     2) 구약성경의 “베리트”라는 말은, “비루트”(착꼬, 족쇄)는 말에서 왔다는 견해도 있지만, 고대근동의 언약을 맺는 의식의 관습에서 그 언약의 표증으로서 동물을 죽여서 두 쪽으로 갈라놓는 것과 관련해서 “자르다”는 뜻의 “바라”에서 왔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바라’라는 말에는, ‘자르다’라는 뜻만 아니라, ‘먹는다’는 의미도 있다. 언약을 맺는 당사자들끼리 그 언약의 증표로서 동물을 잘라서 함께 먹었던 관습과 연결되는 셈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언약을 맺는다는 말을 ‘언약을 자르다’(카라트 베리트, cut the covenant, 예: 창21:32)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성경의 맥락이다. 성경의 베리트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관계를 상호적으로 설정한다는 것보다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어떤 관계를 공식화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둠브렐, 언약과 창조,최우성역,26쪽).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려고 한다. 이 “베리트”라는 용어는, 그 베리트로 말미암아 어떤 관계가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 이전에 있던 관계를 전제하면서 그 관계를 공식화하고 구체화시킨다는 것이다. 그 이전의 관계를 공식화하고 구체화하는 절차가, 동물을 잘라서 함께 먹는 것이다. 공식화되고 구체화되는 그 관계가 비록 상호적인 것이 되는 경우에라도, 그 상호적인 관계가 수립되기 이전에 이미 어떤 관계가 전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설명하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다(잘랐다). 이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이 언약을 맺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관계가 수립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관계의 수립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미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있었던 그 이전의 관계를 전제한다. 하나님께서 창17장에서 아브라함과 베리트를 맺으시는 것은, 창15장, 거슬러 올라가서 창12장에서 이미 형성된 관계에 기초한다. 아브라함 이전의 아담이나 노아, 그리고 아브라함 이후의 모세나 다윗 등에 대해서도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베리트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맺게(자르게) 되는 베리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상호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조차도 이전에 이미 어떤 관계가 전제되어있었던 것을 상호적인 것으로 공식화시키고 구체화시키는 것이 베리트이고 디아세케인 것이다.

     왜 이런 용어들을 일일이 살펴보려고 하는가? 앞서 적은 두 번의 글에서 강조한 것이 무엇이었나를 상기해 보라. 언약이 자연법칙과 생의 법칙으로서의 관계이며, 그런 모든 관계들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설정한 관계임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언약’이란 말, ‘약속’, “계약”이라는 말 속에서, covenant와 promise라는 말 속에, contract라는 말 속에,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설정하신 법칙들로서의 관계를 전제하는 그 무엇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잘못인가? 그렇다고 해서, 꼭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 있는가? 언약의 문제를 논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주권적 성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어떤 언약의 문제도 제대로 풀리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될 것이기 때문에, 이 용어들의 정리를 통해서, 짚고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한글(약속, 계약, 언약)과 영어(promise, contract, covenant)로 표현된 용어들이 성경의 베리트와 디아세케라는 말을 번역하는데 적절치 못하다는 요지의 글을 써놓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명하고자 하는 것은, 계속해서 이 시리즈의 글에서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언약이라는 말속에 담겨져 있는 "약"의 의미만 아니라, "언"의 의미를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 "言"(말씀)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본시리즈에서 다루게 될, "언약론적 존재론"(covnenant ontology)의 중요한 전제가 될 것이다.




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3)

 언약신학에 언약이 없다(II)

     언약의 핵심은 “관계”이되, 그 관계가 상호보완적이며 상호보충적인 어떤 관계만이 아니라,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주도성에 의한 관계라는 것이 앞 글의 핵심이다. 이런 면에서, 한글과 영어권의 언약신학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는 기본개념들, 곧 “약속”(promise),”계약”(contract),”언약”(covenant)라는 말들이 그런 하나님의 주권적 특징을 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의미에서 “언약신학에 언약이 없다”고 하였다(부록1참고). 구약성경에서 이것과 관련해서 사용되고 있는 “베리트”, 신약성경에서의 “디아세케”라는 말은 아주 독특하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성을 전제하고 있는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이 말들은 심지어 “언약신학”의 그 “언약”이라는 말조차도 충분하지가 않다.

     이런 부족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는 “언약”이라는 말로서 “베리트”, 혹은 “디아세케”라는 말의 번역어로서 사용하려고 한다. 특별히 이 말의 “언”(곧, 말씀)이라는 말이, “언약신학”에서 다룰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특징을 강조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언약론적 존재론”(covenantal ontology)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바로 그 특징이다. 이 말을 들으면 철학에 대해서 견문이 있는 어떤 분은 저를 두고 세속적인 철학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염려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존재론은 철학적인 용어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적 관념적 존재론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적 존재론이든, 이러한 형이상학적 존재론에 자신이 물들어 있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이런 용어들만 경계하는 경우도 흔히 있다. 이 “언약적 존재론”은, 이런 형이상학적 존재론들의 문제점들을 비판하면서 성경적인 대안을 모색하려고 하는 것이다. 실상, 개혁주의신학에서 얼마간 결핍된 것이 바로 이런 존재론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존재의 본질(essence)이라는 것이 존재 자체를 넘어서서 있다거나(플라톤), 존재 자체에 있다거나(아리스토텔레스) 하는 주장들에 영향을 받아온 점이 적지 않다. 그들의 철학을 비판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약적 존재론”은, 존재의 본질이 존재 자체에 있거나 존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가 맺고 있는 “언약”과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이런 생각은, 바로 모든 존재의 시작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창조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성경의 증언에 기초한다(창1장).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존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존재의 본질(essence)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존재의 창조가 있었고, 또 그 말씀에 의해서 새창조의 존재가 시작된다(약1:18;벧전1:23 등). 창조이든, 새창조이든, 하나님으로 말씀으로 된 것이니, 존재는 곧 말씀에 의한 것이며, 언약에 의한 것이다. 말씀 그 자체가 일종의 언약이기 때문이다. 이런 존재론적 성찰에 근거한 "언약"이 언약신학에 없는 것이 현대의 언약신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 글이 전개되어 가는 중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언약에 의한 것임이 바로 앞서 강조했던 “자연의 법칙으로서의 언약”과 “생의 법칙으로서의 언약”과 그 괘를 같이한다. 이제는, “자연”과 “생명”이 모두 “존재”의 한 측면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면에서, 이 “언약”을 모두 “존재의 법칙으로서의 언약”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존재의 한 구성요소이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인, 인간 그 자체의 인격을 또한 언약적 존재론의 입장에서 조명해 볼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인격”(person)을 세 요소로 구분한다. 지(reason), 정(emotion), 의(will)이 그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공화국 등의 책에서 표현된 플라톤(혹은 소크라테스)의 삼분법(tripartite)적 구분의 전통에 의한 것이다(물론, 그들이 정확하게 현대적인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이해는 그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비판되었지만, 그 비판이 완성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이분법(bipartite)적으로 구분한다. 인지적 기능을 하는 요소와 비인지적 기능을 하는 요소로 이분한다. 이런 구분 자체를 뛰어넘는 인간의 인격에 대한 이해가 성경적인 것이다. 이것이 왜 그런가 하는 것이 바로 이 “언약적 존재론”라는 관점에서 이 시리즈를 통해서 시도될 것이다. “언약신학”의 범위가 얼마나 깊고 광범위한지를 암시해 준다. 여기서 요약해 두는 것은, 바로, 삼분법적으로 설명하든, 이분법적으로 설명하든, 인간의 인격(person)이라는 것은, 바로 언약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곧, 우리의 인격(person) 속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의식적으로 언약을 맺게 되는 일이 있든지 없든지, 이미, 하나님과의 어떤 형식으르든지 이미 “언약관계”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어떤 의미로서든지, “인격”(person)이 잇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어떤 식으로든지, “언약”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본질(essence)를 나는 발견하였는가? 이 질문은 바로 이 언약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과 아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언약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길 기도한다.




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4)

 언약 이전의 언약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언약관계에 놓여져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언약을 일종의 법칙으로서 설명하였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그것 자체만으로서 일종의 법칙을 따라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 일종의 법칙이 바로 언약이다. 이런 법칙으로서의 언약을 “창조언약”(Creation Covenant), 혹은 “태양언약”이라고 한다. 우주가 존재하는 한 그 우주의 변화와 존속에 관한 법칙의 설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참고:창1장, 창8:22,시89:34-37,??31:35-37,33:20-22,25). 이런 존재의 법칙으로서의 언약은, 소위 아담언약(혹은 행위언약)이라고 알려진 것보다도 우선된다.

     이러한 창조언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참 중요하다. 우주 가운데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인 인간이, 아담이 대표가 되어서 하나님과 맺은 그 언약(아담언약, 혹은 행위언약)이라고 불려지는 것보다 이전에 이미 하나님과 일종의 언약을 맺고 있었다는 것은, 그 행위언약으로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순종의 의무와 축복의 어떤 약속을 맺게 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배하는 존재인 것은, 아담이 하나님과 행위언약을 맺기 이전에 이미, 피조물로서 존재하는 그것 자체로서 이미 주어져 있는 과제요, 임무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암시적으로 강조하고 또 강조하였다. 이번에도 강조하는 것은, 이것을 언약신학을 논하는 자리에서조차 별로 언급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임을 의식하기 이전에 이미 인간이다. 내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요, 그 인간 속의 바로 나 자신이라는 인식, 이것이 바로 언약신학의 출발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이요, 나 자신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을 먼저 언급하는 것은, 이런 출발점에 대한 인식이 바로 나 자신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창조언약을 아는 것이 어떻게 나 자신을 아는 출발점인가? 내 자신이 창조물인 줄 안다면, 나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바로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인식과 궤를 같이 한다. 나 자신의 지, 정, 의가 그 마땅한 바 대로, 알고, 느끼며, 의지하고 있는가? 나의 마음(mind)과 마음(heart)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나 자신을 내 자신이 참으로 알고 있고, 그 원하는 것을 따라서 행하고 있는가? 바로 이렇게 나 자신이 나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창조언약에서 언급하였던 존재의 법칙으로서의 언약 속에 있는 모습이다. 나 자신이 나 자신 존재하는 그대로 인식하며 파악하고, 그 나 자신의 존재의 심층 깊은 곳에 있는 그 욕구대로 행하여도 전혀 잘못된 결과를 낳지 않는, 참 자유와 정의, 그리고 행복한 모습, 그 모습이 바로 창조언약 속의 나인 것이다. 이 창조언약은, 그렇기에, 나 자신의 마땅한 모습(myself as it ought to be)을 그려놓고 있는 조항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 자신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그 모습, 마땅히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며, 그 뜻을 따라서 행하면서 살아가는 그 모습으로서의 내가 바로 이 창조언약, 존재의 법칙으로서의 언약 속에 규정되어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나의 지성이 나의 감정과 어떤 관계에 놓여져 있어야 하는가? 나의 지성과 정서가 나의 의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또한 나의 의지는 나의 지성과 정서에 어떤 기능을 행사하는 것이, 그 마땅한 영향이며, 관계인가?

     이런 질문들은, 바로 나 자신의 나됨(selfhood)에 대한 질문에 이르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이해했는가 싶으면 어느새 미꾸라지처럼 나의 인식의 어망(魚網) 그 틈 사이를 빠져나가 버리고 마는 존재가 바로 나이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의문이 생긴다고 하였다. 저 수많은 별들 너머에 무엇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는, 그것을 헤아리고 있는 바로 나 자신은 누구인가? 문득 사로잡는 질문들이다. 그것을 묻는 자는 바보라고 하였던가? 독일계 유태인 시인 하이네가 한 말이다. 그런 나에 대한 질문과 더불어서 나와 더불어 함께 하는 또 다른 존재를 문득 연상케 하는 것이 바로 이 언약신학인 것이다. 그 다른 존재가 아주 가까운 지근의 인물이든, 우주 끝에 있는 절대타자이든, 그런 인식을 전제하는 것이 바로 이 언약신학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5)

언약의 하나님이 아니면 전혀 하나님이 아닙니다(I)

     우주 만물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것, 심지어는 나 자신의 지정의의 모든 요소들 사이에 있는 그 마땅히 존재해야 할 바(as they ought to be)에 대한 것이, “존재(생명)의 법칙으로서의 언약”(곧, 창조언약)이라고 하였다. 문제는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에 있다. 존재하는 것은 운동한다(act or move). 모든 존재하는 것은, 그 존재한다는 것 자체 안에 이미 운동의 “경향성”을 갖는다. 왜 그런가? 그것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고정된 불변(不變)의 어떤 원자(原子)가 아니다. 부동(不動)의 동인(動因)이 아니다. 하나님은 운동 그 자체이시다. 오해하지 말라. 운동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이란 뜻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그 당신 안에 부단히 운동하시는 속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운동”이라는 말을 어떤 물리적인 법칙으로만 생각하지 마시라! 그래서 오히려 “역동성”(dynamicity)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낫겠다. 성경의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사랑”과 “의”(진리)이시며, “생명”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창조 이전부터, 영원 전부터, “이미” 사랑이셨다. 오직 하나님이 “한 분”뿐이시기만 한다면, 창조 이전에, 한 분뿐이신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이실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한 분” 뿐이실 뿐 아니라, “삼위”이시기 때문이다. 삼위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 전부터의 활동, 혹은 “운동”이 바로 “사랑”이며, “의”(진리)이고, “생명”이다(“의”는 “사랑”의 활동패턴이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특성은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속성이 그 분의 창조운동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모든 존재의 경향성이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존재”(Being)이시면서 또한 “생성”(Becoming)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자신을 “존재”로서 계시하시되 그 존재하심의 “역동성”, 혹은 “경향성”에 의해서 그 존재하심을 “감추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아무리 많이 드러내신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 인간들(혹은 신자들)이 확신을 갖고 그 분에 대해서 알되, 모든 것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영원히 “생성”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이런 표현은, 칼 발트의 변증법적 신학이나 하숍의 과정신학을 비판하기 위해서 그들의 “용어”를 역이용해서 한 말이다-귀있는 자는 들을지언저!).이런 “경향성”(tendency)은, “기질”(disposition)이며, “성향”(inclination)이고, “습관”(habit)이란 개념과 상호연관되어 있다. 이 상호연관성에 대해서 앞으로 더욱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우선, 이런 모든 존재하는 것의 운동하는 경향성이 바로 언약을 가능케하는 토대라는 것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운동(활동)의 아주 중요한 한 표현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은 하나님되심의 그 속성으로 인해서 언약의 하나님이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언약의 하나님이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말은, 언약의 하나님이 아니면 그 하나님은 아예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삼위 안에서 스스로 언약을 체결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내적 경향성(혹은 내적 필연성, inward compulsion, necessitate finis) 때문이다. 결코 필연에 의하여 강제되시는 분이 아니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어떤 제약 속에 묶어두시는 것, 바로 그것이 “언약”이라는 것이다. 쉬운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거짓말 하실 수 없는 것으로 스스로를 묶으셨다는 것이다. 의로우실 수 밖에 없고, 또한 사랑이실 수 밖에 없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생명이실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실 수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은 결코 하나님이실 수가 없다. 그래서 존재하실 수 밖에 없는 필연에 매여 계신다. 하나님되심의 내적 필연성에 의해서 자신을 묶으신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묶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다. 오해하지 말라. 언약맺으심이 내적 필연성에 의한 것이라는 말을, 외적 필연성(outward compulsion, necessitate coactionis)에 의해서 된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절대자유하신 분이다. 어떤 외적 강제에 의해서도 제한되실 수 없는 분이시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이실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수 밖에 없다. 바로 그것이 내적 필연성이라는 것이고, 그것으로 언약을 맺으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예정론을 오해하게 된다.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오해하게 된다.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를 오해하게 된다. 모든 오해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설명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다음 주일에 그렇게 하겠다.




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6)

언약의 하나님이 아니면 전혀 하나님이 아닙니다(II)

     인간의 자유는 상대적이다. 하나님의 자유는 절대적이다. 인간의 자유와는 다른, 절대자를 가지신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절대>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이시지 않으실 수 있는 자유는 그에게 없다.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자유도 <결코> 없다. 거짓말 할 수 있는 자유 또한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유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는가? 거짓말 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보다 못한 자유를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의 자유는 정녕 절대적인 자유가 아닌가? 만일 하나님이 거짓말 하실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고, 만일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자유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자유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못하는 <필연necessity>에 종속되신다. 존재하지 않으실 수 없는 그 <필연>에도 종속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필연>은 결코 그의 <절대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필연과 자유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연과 자유가 서로 상보적인 개념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필연을 일종의 <강제 compulsion>으로만 생각하고, 또한 그 <강제>를 <물리적이고 외압적인> 강제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거짓말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 외의 어떤 다른 존재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강제를 당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거짓말 할 수 없게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거짓말 하실 수 없음에 대해서 너무나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 하나님 자신을 강제할 수 있는 분이 또 누가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바로 그 존재가 하나님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짓말 하실 수 없는 것은, 하나님 외의 다른 어떤 존재에 의한 강압이나 강제에 의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 안에서의 스스로를 규제하고 스스로를 제약하는 그런 힘, 그런 동기, 그런 기질, 그런 성향, 그런 운동성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내적 필연성inward necessity>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실 수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외의 다른 존재의 힘이나 의지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존재하지 않으실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다른 존재가 하나님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실 수 없는 것은, 하나님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규제하고 스스로를 제약하는 그런 힘, 그런 동기, 그런 기질, 그런 성향, 그런 운동성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되지 않으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내적 필연성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되지 않으실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외부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내적인 필연성에 의해서 거짓말을 하실 수가 없고, 존재하지 않으실 수 없게 되는 것이라면, 이런 논리를, 하나님의 작정에 적용할 수 있다. 곧, 하나님께서 한 번 작정하신 것을 성취하지 않으실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한 번 작정하신 것을 성취하시는 것이 어떤 다른 존재의 외부적인 강압이나 강제에 의해서 성취하시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한 번 작정하신 것을 그 작정하신 것에 <매여서> 그것을 성취하신다고 해서 그가 <절대자유>하지 못하신 분이 되는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만물의 역사를 운행하시고 또한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자들을 구원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이 <절대자유>하지 못하신 분인가? 만일 이런 질문들에 올바르게 답하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내적 필연성>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존재하는 또 다른 하나의 오해는, 특별히 하나님의 자유의 영역인 <영원>을, 인간의 자유의 영역인 <시간>의 범주로 오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칫 <영원>을 <시간화temporalization>시키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이것은, <영원>을 시간의 <무한한> 연속쯤으로 잘못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영원>은 <과거>라는 <시간>을 <무한정으로> 연장한 것도 아니고, 또한 <미래>라는 <시간>을  <무한정으로> 확대한 것도 아니다. <영원>이란 오히려 <과거>,<현재>, <미래>를 감싸면서 또한 초월하고 있는 그 <무엇>이다. 언제든지, 그 <영원>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속으로 뛰어들어올 수 있고, 관계할 수 있는 역동적 관련성을 <시간>과 갖고 있다. 이런 <영원> 속에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 뜻하신 대로, <과거>속에 개입하실 수가 있고, 또한 <현재>와 <미래> 속에 돌입해 오실 수 있다. 하나님의 자유는, <시간>내의 자유인 인간의 자유와는 달리, 절대자유이면서, 또한 역동적인 자유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예정>을 생각할 때, 무한한 과거의 어떤 싯점을 영원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영원 속에서 예정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지적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무한한 싯점에서의 영원 속에서 예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영원> 속으로 돌입해 오실 수 있는 그 <영원>으로부터,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 또한 <예정하신다>. 작정하시고 예정하신 것을 성취해가는 것 때문에, 그 예정과 작정의 프로그램에 매여서 하나님이 자유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하심 자체가 역동적이기 때문에, 그의 <영원>도, 그의 <자유>도 모두 역동적이다. 이런 역동성을 갖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내적 필연성>인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되, 당신의 언약에 스스로를 묶으시는 것이 바로 이런 <내적 필연성> 때문이다. 절대자유하신 분이시면서도 그러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의 언약은 고귀한 것임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다. 언약의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일 수 없다는 말의 의미도 바로 이런 뜻에서이다. 언약이란 바로 하나님의 내적 필연성 그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의 행위<혹은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음 주에 살펴보기로 하자.




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7)

삼위일체와 언약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언약의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니시다. 이렇게 하나님이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전제한다. 하나님의 언약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 안에서의 언약을 의미한다. 하나님 당신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고 표현하시는 것이 언약이다. 하나님의 내적 필연성에 의해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 그럼으로, 참말만 하실 수 밖에 없는 당신의 성품을 따라서, 사랑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또한 그 언약을 성실하게 성취해 가시는 것이다.  이 언약은, 어떤 피조물이 존재하기도 훨씬 이전에,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성품의 발현이며, 이 성품의 발현에 의해서 역사속에서 언약이 성취되어간다. 그러므로, 영원前에 있었던 하나님 자신 안에서의 언약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 외의 다른 존재와의 언약으로 표현되어지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의 언약은 이런 의미에서 영원 전에 있었던 하나님 안에서의 상호언약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님 안에서의 상호언약”이라는 표현이 성경에 없다. "삼위일체"라는 말도 성경에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삼위일체를 성경적인 교리로서 인정하면서도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前 상호언약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다(O.P.Robertson, The Christ of the Covenants, Grand Rapids: Baker, 1980, pp.53-54). 하지만, 이런 하나님 안에서의 상호간 언약이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 성경적 증거는 충분하다. 첫째, 창세전에 하나님의 비밀하신 뜻이 있었다는 점(엡3:10-11 등). 둘째, 그 비밀하신 뜻이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관련된다는 점(고전2:7 등). 셋째, 그 구원계획을 위해서 아버지에게 위임받은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아들과 성령이 오셨다고 한 점(요5:30,43;6:38-40;16:5-15 등). 이런 점들에 “여호와의 회의”에 대한 언급들(??23:18,cf.창1:26)을 고려한다면, 하나님의 영원전의 비밀하신 뜻을 위한 하나님의 회의를 통한 언약이 있었다고 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런 면에서 많은 성경학자들이 이런 하나님의 영원전 상호언약의 실재에 대해서 동의하고 있다(예: Casper Olevianus, Johannes Coccejus, Charles Hodge, James Jordan, Louis Berkopf, etc.).

     이 짧은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창세전 하나님 안에서의 상호언약은, 곧, 삼위 하나님 안에서의 상호언약이며, 그 언약의 핵심과 실재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 그것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이다. 곧 언약의 실체는 삼위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을,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런 피조물들이 존재하기 이전에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피조물들이 존재하기 이전에도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도대체 그 사랑의 대상은 누구이며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구체적인 대상도 없는 사랑만큼 공허하고 관념적인 것이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의 창조전 영원전의 사랑이 그렇게 관념적이고 공허한 것이었을까?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는 성경의 선언(1요4:11)은, 피조물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만 아니라, 삼위 하나님 안에서 영원전부터 나눠오셨던 그 사랑의 성품을 전제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전부터 사랑이신 것이다.

     물론,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또한 빛(1요1:5)이시고 생명(1요1:1)이심과 함께 한다.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 사랑으로 표현되고, 그 사랑이 표현될 때는 진리의 빛으로 표현된다. 긍휼(사랑)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빛)와 화평(사랑)이 서로 입맞추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시85:10). 이것들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자한 할아버지의 지나친 관용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진리는, 냉혹한 재판관의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희랍철학의 정의는, 눈먼 정의이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두 눈을 부릅뜨셔서, 사랑과 진리 그 어느 것도 손상이 되지 않도록 하시는, 사랑의 정의이다. 당신의 정의가 실행되기를 위하여 당신 자신의 심장을 내어놓으시면서 그 정의를 실행하시기 때문이다. 그 실행이 바로 언약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삼위 하나님의 상호간의 사랑으로 삼위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간에 도대체 어떤 언약을 맺으셨을까? 이것을 다음 주에 살펴보자.




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8)

사랑의 언약 언약의 사랑

     사랑은 홀로 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이 사랑이라 함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 그 이상임을 암시한다. 사랑이 어떻게 대상이 없는데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의 하나님은 단일신론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그렇다고 다신론적인 하나님인가? 과연 하나님”들”이 계신가?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유일신론적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고(예,요1:1) 성령도 하나님이시되(예,고후13:13), 예수님과 성령이 아버지 하나님과는 다른 “분”(person)이라고 한다(예, 마3:16-17). 그런 면에서 하나님은 세 “분”이시라고 할 수 있다. 한 “분”이시면서 세 “분”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한” 분 되시다는 것으로는 의미가 충분치 않다. 하나님이 한 “분” 이상이신, “분들”이어야만 그 의미가 충분해진다. .

     만물이 창조되기 훨씬 이전부터 하나님은 사랑이셨다. “세 분”이신 하나님들께서 사랑하신 것이다. 그 사랑은 어떤 것일까? 영원 전부터 “세 분” 하나님들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의 관계를 성경은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첫째로, “낳으심”(generation)이 그것이다. 이것은, 두 “분”이 서로 동일본질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1:3)이시고 참 형상(골1:15)인 것이다. 이 “낳으심”은, 아들이 역사의 어떤 싯점, 어떤 시간상의 사건으로서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의 인간으로서의 “성육”시에, 혹은, “부활”이나 “승천”시에 낳아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초월한 역동적 영원세계에서의 “관계”로서의 “낳으심”이다. 아버지는 <영원히> 낳으시는 분이시고, 아들은 <영원토록> 낳으신 바 되는 분이시다. 그래서는 아버지는 영원히 “아버지”이고, 아들은 영원히 “아들”이시다. 아들이 만물과 피조물에 대해서는 “아버지”일수 있지만(사9:6), 그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들”이다. 그 아버지도 아들을 부르기를, “하나님” 또는 “주”라고 한다(히1:8). 중요한 것은, 이 “낳으시고 낳으신 바 되는” 이 관계가 바로 사랑의 관계이며 이 사랑의 관계가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언약이라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언약이란,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가 되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서 아들이 되기로 한 그 관계, 그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사랑의 언약이 “낳으심”인 것이다.         

     이런 사랑의 언약은 성령이 아버지, 그리고 아들과의 사이에 가지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 관계를 두 번째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나오심”(procession)이다(요15:26).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오고, 또한 아들에게서 나오신다. “낳으심”이 역사적, 시간상의 사건이 아닌 것 같이, 이 “나오심”도 시간상의 역사적 사건과 일차적으로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나오시는 것이 “오순절강림”시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영원 전 세 “분”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관계로서의 “나오심”이라는 것이다. “낳으심”이 사랑의 관계이고, 또한 사랑의 언약의 표현이라면, “나오심”도 똑같이 사랑의 관계이고 또한 사랑의 언약의 표현이다. 성령께서 아버지와 맺은 언약이 바로 “나오시는” 관계이고, 아들과 맺은 언약도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성령을 “보내시는” 자로,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보내심을 받는” 자로서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그와 같이, 아들은 성령을 “보내는” 자로, 성령은 아들에게서 “보내심을 받는” 자로서 서로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하나님 “세” 분(persons) 안에서의 영원한 언약이 결코 <상업적이거나 법률적인> 계약(contract)과는 관계가 멀다는 것이다. “낳으심”과 “보내심”, “낳으신 바 됨”과 “보내신 바 됨”은, 결코 상업적 이익관계나, 법률적 구속을 갖는 어떤 계약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표현이다(물론 이 사랑은 거룩하다! 의롭고 또한 진실하다! 두말하면 무엇하랴!). 세 분 하나님께서 서로를 향하여서 “사랑해 달라”고 하는 상호간의 호소이며 그 호소에 답하는 약속들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약”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낳으시는” 사랑을 영원토록 나누시며, 아버지와 성령, 아들과 성령은 “보내시는” 사랑을 영원토록 나누시는 것이다. “낳으시고” “보내시는” 사랑으로서의 언약이며, 그 언약 안에서 “낳으시고 보내시는” 사랑을 나누신다. 사랑의 언약이며, 또한 언약의 사랑을 나누시는 것이다. 그 사랑의 사귐과 나눔 속으로 부르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뜻이시다(1요1:3).

     그 나눔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우리에게 “낳으심”과 “보내심”의 그 무엇이 없을 때, 세 분 하나님의 그 “낳으시고 보내시는” 사랑 속에 들어갈 수 있을까? 언약을 알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9)

하나님의 자살(Divine Suicide)?

     자살이야말로 인간이 절대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허무주의자 쇼펜하우어의 말이 아니라, 기독교작가라고 할 수 있는 도스트예프스키의 말이다: “Every man who desires to attain total freedom must be bold enough to put an end to his life….Wheover dares to commit suicide becomes God”(그의 The Possessed 에 등장하는 한 인물 Kirilov의 말). 물론 자살을 권하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란 그렇게 한계지워진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유는 어떠한가? 이 시리즈의 앞의 어느 부분에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아니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하였다.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must exist necessarily)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는 존재하지 아니할 수 없는, 곧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그 필연(necessity)에 매여 계신다는 뜻으로 들려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필연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결국 필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과연 그러한가 하는 것이 나의 질문이다. 그렇게 필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과연 그럴 절대자유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절대자유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자살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의 절대자유를 증명해야 한다면 자신의 존재하지 않음으로서만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살해야만 자신의 절대필연에서 절대자유한 존재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이게 무슨 망발인가! (이런 질문으로, 본체론에 기초를 둔 서구신학의 신론, 혹은 삼위일체론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은 복될진저! 물론, 너무 간단한 언급이지만, 윗글에 나타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전제의 잘못도 암시하고 있다).

     놀라지 말라. 그렇게 자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그리고 놀라시라. 그렇게 자살할 필요가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서의 상호간 언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언약이 바로 “낳으심”이고, “나오심”이라고 하였다. 성부와 성자께서 “낳으시고 낳으시는” 바 되며, 또한 성부와 성령께서, 그리고 성자와 성령께서 “보내시고 나오시는” 이 관계-사랑의 언약, 언약의 사랑- 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자살하실 필요 없이도 절대필연으로부터“도” 자유하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의 근거가 하나님되심이라는 “본체”(nature)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삼위의 “인격”(person)에 있다고 이해할 때에 이 일이 가능해진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은 삼위의 인격의 상호교제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상호교제를 떠나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성부 없이, 성자가 없고, 성자 없이 또한 성부가 없다. 이것은 또한 성령에게도 적용된다. "낳으시는" 성부, "낳으신 바" 되는 성자, "보내시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나오시는" 관계를 이루는 그 세 분의 "인격"(person)이 없이는, 어떤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하나님되심이라는 개념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되심이라는 그 “본체”와 삼위 하나님의 세 “인격”은 동시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에 그 논리적인 우선권을 두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천양지차로 바뀌게 된다. “본체”에 우선권을 두면 철학적인 하나님이 된다. 필연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자살함으로서만 그필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님이다. “인격”에 우선권을 두면 성경의 하나님이 된다. 언약의 하나님이 바로 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서로를 뗄레야 뗄 수 없고 분리시킬 수 없으되, 서로는 분명하고 뚜렷하게 구분되는 인격(person)이라는 것이다. 이런 신비한 person의 개념을 한글로 번역할  때, “인”격이라고 하면 무언가 결함을 느끼게 된다. 오히려 “신”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person되심을 어떻게 인간의 person됨에서 연유된 것처럼 이해할 수 있더란 말인가! 사실은 오히려 거꾸로이거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절대필연에서조차도 자유한 그 하나님께서 그 자유하심으로 사랑 가운데서 행하시는 일이 바로 그 분의 작정(decree)하심이다. 언약의 작정이고, 사랑의 작정이다. 그 분의 절대자유 가운데서 또 다른 대상을 필요로 하여,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인간을 창조하시며 언약을 맺으시고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을 구속하시는 대드라마를 작정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실 하등의 필요가 없는데도, 삼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그렇게 행하시는, 절대 자유하신 그 분의 영원한 작정과 그 집행을 우리는 이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10)

하나님은 과연 주사위를 던지시는가?

     대우주와 천체의 운행법칙을 연구하는 천체물리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원리의 발견과 그 증명으로 일약 아이작 뉴톤을 능가하는 과학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 당시 각광을 받기 시작하던 학문분야가 바로 양자역학이었다. 이것은 대우주가 아니라 소우주의 세계, 곧 가장 미소한 세계의 운동법칙에 대해서 연구하는 영역이었다. 원인과 결과를 규명하는 인과의 법칙이 아니라, 오히려 확률의 추측만이 있을 수 있는 불확정성의 세계가 바로 이 양자역학의 세계였었다. 이런 세계를 반대하면서 그가 던진 말이 유명하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과학의 역사는, 아인슈타인이 잘못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현대사회는 오히려 양자역학적 세계관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해진다:성경의 하나님은 과연 주사위를 던지시는가? 주사위를 던지면 무슨 숫자가 나올 것인가 하는 것은 확률(probability)의 문제이다. 확률은 우연(chance)의 작용을 계량화한 것이다. 오늘 내가 복권을 산다면 그 복권이 당첨될 확률은 얼마인가? 이 우연을 사람들은 ‘행운’이라고도 표현한다. 양자역학의 세계, 맥스웰의 도깨비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바로 현대인들이다.

     이 우연의 세계에 생기고 있는 아주 신비한 현상 하나가 있다. 인간의 유전자 안에 그 유전인자의 정보를 담고 있는 단백질 효소들이 상호결합하면서 유전자띠를 형성하게 되는 것은 우연의 결합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그 무기물질들의 우연한 결합들이 놀랍게도 유기체로서의 생명현상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크 모노(Jacques Monod) 같은 분자생명공학자는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자를 통해서 어떻게 무기물질의 우연한 결합이 생명현상이라는 필연으로 전환되는가에 대해서 경이로와하고 있다. 우연이 지배하는 양자역학의 소우주가 인과의 필연으로 귀속되는 대우주의 천체로 이어지는 것, 이것은 경이 그 자체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어떻게 직선을 계속 이어가면 곡선이 되는가? 너와 나 사이에 있는 무한한 제논(Zeno)의 그 ‘중간’을 넘어서서 어떻게 내가 너를 만나 사랑할 수 있는가? 이것은 기적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주사위를 던지신다고 하더라도, 그 주사위의 확률은, 하나님의 지식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사위도 만드시고 그 주사위가 떨어지는 공간도 만드시고 주사위가 떨어지는 확률도 지배하신다. 하나님은 양자의 소우주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천체의 대우주도 조성하시고 또한 운행하신다. 모든 우연을 지배하시며 그 우연들 속에 역사하셔서 섭리의 필연이 되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작정이다.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모든 존재가 모든 사건이 그의 ‘생각’과 ‘뜻’ 속에 있었다. 그 분에게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이, 모든 것이 “영원한 현재”(Eternal Now)이다.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또한 거룩하신 사랑의 뜻, 그 비밀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의해서 모든 것을 작정하신 것이다.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시되 그 필연에 전혀 종속되지 않으시는 절대자유의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그 작정이 바로 언약이다.

     왜 언약을 맺기로 작정하신 것일까? 당신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밖에 답할 수 없다. 더 이상 인간의 호기심으로 하나님을 추궁할 수 없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니 나도 기뻐할 뿐이다. 감사하고 찬양할 뿐이다. 찬양할 수 없는자, 하나님을 저주하라! 그것은 당신의 몫이다. 하지만, <왜> 언약을 맺기로 작정하셨는지는 신비에 감추어져 있지만,  그 언약을 집행하시는 그 방식과 그 목적은 분명하다.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이다. 그냥 형식적인 사랑, 기브 앤 테이크의 사랑이 아니라, "순 진짜 참"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신것이다. 그래서 허락하신 것이 자유이다. 상대적인 자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존재인 당신을 배신하고 반역하고 저버릴 수도 있는 그런 자유를 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사위를 던지셨던 것일까?

아담이 어떻게 반응할지 확률로 계산하실려고 그렇게 아담에게 자유를 주셨던 것일까? 하나님의 그 마음 속 깊은 비밀을 어떻게 알랴!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진짜 참 순전한 사랑을 나누시기 원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배신할 수도 있는 그런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던 것이다. 참사랑을 가능케 하는 그 선물, 그 자유로,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의 허리를 찔렀다. 지금도 찌르고 있다. 피가 흐른다. 순전한 사랑을 원하여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한 그 댓가다. 하나님은 과연 주사위를 던지셨던 것일까?  우연의 소용돌이 속에 당신 자신을 던져버리셨던 것일까? 그 우연의 창에 당신의 허리를 찔리셨던 것일까? 그 주사위는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결과를 이미 알고 계신다. 당신 자신께서 기뻐하신 뜻 가운데서 그렇게 배신당하시기로, 허리를 찔리셔서 피흘리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11)

하나님과 내가 언약을 맺었을 때

     내가 언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가?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이것은 내가 언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내가 언제 중생하고 언제 회심했는가 하는 문제와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하지만, 똑 같은 문제일지라도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고 또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은 그 문제의 본질에 더욱 접근하도록 돕는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문제는, 곧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로서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성경에서 요구하고 있는 만큼 진지하게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좌이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사고와 삶이 피상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들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도 있다.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그 언약을 파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무심한, 영적 피그미족들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이다.

나는 과연 언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가?

     언약을 나타내는 말, 디아세케는 ‘처분하다’(dispose)는 뜻을 가진 말에서 왔다고 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그 주권으로 처분하는 것이다. 이 처분한다는 말에서 ‘기질’(disposition)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그 주권을 따라서 처분하실(dispose) 때에 그 처분되는 대상에게 생기는 것이 바로 ‘기질’(disposition)이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에 우리 안에 형성되는 것이 바로 이 “기질”인 것이다. 이전에 소유하고 있었던 기질과는 다른 새로운 기질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는 너무나도 뻔뻔스럽다. 우리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과 더불어서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인간이 화장실의 구더기와 언약을 맺는다고 하면 무척 혐오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도 피조물이고, 마찬가지로 구더기도 피조물이다. 피장파장이요, 도토리 키재기이다. 그렇게 피조물끼리 언약을 맺는다고 해도 혐오스러울 진정 만물의 하나님이 그 미물 중의 하나인 인간과 더불어 언약을 맺는다면 하나님 편에서는 더욱 혐오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언약을 맺는데 있어서 그 하나님의 상대가 되는 인간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 것일까?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처분하는 것이고,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위치와 새로운 정향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기질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옛질서의 존재가 새로운 질서의 존재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옛질서의 자연(nature), 곧 본성(nature)이 새로운 질서로 정립되는 것이다. 내 마음의 모든 질서가 이전에는 나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질서지워진 것이 이제는 언약을 맺어주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새롭게 질서지워지게 된다. 지식이 새로워지고, 마음이 새롭게 되고 정서의 모든 감각이 향하는 바가 달라진다.

     이런 것을 “회심”(conversion)이라고 한다. 그 마음과 인격의 모든 것,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탄과 자신에게서 만물의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에게로 “전향”(conversion)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전향의 순간이다. 그 순간이 어느 때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전향이 있었는가 하는가이다. 그런 전향이 있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지금 지향하고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말이다: “The disposition and principle is the thing God looks at.” 물론, 하나님을 향하는 기질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질이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을 바라며, 내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와 구주로 믿고 있는가? 그것이 내 안에 기질이 되어서 나로 아버지와 아들을 바라보게 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언약을 맺은 것이다. 내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질이 그 흔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런 언약맺음의 과정을 아들이 우리 안에 “낳아지는” 과정과 관계해서 다음 주에 살펴보겠다.




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12)

삼위 하나님의 언약체결의 반영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

    삼위 하나님과 더불어서 언약을 맺는 것은 그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의 모든 것들이 재배치(dispose)되어진 새로운 기질(disposition)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새로운 기질은 무엇보다도 죄인되었던 자들 안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그리스도의 형상과 관계된다. 이 새로운 기질은, 다른 말로 하면,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회복되어진 그리스도의 성품(character)이고 품격(personality)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것은 하나님이란 실체가 따로 있고 그 실체에 대한 복사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라는 뜻이다. 아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1:3)이시다. 여기 ‘그 본체의 형상’(카락테르 테스 히포스타세오스 아우투)의 ‘히포스타세오스’는 ‘인격’(person)으로 이해된다(칼빈). “아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인격의 카락테르이다.” 칼빈의 이 의견에 이의를 제기한다고 하더라도, “아버지” 하나님의 본질(nature)과 본성(being)의 카락테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맥클레오드). 전문적인 말로 하자면, 아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동일본질’(homoousios)이시다. 아버지 하나님의 그 본질과 그 본성의 카락테르라는 것이다. 아들은 단순히 신적 본성의 복사판이 아니고 “아버지”의 낳으신 바 된 자이다(카락테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은, 삼위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이고, 이 언약을 맺음으로 모든 것이 재배치되어서 주어지는 새로운 기질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아버지께 낳으신 바 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아들 하나님, 곧 그리스도의 기질이다. 갈라디아교회 사람들이 유혹을 받아서 자신의 행위와 율법에 의지하려고 할 때에, 바울사도가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갈4:19)겠노라고 한 그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 새로운 기질이며, 또한 에베소교회사람들에게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마땅히 입도록 권하고 있는 그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엡3:24)이다.

     “기질”(disposition)은 일단 재배치됨(disposition)으로 이미 주어진 것이면서 또한 날마다 새롭게 강화시켜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미 주어졌으면서도 그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하는 소이가 생긴다. 구원받을 자를 미리 예정하신 것도 바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롬8:29)서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었는데, 또한 날마다 그 형상을 닮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어져 가서(고후3:18) 결국에는 그와 같아질 것이다(1요3:2). 결국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벧후1:4, 테이아스 코이노이오이 퓌세오스, shares of a divine nature)이 될 것이다. 아담이 자신의 힘과 꾀로 되고자 했던 것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감동과 교제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취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을 ‘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한(요10:33, 시82:1) 그 ‘엘로힘’으로 칭하여 져서 야훼의 회의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다(??23:18).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외없이 제사장일 뿐만 아니고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는 선지자들이다. 물론, 그리스도가 왕이시듯, 그리스도인들도 왕들이다. 만인제사장직만 아니고 만인선지장직, 만인왕직이 주장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던가!(고전2:16). 그대가 과연 그런가?

     이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 바로 삼위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일로 인해서 시작되고, 그 언약은 삼위 안에서의 영원한 언약체결로서의 낳으심(generation)과 나오심(procession)이 죄인들이 의인이 될 때 그리고 그 이후의 삶 안에서 반영(reflection)되어진다. 그리스도인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로운 것으로서 재배치되는 기질형성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이다. 곧 아들의 낳으심(generation)은 죄인의 중생(regeneration)으로, 성령의 나오심(procession)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성취(mission-calling)로, 그리고 성령의 성부와 성자께 영광 돌리심(glorification)은, 그리스도인의 삼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glorifying) 삶으로 반영되는 것이다.     



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13)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 속으로의 교제에 초청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본성에 대해서 유한한 인생이 바늘구멍만큼도 탐구할 수 없다고 한다. 단지, 그 하나님이 어떠어떠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을 부정의 신학(Negative Theology)이라고 한다. 동방교회신학의 특징이다. Gregory Palamas(AD 1296-1359) 같은 이에게서 그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의 본질(essence or nature)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단지 그 분의 활동들(energies)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계시된 것에 집중하고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는 동기를 선의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주장하는 것의 문제점은 분명하다. 하나님 당신께서 삼위 안의 내재적 관계를 계시하였는데도 그것에 대해서조차 무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더욱이나 삼위의 역사 내에서의 경륜적 관계가 영원한 삼위의 내재적 관계를 반영하는 것(칼 라너의 기본명제)이라고 본다면 더욱 그렇다.

     최소한 성자의 낳으심과 성령의 나오심, 그리고 성령의 영광돌리심은 시간과 역사 속의 사건이기 이전에 영원 속에서의 일이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의 구속경륜을 드러내시기 위해서보다는, 영원 속에서의 하나님 당신의 삼위 안에서의 내적 관계에 대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당신의 모든 본질(essence)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계시하신 그 본질만은 알 수 있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계시된 본질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옷깃을 여미는 경건함과 조심스러움으로 탐구해야 한다. 우리는, 최소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된 부분에 대해서 알 수 있고, 또한 묵상하는 중에 그 계시된 것의 의미를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적용시켜가야 한다. 동방교회의 부정의 신학을 반대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성자의 낳으심의 의미가 그리스도인된 우리의 경건에 어떤 의미를 가진 하나님의 내재적본질의 계시인가? 성령의 나오심의 의미가 그리스도인된 우리의 경건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 하나님의 내재적 본질에 대한 계시인가? 그리고 성령의 영광돌리심은 그리스도인의 경건에 어떤 도전을 던져주는 하나님의 내재적 본질에 대한 계시인가? 새로운 기질이 주어지는 것으로서의 중생, 사명적 삶,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 그것이라고 간단히 스케치하였다.

     그 중에 성자의 “낳으심”(generation)과 그리스도인의 중생(regeneration)의 관계에 대해서만 약간 더 살펴보자. 나머지의 것에 대해서는 각자가 묵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자의 “낳으심”과 그리스도인의 “중생”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가 “독생자”(monogenes)로 불리워지는 그 맥락을 잘 이해해야 한다. 가장 잘 아는 성경구절을 예로 든다면, 바로 요한복음3장16절에 나오는 “독생자”와 그 맥락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이 구절은, 바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더불어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겠노라”고 하시는 말씀 중에 기록된 것이다(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인지, 사도요한의 말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구구하다). 하나 더 예를 든다면, 요한복음1장14절의 “아버지의 독생자(monogenes)의 영광”에 대한 언급은 바로 그 앞에 기록된 1장12절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하나님께로서 난(egennethesan) 자들이니라”는 선언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아들의 “유일하게 낳으신 바 된 것”(독생자)과 죄인들의 “다시 낳아짐”(중생)은 이렇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왜 하나님의 내재적 본질로서의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의 관계가 “낳으심”으로 표현된 것일까? “중생”없이는 하늘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는 것은, 그저 어떤 하늘공간에 있는 “하늘나라”에 가는 특권을 누린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도요한이 그 첫번째 편지 서두에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한 그 사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사귐은 하나님의 경륜적 활동을 통해서 계시된 그 역사를 통해서 혜택을 누리는 차원에서만 아니고, 바로 그 내재적 본질로서의 하나님과의 교제인 것이다. “중생”없이는 바로 이런 것을 알 수도 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중생”을 통해서 바로 이런 영광 속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다. 성자의 “낳으심”이 성도의 “다시 낳으심”을 가르킴으로 인하여 바로 하나님의 내적 본질 속으로의 교제에 참여케하는 바로 그 영광스럽고 신비스러운 초청인 것을 알아야 한다.




언약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14)

언약의 비무장지대(DMZ)

     하나님과의 내재적 교제 속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된 어떤 개인 혼자의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그의 몸에 참예하게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내재적 교제 속에 참예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어린양의 혼인잔치이고, 그런 잔치의 공동체가 바로 신부처럼 단장한 “새예루살렘”이다. 이런 공동체에 참예하는 것이 바로 “중생”으로 시작되고, 이 “중생”이 삼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의 역사에 강조하는 표현이라면, 이런 주권의 역사를 통해서 죄인 편에서의 회개와 믿음의 결단의 측면을 표현한 것이 바로 “회심”이다. 이 회심이 개인적인 구원만이 아니라 바로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신인류(New Humanity)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문화”가 강조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중생하지 못한 타락한 세상의 문화는, 크게 나눠서 “자유”(freedom)를 지향하는 문화와 “통제”(control)를 지향하는 문화로 나눌 수 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인간사상의 두 가지 난제, 곧 하나(One)와 “여럿”(Many)의 관계를 잘 풀지 못하게 되면, 본질과 이상의 세계, 불변의 원리로서의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고, 그것은 법이라는 수단에 의존하게 되어서 일종의 법치적 독재통치에 이르게 된다. 민주사회의 모양을 취하면서도 결국 그 민주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법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모더니즘의 이상이 여기에 있었다고 이젠 그 폐해에 대해서 반발이 심한 요즘이다. 이에 반발하는 포스터모더니즘은, 유일무이한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면서 모든 사물들의 특이성과 다양성을 강조한다. “자유”가 극대화되어서 기형이 될 정도이다. 자유의 한계를 철폐하고 그 극단에까지 이르러 이젠 모든 것이 어떤 개인의 쾌락의 충족, 행복의 추구에 달렸다. 고상하게 표현하면, 자아실현의 윤리가 강조된다. 문제는, 그 자아가 개인주의적 자아이고, 자기욕구와 욕망의 표출로서의 자아라는 것이다. 이런 포스트모던사회의 자아를 “표출적 자아”(expressive self)라고 부른다(찰스 테일러, The Source of the Self).

     개인의 자유와 법에 의한 통치, 이 둘의 관계가 적절하게 균형을 잡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하나”와 “여럿”의 관계, 현상과 실재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파악해야 하는 지가 중요하게 된다. 이 둘의 영역의 중간에 있어서 그 둘의 마찰을 상쇄시키고 일종의 완충역할을 했던 것이 사라져 버린 사회가 우리 사회이다. 비무장지대(DMZ)가 사라져 버린 셈이다. 한쪽으로는 개인주의가 그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그 남은 힘을 소진시켜서 기어이는 상대주의와 허무주의의 나락에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면서 영원을 잊고 또한 시간을 잊어버리려고 한다. 또 다른 편에서는 기회가 있는 대로, 이런 방자한 시대 속에서 그래도 괴로워하는 양심들을 꼬드기면서 지구촌의 대의와 이상의 기치를 내걸고 ‘나의 투쟁’을 외치는 히틀러들이 생긴다. 국가주의의 이상이 그것이다. 이전 사회에서는 이 공백을 명예(honour)와 덕(virtue), 내적 기질로서의 성품(character)을 강조하는 윤리가 차지하고 있어서 양극의 충돌을 완충시켜왔었다. 그런데, 이 덕의 윤리의 완충지대로서의 DMZ가 사라져 버려서 이 두 세력이 벌거벗은 채로 그 힘들을 맞닥뜨리고 있다. 죽어가는 자들은 쁘띠-브로쥬와(소시민)이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닌, 셋이면서 하나인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꿈과 비젼이 회복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니다. 다양성의 이름으로 실재가 희생되어서도 안되고, 실재와 진리의 이름으로 자유가 무시되어서도 안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삼위 하나님의 자기현시이다. 그는 독재자도 아니고, 방관자도 아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삼위 안에서 사랑으로 언약을 체결하시며 그 체결한 언약을 사랑과 공의로 성실하게 성취해가시는 주권자이시다. 삼위(three persons)의 의미가 이렇게도 소중하다. 세 분(three persons)이면서도 한 하나님(one being)이시다.

     그 영원 전에 체결한 언약을 시간과 역사 속에 반영하시면서 작정하신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 언약을 통하여 기질과 습성으로서의 성품을 그 언약을 맺은 자에게 주시는 것은, 그 법을 내면화시켜서 새로운 인류의 공동체를 이뤄가시겠다는 뜻이다. 율법의 내면화, 이것이 바로 새언약이다. 돌판에 새겨진 율법이 아니라, 바로 마음의 심비에 새겨진 율법이 새언약인 셈이다: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며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31:33).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요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

     마음에 새겨져야 법이 기질로서 표현된다. 그렇지 않은 법은 외면적인 강제수단일 뿐이다. 언약이 기질이 되어야만 참된 언약이다. 새언약이 기질이 주어지는 때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언약, 하나님의 언약이 내면화되고, 내면화된 이 언약이 기질과 습관이 되어서 관습이 되는 사회, 그 사회가 바로 하나님의 이상사회인 것이다. 삼위 하나님과의 언약체결공동체가 바로 이 사회이다.




언약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부록2)

 삼位일體 용어에 대한 소고: “세 분 한 하나님”으로의 이해를 제언함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고백한다고 하면서, ‘삼’과 ‘일’은 너무도 잘 알면서 그 ‘삼’과 ‘일’의 관계를 나타내는 ‘위’와 ‘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이 한국신학계이다. 외국신학계의 용어들을 번역하는 차원에서 이제는 한글 자체의 의미들을 상고하고 혹은 반성하면서 한국신학계가 한 단계 성숙해져야 할 때이다. ‘삼위일체’라는 용어자체가 언제쯤 형성되었는지도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필자의 확인에 의하면 현재로서는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에도 이 용어가 나오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렇게 번역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위’라는 말은 영어권의 person이라는 단어의 번역어이다. 중국에서는 ‘위’(位)라는 말이 ‘(벼슬)자리’, ‘순서,차례’와 함께 어떤 사람을 높여서 부르는 일종의 경칭이다. 한글로 치자면, ‘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체’(體)라는 말은 ‘몸’, ‘바탕’, ‘사지’, ‘모양’, ‘물건’, ‘자체’, ‘나눔’, ‘형성함’, ‘친함’, ‘본받음’, ‘행함’ 등을 나타내는데 쓰여서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영어의 being, 혹은 nature나 essence라는 단어(혹은 헬라어의 ousia, 라틴어의 essentia)를 번역했음을 감안한다면, ‘바탕’이나 ‘자체’라는 의미를 담으려고 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겠다. ‘몸’이나 ‘모양’ 등의 다른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한다면, 이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단어라고 할 수 있겠다. 오히려 어떤 집단에서 사용하고 있는 ‘삼일’이라는 단어가 그런 모든 오해들에서 벗어나게 하는 장점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삼일’이라는 단어는 그런 잘못된 오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장점은 있어도, 추천할 수 없다. 그 ‘삼’과 ‘일’의 관계에 대해서 아무 것도 제시해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곧, 교회사를 통해서 제기되었던 수많은 논쟁의 의미를 무효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라는 말을 ‘바탕’이나 ‘자체’라는 의미를 갖는 단어로 본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바탕’이나 ‘자체’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바탕’, ‘자체’라는 말의 의미, 곧 ‘체’라는 단어가 이런 뜻을 담아서 사용되고 있는 맥락들을 유의깊게 관찰해야 한다. 이런 단어들을 유학과 신유학, 노장철학과 불교에서 어떻게 사용해 왔는가도 검토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삼위일체논쟁이 헬라신학에서 라틴신학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전개되었던 엄청난 오해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신유학에서 만개하였던 理氣논쟁이나 불가에서의 금강-화엄논쟁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런 논쟁을 통해서, 이런 ‘체’라는 개념이 (신)플라톤주의의 관념적 추상적 ‘바탕’이나 ‘자체’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신)플라톤주의가 비록 멀리 헬라세계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인간의 사상이라는 것은, 뜻밖에 지리나 역사를 뛰어넘어서 유사한 측면이 흔히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인도를 통해서 매개되었을 헬라철학의 중국유입가능성은 무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도와 중국의 철학과 사상이 페르시아를 통해서 헬라와 로마사회에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또한 그렇다.

     다행스럽게도, 중국어의 ‘체’라는 단어가, 삼위들과는 별개의 존재로서의 제 4의 어떤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받게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삼위이면서도 또한 그 삼위인 세 persons이 하나의 체, 하나의 바탕, 하나의 자체를 의미함을 가르킨다고 보아서 그렇게 무리가 없는 결론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심이 좀 더 집중되어야 할 것은, 바로 ‘위’라는 단어와 그 개념이다. ‘분’이라는 한글로 번역될 수 있겠다고 말하였다. 간단히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글로는 “세 분 한 하나님”이라고 이해되는 것이 가장 좋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분’이라는 용어를 ‘삼위’(three persons)에 적용시켰지만, 하나님에게는 적용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한글개역판의 신명기6장5절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이시니”라고 되어 있지 않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이시니”라고 되어 있는 것은 탁월하다고 하겠다.

     여기에 풀기가 여간 쉽지 않은 고민이 있다. 하나님이 과연 한 분이신가 세분이신가? 이 논의를 자칫 잘못 전개하면, 아무리 잘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한편으로는 삼신론(three-theism), 다른 한편으로는 양태론(modalism)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많다. 이런 고민을 안고 반틸 같은 개혁주의변증가는 “God is one person.”이라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본질이 비인격적인 어떤 추상적 관념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반틸, 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p.220,229.).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로서의 그 무엇이 ‘person’이라고 한다면, 그 ‘person’은 도대체 무엇에 대해서, 혹은 누구에 대해서 ‘person’이 되는가 하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답변하기가 용이하지가 않다. 하나님은 절대유일하신 ‘person’인데, 어떻게 다른 어떤 그 무엇, 혹은 그 누구를 상정할 수 있겠는가? Person이라는 개념 자체가 ‘관계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유일한 존재의 그 본질자체가 관계적인 person이어야 한다면, 그 본질 자체로서의 person이 도대체 누구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에 대해서 관계적인가 하는 질문에 답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의 person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마찬가지 논리가 한글에도 적용될 수 있다. ‘삼위’가 ‘세 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하나님은 ‘한 분’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이시지, ‘한 분’이시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 아니고, “세 분 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세분이시고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는 말도 이런 면에서 적당치 못하다. ‘분’이라는 말을 ‘삼위’에도 적용시키고, 또한 ‘하나님’에게도 적용시키게 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의 곤란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첫째, 하나님이라는 ‘분’이 세 ‘분’의 성부, 성자, 성령과 과연 어떤 관계를 가진다고 하여야 하는가 함이다. 그렇다면, 결국 네 분의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식의 결론이 나온다. 이단적이다.

     둘째, 하나님이 한 ‘분’으로서 존재한다면, 이 ‘분’으로서의 하나님은 ‘세 분 한 하나님’으로서의 한 ‘분’이시기 때문에, 이 ‘분’이라는 개념이 관계적인 것임을 고려할 때에, ‘세 분 한 하나님’이라는 ‘분’과는 다른 별도의 또 다른 존재를 상정해야 한다. 이단적이다.

     셋째, 한 하나님이 ‘분’이라고 한다면, ‘세 분’으로 표현된 three persons들은 비록 세 ‘분’이라고 표현은 되었지만, 결국, 한 하나님의 부속적인 성품이나 속성들로 격하되어 버리게 된다. 양태론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역시 이단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위’가 ‘세 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면(반드시 이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한 하나님을 표현하는 용어로는 ‘분’이라는 말과는 다른 그 어떤 용어가 필요하게 된다. ‘분’이라고 해서는 혼동만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제안은, 결코, 하나님께서 personal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personal하시다. 하지만, person이라고 하기에는 조심스럽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personal하신 것은, 하나님의 본질 자체로서가 아니라, 바로 삼위(three persons)로 존재하시는 그 특별한 존재양식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personal하신 것이다. 특별히, 삼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three persons로 이해할 때에, 한 하나님을 같은 용어로 사용해서 동시에 하나의 person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조심성이 없는 노릇이다. “세 분 한 하나님”이시지, “세 분 하나님 한 분”이라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곧 “삼위일위”라는 말도 잘못이요, “삼체일체”도 잘못이다. ‘삼위일체”하나님이 성경의 하나님이고, 우리의 하나님이다. 그것을 ‘세 분 한 하나님’으로 표현해 본 것이다.

     성부는 한 ‘분’으로서의 ‘person’이시다. 성자도 한 ‘분’으로서 ‘person’이시다. 성령도 그렇다. 그래서 세 분이시다. 그러면서 한 하나님이시다. Three persons in one being이라는 공식이 한글로 표현되었을 때 “세 분 한 하나님”이라는 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person’이라는 개념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가 요청된다.

     우선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우리는, 우선 두 가지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이 단어의 어원과 관계해서, 원래 연극배우들이 얼굴에 덮어쓰던 “가면”(mask)을 일러서 ‘프로소폰’(헬라어), ‘persona’(라틴어)라고 하였는데, 이 ‘연극배우의 가면’을 나타내는 용어가 우리가 지금 현재 사용되는 ‘인격’이라는 말의 ‘person’개념으로 발전해 왔다는 것은, 이 person의 개념 속에 그 person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역할과 기능을 전제하였다는 것이다. 배우의 얼굴에 쓰고 있는 그 가면을 통해서 그 배우의 역할과 기능을 알게 되고, 또한 그 배우가 대리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의 person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역할과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의 사람됨이 동일시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person이해의 배경을 고려할 때에, 고대사회로부터 이해되어져 왔던 person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회나 집단이 어떤 사람에게 요구하였던 ‘역할’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곧, person은 어떤 신비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비밀과 암호에 둘러싸여 있는 어떤 심층적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Person은 어떤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가치와 덕, 공동적 이상 속에서 각 개인이 담지하고 있었던, 혹은 있어야 한다고 보았던 어떤 역할과 관계된다는 것이다. 곧 Person은 전체 사회와 집단 속에서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개념이라는 것이다.

     둘째, 이 person이라는 개념은, 결코, 현대적인 개념인 personality라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실상, personality라는 용어자체는, 19세기 중반까지는 영어권에서 사용되지 않았던 용어이다. 그 당시까지는 character라는 단어가 어떤 사람의 개인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단어였었는데, 그 특성을 표현할 때 언제나 전제되었던 것이 ‘선악간’의 도덕적 평가였었다. 그런데 이런 character라는 단어가 personality라는 단어로 점차적으로 대체되어간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한 특성의 표현에 있어서 도덕적인 판단을 담는 것에 대해서 주저해 왔음을 보여준다. 대신, 중립적인 대체개념이나 용어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person이라는 단어에 또 다른 명사형태를 만들어서 personality라는 단어를 조합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 당시 일어난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나, 정신분석학의 유행이 크게 이런 용어의 대체에 편승했다고 볼 수 있다.

     person이라는 용어나 개념을 personality라는 용어나 개념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또한 도덕적 평가를 주저하는 중립적 개념이 담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이 personality라는 단어에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어 보여주는 일종의 외부적 표현이 중시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혹은 현시될 수 있는 이미지나 인상과 관계되는 것이 바로 이 personality이다. 반면, character는 그 사람의 내면적 덕성(virtue)이나 혹은 악성(vice)가 드러나는 도덕적 자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person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근대사회의 개인주의화된 사회속에서의 자기표출이나 자기의식 등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personality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결국 person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그 실상 그 용어 속에 personality의 개념을 넣어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person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쉽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Person은 무엇보다도 관계적이다. 결코, in-dividual(개인)이라는 개념이 앞서서 이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존 지줄라우스(John Zizioulas)라는 동방교회신학자는 person를 상호적 관계속에서 파악하여 그것이 성경적인 person개념임을 역설하였다. 그의 책 제목 자체가 [Being as Communion]이라고 하였는데, 아주 인상적이다. 그에 의하면, 원래는 사회적 역할을 의미하는 ‘프로소폰’(헬라어의 person)이나 ‘페르소나’(라틴어의 person)라는 단어가 성경의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나타내는데 적용되면서 혁명적인 의미변화를 겪게 된다고 한다. 곧 person이라는 단어와 성경의 삼 위의 그 ‘위’(한글의 ‘분’)를 나타내는 hypostasis라는 단어와 결합되어서 동일한 개념을 갖는 것으로 취급되면서, 그 이전의 헬라나 로마사회에서 사용되던 person의 개념에 혁명적인 변화가 불었다는 것이다.

     원래 헬라사회에서의 hypostasis라는 단어에는 역할이나 가면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person과는 전혀 무관하게 사용되었었다. hypostasis라는 단어는 오히려 사물이나 어떤 존재의 실재를 나타내는 ‘substance’라는 용어의 헬라어와 연결되어 사용되었었다. 이 복잡한 용어문제에 대한 논의를 접어두고, 간단히 말해서, 이 person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역할’을 나타내는 용어가 아니라, 어떤 사람의 substance를 나타내는 단어가 되었고, 또한 그 사람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그 무엇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person이 person이 되려면 하나의 존재, 곧 자신만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내가 나라는 perosn이 되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 유아독존하는 식이 되어서는 결코 person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한 분’(one person)으로서 불려질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절대유일한 존재로서의 한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 하나님은 결코 ‘person’이 될 수 없는 것이다. person이 되려면 그와 다른 어떤 존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절대유일한 하나님 한 분 외에 또 다른 존재를 상정하게 되는 “한 분 하나님”은, 다른 말로 하자면, 동그란 사각형이 되는 셈이다.

     어떤 존재가 person이라고 하는 것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존재가 person이 되게 하는 다른 존재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 바로 이 관계가 그 존재의 person이 person이 되게 하는 요소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다른 존재가 존재하는 것 없이는 나라는 존재는 결코 person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 그러니, person은 그 자체로서 관계이고, 그 자체로서 communion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개념으로서의 person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 바로 성경의 삼위 하나님의 세 hypostasis들을 세 persons로서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성경의 하나님이해와 인간이해에 일종의 혁명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런 person의 이해를 지금까지의 논의와 관련해서 정리한다면, 삼위 하나님은 세 분 한 하나님이신데,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 세분은 한 하나님이시면서, 서로가 없이는 각각 존재하실 수 없는 그런 모습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영원토론 자존하시면서 영원토록 관계하시는 그런 식으로 세 분이시면서 한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이 “세 분 한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사랑이실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고, 세 분 안에서 영원한 작정과 언약을 맺으시고, 영원토록 상호내재하시면서 한 하나님으로서 역사하신다는 면에서, 세 분의 세 persons되심은 우리 인생들의 ‘person’된다는 것에 엄청난 도전과 혁명적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 혁명적 메시지가 현대사회에 제공하는 함축된 의미가 무엇일까? 이 주제는 또 다른 시리즈로 글을 써야 할 만큼 넓은 주제이다. 그런 기회가 혹시 다음에 있을 것을 기대하고 우선 약속했던 시리즈글을 서둘러 마쳐야 할 것 같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Son Jae Ik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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