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심자료

[스크랩] Re:뽁음과 복음의 제대로 된 구분-제대로 구분하시기를 바랍니다(2)

baromi 2006. 11. 27. 10:52
(정낙원님)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영을 좇는 것과, 육을 좇는다는 것을 구별하겠소.)
영을 좇는다는 것은? 그대가 말하는 착하게 살아야지 하는 불교의 팔정도같이 착하게 살라는 교리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고,
육을 좇는다는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말씀을 지켜보겠다고 하는 행함 신앙을 말하오. 차차 읽어 내려가면 분명하게 잘 알게 될 거요.

(양무리의 반박)

앞서도 지적했지만, 성경을 왜곡하고 있는 비판은 쓸모없는 비판입니다. 로마서8장4절은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이루셨다"는 말은 옳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게서 "다 이루신 것"은 구속의 모든 사역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이라 함은, 율법의 의식적인 요소, 시민국가적인 요소상의 율법들을 모두 이루셔서 다른 이가 대신해서 다시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은혜받은 자들, 작정된 자들은, 율법의 도덕인 요소들을 "이루어야"하는 의무가 주어져 있고, 이 의무를 능히 행할 수 있도록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이 성령의 법으로 인하여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바울사도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이 글을 읽으시는 이들이 마음을 열고 읽음으로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정낙원님)

이렇게 말하면 그대들과 같이 성화를 말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어디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까? 구원이야 당연히 예수를 믿음으로 받지요. 그러나 이제 구원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것이지요 라고,,,,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은 구원받기 전에 지켜야 할 말씀이 따로 있고, 구원받고 난 후에 지켜야 할 말씀이 따로 있는 것으로 분리시켜 놓지 않으시고 모든 말씀을 다 지켜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소.
예수님께서 천지가 없어질지라도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소.
그러면서 내가 율법을 헤하려고 온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러 왔다고 하셨소.

(양무리의 반박)

착각은 금물입니다. 도대체 "율법을 완전케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나 알면서 하는 말입니까?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종이조각에 적혀져 있는 글자 하나 하나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해를 하는 것 같군요. 율법을 완전케 한다는 것은,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종교인들에 의해서 왜곡된 그 율법의 정신, 그 근본핵심을 다시 확인한다는 뜻입니다. 문자적인 성취가 아니라, 바로 그 정신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구속의 공로에 기초해서, 이제는 율법의 의를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서 이루어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았지요. 당연합니다. 지금도 그 율법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이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지, 율법은 다 이루어졌으니, 우리는 율법과는 이제 상관없다 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로마서8장4절을 보십시오: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말도 바로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우리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말미암아 그 성령을 좇아 행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하시는 일인즉, 우리가 육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우리가 성도가 영을 좇아 행함으로 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인데,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의를 자랑하는 일입니까?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성도로 삼으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지게 하시는 하나님께 홀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이 있을진저.

(정낙원님)

즉 예수님께서 구약의 말씀이든 신약의 말씀이든 모든 말씀을 성취하신다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은 옛 언약에 속한 십계명(율법)만 이룬 것이 아니고 새 언약에 속한 모든 말씀들이요. 그대들이 줄기차게 지켜야 한다는 모든 명령법들이요.이 사실을 안 믿고 아직도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그대 같은 사람들에게, 십계명이든, 산상보훈이든, 바울의 명령법들이든 다 지켜야 하는 말씀들이 라고 하면
그대들은 에이! 사람이 어찌 말씀을 다 지킬 수 있습니까? 라고 하며 다만 최선을 다해서 지키는 데까지 지키면서 살아야 하는 거지요 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최선을 요구하는게 아니라 완전을 요구합니다. '아버지가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고 합니다. 에이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같이 온전해 질 수가 있습니까 라고 말하진 마시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인간을 원하는게 아니고 온전한 인간을 원하시오. 하나님은 50%, 60%, 70%, 80%, 90%를 원하는게 아니고 100% 온전한 인간을 원하신다 말이요.

그렇다면 어떻게 아버지와 같이 온전해 질 수가 있겠소. 온전하라는 명령도 하나님의 말씀인데,,,이 말씀도 분명히 지켜야 할 말씀이 아니겠소.

(양무리의 반박)

우리 힘으로는 우리 성도가 아버지와 같이 온전해 질 수 없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 온전함이라고 한다면, 그 온전함을 이루기 위하여, 아들 하나님을 보내시고 또한 그 아들의 영도 함께 보내셔서 역사하시니, 그 온전함을 우리도 이룰 수 있는 것이지요. 제가 교만하다구요? 참 어이가 없는 비난입니다. 그 온전함을 내가 이룰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교만일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인하여, 온전해질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겸손이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요.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피아노가 그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자기를 자랑할 수 없지요. 피아노의 아름다운 선율은 바로 피아노를 치는 그 사람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람은 피아노 이상이지요. 피아노는 의지도 없고 생각도 없고 그냥 인격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라는 피아노를 치실 때에는 기계적으로 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피아노가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능동적으로 반응해서 피아노선율이 울려나도록 피아노를 치시지요.

그렇기 때문에, 피아노를 치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하면서도, 그 찬양은 곧 피아노된 성도 자신이 하는 것이지요. 성도 자신이 하는 것이라고 해서, 성도 자신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성도를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셈이지요. 성도로 말미암아 그렇게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성도를 일종의 기계라고 생각하거나, 기계보다 못한 죄죄죄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지 않을까요?

(정낙원님)

그럼 알다시피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들에겐 온전 할 수가 없으니 인간의 육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온전하신 예수님께서 다 지키도록 하셔서 예수가 다 지킨 이것을 성령을 보내서 성도에게 믿어지도록 하는 것이지요.

(양무리의 반박)

성령님께서 오셔서 성도로 말미암아 믿어지도록 한다는 것은 옳은 말씀이지만,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믿어지도록 한다는 것에만 국한시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어지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공로에 기초해서, 이제는 율법의 요구하는 바를 이루어가게 하시는 일도 또한 하십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니라"(롬8:13-14)

님께서는 지금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으십니까?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믿는 것에 국한됩니까? 인도하심을 받아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없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하니다. 바울의 말입니다.

(정낙원님)

그러니 성령께서 믿어지게 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지킨 것을 자기가 지킨 것을 간주하고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같이 온전하신 분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온전하신 예수님을 믿게 해 주심으로 예수 안에서 즉 예수를 믿음으로서 온전하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지요. 예수를 믿는 것이 인간의 이성으론 불가능하니 성령이 오셔서 믿게 해 주셔서 믿는 것이지요.

(양무리의 반박)

예수님께서 지키신 것을 자기가 지킨 것으로 간주하고 살게 된다고 하는 말은 일견 옳은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지금 내가 성령 안에서 행해야 할 의무를 무시하게 된다면, 복음을 심히 왜곡하는 일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서신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사도는 그곳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갈5:25)라고 합니다. 예수가 다 지킨 것을 내가 지킨 것으로 간주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렇게 주장한다면"(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산다면!!!!), 또한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왜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는 말씀을 부인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다 지키셨는데, 성령 안에서 행해야 할 그 무엇이 남은 것처럼 바울사도가 말하는 것이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지키셨는데, 왜 성도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행하라"고 말합니까? "행하라"고 했으면 행하면 됩니다.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님께서는 이 "성령안에서 행하라"는 바울의 명령을 사단이 전하는 것으로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을 말하나, 성경을 뒤집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께서 님의 눈의 비늘을 벗기시기를~

(정낙원님)

그렇다면 진정 그 안에 성령이 계신 분이라면 성령이 어떻게 하겠소.
말씀을 지키는 쪽으로 성도를 끌고 가겠소 예수님이 자기 대신에 다 지켰다는 것을 믿게 하는 쪽으로 끌고 가겠소.
그야 당연히 예수를 믿게 하는 쪽으로 끌고 가지 않겠소.
왜냐하면! 바울처럼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았어도 그 속에 두 법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니요.
그래서 신구약의 모든 말씀들은 지금도 인간을 고발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를 만들어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오.

(양무리의 반박)

님의 실수와 오해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를 바라보면서 또한 그 예수님의 뜻을 행하도록 하는 것에 있습니다. 모두 다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님은 하나만 강조하고 다른 것은 무시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반신불수로 만드십니다.

뽁음입니다.

하지만, 올바른 복음을 보십시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2)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한 것이 예수만 바라보고 그냥 아무 것도 행치 않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과 예수 안에서 행하는 것이 왜 대립되는 것일까요?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 안에서 예수께서 성도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어가는 것이야말로 성도로 부름받은 자의 영광이지 않을까요? 제가 성도에게 촛점을 맞추고 자기자랑과 의를 늘어놓는 것인가요?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제가 자기자랑과 자기 의를 이루어가고자 한다면, 님께서는 바울사도도 정죄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정낙원님)

(이렇게 예수만 바라보게 하는 것이 이근호 신학의 전부요. 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할 신학이 아니겠소. 이근호 신학은 누구든지 이 사실을 부정하면 부모이든 마누라든지 자식이든지 20년 아니라 50년 된 친구라 할지라도 책망을 합니다. 왜? 그런 줄 아시오. 복음이 훼손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인정머리 없이 사납게 하는 것이요. 이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근호 목사는 성깔대로 살고 인정머리는 파리 똥 만큼도 없고 의리도 없다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요. 손무성 목사가 이 심정을 이해하였다면 삐치지 않았을 것이요. 손 목사의 말대로 앞으로 3년 안에 제 2의 손무성이가 나온다는 말을 어쩌면 맞는 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요. 왜냐하면! 또 손 목사 같이 행함을 주장하다가 이근호 목사에게 면박을 받으면 자존심이 상해서 삐쳐서 반기를 들고 이근호 신학은 이단이야 라고 나올 수도 있겠지요..)

(양무리의 반박)

바로 이근호목사의 신학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바로 이야기해 주고 있지요. 한쪽만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아니고 뽁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뽁음밥이라도 되면 맛이라도 있는데, 이근호목사의 뽁음은, 그만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인정머리도 없"는 뽁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자기 성깔하나 고치지 못하는 뽁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겉도 속도 모두 "파리 똥만큼 의리도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제 2의 손무성, 제 3의 손무성이가 나올 것입니다. 그 뽁음의 허상을 간파하게 될 것입니다.

기대하기는 바로 정낙원님이 얼마가서 제 4의 손무성으로 등장하게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님에게 함께 하신다면...

(정낙원님)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오직 십자가의 피만을 외치는 이근호를 때려 잡을라고 야단법석을 펴는게 아니요.  지금 그대들이 하는 놀음이 마귀적인 놀음이라는 것을 모르겠소.

(양무리의 반박)

오직 십자가의 피를 외친다고요? 성령의 역사를 왜곡시키는 것이 십자가의 피를 외치는 것입니까? 십자가와 성령은 언제나 함께 합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바라보게만 하지 않고, 그 십자가를 또한 짐지게 합니다. 짐지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짐을 지고 행하게 합니다. 그런데, 님들은 이 십자가의 짐을 거부합니다. 짐지고 있다고 하면서 도대체 그 십자가의 짐을 지고 행하지 않습니다. 책망받을 종들이지요. 종이라면 다행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짐을 지고 행하는 자들을 향하여 마귀들의 놀음이라고 하고 있지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죄를 짓고 있는 줄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근호목사의 잘못된 신학이 님의 눈을 가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정낙원님)

제가 왜? 마귀놀음이라고 하는지 아시오.
그대들은 계속하여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육신의 법을 좇고 있기 때문이요.

(양무리의 반박)

육신의 법이 아니라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을 좇고 있는 것입니다. 몇번을 강조해야 하나요? 성령을 좇아서 "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좇아서" 행하는 것입니다. 님은 이렇게 성령을 좇아서 행하는 것이 "육신의 법을 좇'는 것이라고 보십니까?

도대체 '성령을 좇아서 행한다는 것"을 이해나 하십니까? 자꾸 육신의 법을 좇아서 행한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계속 작성중...이제 정말 시간이 없군요.

나머지 글은 오늘 저녁쯤에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써놓은 글이라도 충분히 반박되었다고 여기지만, 시작한 것 끝내야하겠지요...

그럼.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쌀쌀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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