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Re:갈라디아서5장16절에 대한 이해: 이근호목사와 홀리죠이의 견해대조
갈라디아서5장6절에 대한 이해
For in Christ Jesus neither circumcision nor uncircumcision has any value.
The only thing that counts is faith expressing itself through love.(Galatians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질문1 - 영어 성경에서 neither 할례 nor 무할례가 has any value하다는 표현에서, neither~nor를 써서 할례와 무할례를 전면 무가치하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할례란 무엇을 상징하고 무할례란 무엇을 상징하는지요?
(
1.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할례를 빙자해서 '율법으로 인한 의'를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냥 남성 생식기 끝부분에 칼 대면 그만이니 얼마나 쉬운지!) 그것도 소용없는 일이며, 무할례 자란(이방인) 아예 처음부터 '의로움'에 관심조차 없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는 자이기에 명백하게 둘 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다는 말입니다.
(홀리죠이의 답변)
1. 구약에서의 ‘할례’란 일종의 상징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남자의 생식기의 껍질을 벗겨내는 것을 상징으로 삼은 것은, 그 생식기로부터 나는 자연적인 출생에는 참된 구원이 있을 수 없이 인류는 범죄하였기 때문에, 그 생식기의 껍질을 벗겨냄으로 인하여서, 자연적인 출생 외의 또 다른 출생이 인류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 된 셈입니다. 곧 믿음으로 출생한 자들만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상징적 예식이 된 셈입니다.
그런데, 이 예식이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예식의 의미를 간과해 버리고 그 외적 형식적 모양에만 현혹되어 버렸습니다. ‘율법’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의 율법이 주어진 의도와 목적에 의하면 율법은 “거룩하고 선한 것”(롬7:12)이었는데, 그만 유대교의 거짓교사들이 이 율법을 왜곡시키고 변질시켰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비판하신 것은, 바로 이 왜곡되고 변질된 것으로서의 율법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율법의 본래의 위치와 목적과 의도를 강화시키려 오셨지요. 그것이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할례의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할례라는 외적 상징으로서의 형식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사도가 ‘할례’도 중요하지 않다고 한 것은, 이런 외적인 것으로서의 형식적인 절차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중요한 것으로 바울사도가 여겼던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2:29)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에게”(30절) 돌려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할례는 그 형식적 절차나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 그 본질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곧 마음의 할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가 중요하지 않다는 바울사도의 말을 이해할 때에,
‘무할례”의 의미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것이라고 여겨서 이와 관련된 몇가지 논의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질문2 - The only thing that counts is faith expressing itself through love.에서 itself는 성령인가요, 아니면 성령의 조명을 받은 사람인가요?
(
2. 인간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완전히 인간을 배제하십니다. 단지 사용할 뿐입니다. 피아니스트의 음악 솜씨에 대한 찬사에서 피아노건반이 함께 찬사를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성도에게 있어 기쁨이란, 자신을 이렇게 영광의 그릇으로 사용하시는 것만으로 감사하다)
(홀리죠이의 답변)
2.
일차적으로 영어문법적인 면에서, itself는 성령도 아니고, 성령을 받은 사람도 아닙니다. 이 문장, 곧 faith expressing itself through love 에서 itself는 express의 주어인 faith를 말합니다. Faith가 faith 그 자체(itself)를 표현(expressing)하는데, 사랑을 통해서(through love)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믿음이 중요하다(count)고 말하는 것이 바울사도의 요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이 faith가 누구의 믿음인가 하는 문제를 질문해야 합니다. 그렇게 질문하신다면, 이 faith는 오직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faith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은, 할례도 무할례도 중요하지 않다고 한 것이 바로 사람들의 할례와 사람들의 무할례의 중요치 않음을 강조한 것이기 때문에, 바로 사람들의 faith를 대조시키고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faith를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faith이라느니, 성령님이 지니고 있는 faith이라느니 만약 하게 된다면, 그런 주장은 도대체 faith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소치입니다.
이런 것을 고려할 때에,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서 itself가 성령인가 성령을 받은 사람인가 할 때, 그 두개가 모두 아니면서, 오히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faith라고 답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한 말 중에서 피아노건반이 찬사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한 말은 옳습니다. 하지만, 이 피아노비유는, 지금 논의되는 상황에 적절치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사용하시는 것은,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피아노는 자의식이 없는 일종의 기계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기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성도의 특권입니다.
생각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질문3 -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케 하셨으니 그 고백을 하게 된 성도는 이미 (성령을 통해)성화를 이룬 사람인가요? (십자가와 관련해서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3. 주님의 사랑은 성도를 박살내면서 이루어지기에 '성도의 믿음'이 부각되는 경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홍해를 갈라 길을 내신 분이 영광받아야지, 그 가운에 두 다리 가지고 건너간 사람이 영광받을 일을 일체 성립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절대로 나의 믿음은 믿을 것이 못된다'라는 원칙이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믿음는 늘 박살나게 하는 것'이 주님이 주신 믿음의 특징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성화론은 '주님의 성화론'이요, '성령님의 성화론'이지 성도의 성화론은 될 수 없습니다.
성도의 성화론은, 기껏 인간의 자아실현론에 불과한 것이다. 즉 처음부터 신처럼 굴었다가 (내색은 안했지만) 성화론을 거론하면서 본격적으로 "하나님 덕분에 나도 역시 신이래!"라는 자신의 근원적 악마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낸 논리입니다.
(홀리죠이의 답변)
주님의 사랑은 ‘성도’를 책망하시고 징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히브리서12:8)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책망하듯이 당신의 자녀들된 성도를 주님께서는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책망과 징계가 “박살”이라는 식으로 표현될 수 있느냐는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후의 설명도 왜곡되어 있고 변질되어 있습니다.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비록, 믿음의 원칙들 중에 하나를 강조하면서, “믿음이란, '절대로 나의 믿음은 믿을 것이 못된다'라는 원칙이 들어 있습니다.”고 하는 말에 일리는 있지만, 그 일리가 잘못 적용되고 있음을 간파해야 합니다. 마치 좋은 연장인 망치를 가지고 자기 머리를 내려치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망치는 벽이나 나무에 못을 박을 때에 쓰면 아주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기 머리에 내려치면 망치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하지만, 머리는 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를 믿는 믿음과 주님이 주신 믿음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일까요? 나를 믿는 믿음을 부정하고,
이런 구분법을
마저
제가 보기로는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성화는 주님이나 성령이 되는 것이 아니고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죄인이었던 자가 주님과 성령님의 전적인 역사에 의해서 ‘성도’가 된 자들이 거룩해져 가야 한다는 것이 바로 ‘성화론’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성도의 성화론”이라고 표현한 것을 음미하면 할수록, 이렇게 선의를 두고 해석하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습니다. 그가 “성도”라는 개념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는 것 같고, “성도는 여전히 죄인이다”는 명제를 즐겨 강조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문제는 어떤 의미로서의 죄인이냐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죄인이지만, 의롭게 “된” 죄인입니다. 여기서 “의롭게 된”이라는 말은, 오해를 막기 위해서 좀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의롭다고 선언되어졌다”(proclaimed as righteous=justified)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통적인 그리고 정통적인 개혁주의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들에게 전가(imputation)되었다고 합니다. 전가되어진 의(imputed righteousness)를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들에게 의해서 전가되는 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되어집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죄인들 스스로는 행사할 수 없도록 죄인이었는데, 성령님의 역사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런 믿음을 가지는 것이 가능해지게 되었다는 것이 기독교복음의 핵심중의 하나인 칭의교리입니다.
사람중심의 구원교리가 절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에 의존하는 구원교리입니다. 문제는 좀 더 나아가서, 이렇게 의롭게 된 자들의 그 의로움이란 것이 한편으로는 완전히 성취되었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성취”라는 단어와 “완성”이란 단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설명을 위해서, 요한1서3:2-3을 인용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이 구절에 의하면, “지금”과 “장래”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장래”에는 그와 같아집니다. 그와 같아진다는 말은 지금 하나님의 자녀로 선언된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주와 같아진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그리스도의 순결함을 닮아서 그렇게 거룩하고 깨끗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이 된다는 유의 생각을 이 구절이 결코 지지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롭다고 선언되어졌(proclaimed as righteous=justified)지만, “장래’에 있을 그 일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들이 그 일을 소망하면서 자기를 쳐서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합니까?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들입니다. 바로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이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의 성화론”입니다. 이것을 “인간중심의 성화론”과 혼동하는 것은, 그렇게 혼동하는 사람이 얼마나 성경에 대해서 무지한 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의 신학이 얼마나 염려되고 두려운 신학인지를 알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앞에서 “전가된 의”(imputed righteousness)를 언급한 것을 환기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요한1서3장2-3절에 대한 설명을 참고로 해서, 한 단계 이 논의를 진전시키게 되면, 우리는 이 “전가된 의”가, 죄인되었던 자가 “성도”가 되는 순간에 성도에게 “선언”(proclaimed, 혹은 imputed)되는 것만이 아니고, 또한 “주입”(imparted)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용어를 사용하면 피상적인 신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홀리죠이가 천주교신학을 주장하는가 말할지 모릅니다. 이런 오해를 막기 위해서 이 용어들에 대한 로마천주교회와 종교개혁가들 간에 있었던 논의를 장구하게 들먹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성경구절 하나만 인용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1장30절에서 바울사도는,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사도가 말하고 있는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속함”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은택들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때문에 지혜로와졌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때문에 의로졌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때문에 거룩해졌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때문에 구속되었습니다. 성도가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곧 이어서 말하기를,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옳습니다. 주여, 오직 홀로 주께서만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바로 이런 면에서, 성도는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게 되었다”는 것과 더불어서 “거룩하게 되었다”고 바울이 선언하고 있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실상 이런 중복된 표현은, “되었다”는 말이 가질 수 있는 오해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의롭게 되었다’고 할 때의 “되었다’는 말이 법정적으로 선언적으로 그렇게 의롭다고 선언된 것만 아니고, 실제적으로도 또한 동시에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미하기 위해서 ‘예수는…우리에게….의로움과 거룩함이….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이 구절에 나오는 “지혜”와 “구속함”을 묵상해 보면 놀라운 메시지가 들어있다는 것도 기억해 두십시오.하지만, 지면상 그 논의는 생략합니다!).
앞에서 저는 선언적으로 되어진 의를 “전가된 의”(imputed righteousness)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이렇게 실제적으로 “주입된”(imparted) 의를 “주입된 의”(imparted righteousness)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죄인되었던 자가 성도가 될 때에 그리스도의 의가 한편으로는 “전가”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입”됩니다(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개신교에서는 “전가”를 주장하고 로마천주교회에서는 “주입”을 주장한다는 식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오해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전가”와 “주입”을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의”와 “성도의 주관적인 의”로 대조하면서 설명하기도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이런 칭의문제는 새롭게 각광을 받고 연구중에 있기 때문에 그 논의의 소개는 다음기회로 돌리고, 여기서는 단지, 성도는 법정적으로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적으로 의롭게 되어진 존재들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되어지고 실제적으로 의롭게 되어진 이 ‘되어짐’이 ‘완성된 것’이 아니고, ‘성취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된 것입니다. 이 성취된 것은,이제 ‘완성’의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완성의 날이 언제 올지 그리고 그 완성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사도요한도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원리적으로는 이미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와 같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도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와 같아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입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소망을 가진 자들이 힘써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는 힘쓸 수 없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힘을 쓸 수 있는 자들로 바꿔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이 글을 읽으시는 분마다 이 소망으로 인하여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이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가노님의 질문 자체로 되돌아가서, faith expressing itself love라는 구절을 설명하겠습니다. 실상, 이 구절은 로마천주교회나 개신교회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히 오해하고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로마천주교회에서는 이 구절이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우선된다는 증거구절로 삼습니다. 개신교회에서는 이 구절이 믿음의 우선권을 주장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 구절의 의미는 바로 itself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이가노님의 질문은 아주 탁월하다고 여겨집니다. 그것을 질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질문에 무엇이라고 답변했는지 기억하십니까? Faith 그 자체(itself)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사도의 요지는, 중요한 것은 할례라는 형식이나, 무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바로 믿음 그 자체를 표현하되 사랑을 통해서 나타내는 믿음 이것이야말로 진짜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문법적인 면에서는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개신교의 해석이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오직 믿음”으 구호를 외치면서 이 구호자체를 오해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에, 종교개혁가들이 주장했던 “오직 믿음”(sola fide)의 선언은, “믿음 자체를 믿는 믿음”이 아니고,오히려 “믿음이 그 믿음 자체를 사랑으로 표현하는 그 믿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면 그 믿음 자체를 스스로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그 생명됨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생명입니다. 믿음은 생명이기 때문에 그 믿음 자체를 드러냅니다.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4하)는 말씀이 진리입니다. 이렇게 그 자체를 드러내지 않게 되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죽은 믿음입니다. 생명이 있는 믿음이라면, 행함이 그 생명성에 의해서 드러나서 그 믿음이 참된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바로 이런 믿음을 증거하였고, 이 바울사도의 선언을 이렇게 해석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자기자랑에 근거한 것인양 폄하하고, 자기의를 추구한 것인 양 비판한다면, 그것은 비록 십자가복음을 논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사도들의 주장을 뒤집으면서 자신이야마로 사도들과 성경의 주장보다도 자신의 철학이 우위에 있는것이라고 선언하는 교만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마땅히 깨어져야 할 신학은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