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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꼬마의 ‘인생은 아름다워’

baromi 2006. 11. 24. 23:13
유대인 꼬마의 ‘인생은 아름다워’






[한겨레] 체코 프라하에서 남쪽으로 150㎞ 떨어진 부데요비체. 9살짜리 요한은 3살 위인 형과 장난치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는 유대인 꼬마다. 소아과 의사인 아버지와 음악에 조예가 깊은 어머니 아래서 태어난 그는 축구라면 사족을 못쓰고 예배시간엔 몰래 빠져나갈 궁리에 바쁘다.

그러나 수십만의 나치 군대가 체코로 진주해 들어오면서 소년의 일상은 눈에 띄게 변하기 시작한다. 며칠 뒤 요한네 대문엔 통보문이 붙는다. 유대인이 종사해서는 안 되는 직종과 가서는 안되는 장소가 열거돼 있다. 아버지는 청진기 대신 정원사용 가위를 손에 들어야 했고, 요한은 공공 수영장, 실내 스케이트장에 가는 게 금지됐다. 부모님은 “머지않아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갈 거야”라고 위로했지만 며칠 뒤엔 공원과 사무용 건물, 저녁 8시 이후 공공도로에 대한 통행금지령까지 내려졌다. 몇달이 지나자, 요한은 학교를 그만둬야 했고 기독교인 친구들과 말을 섞는 것도 불법이 됐다. 이제 요한은 방 아니면 아파트 뒤뜰에서만 숨죽여 놀아야 했다. 부모가 ‘이 나라를 떠나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는 순간, ‘유대인은 나라를 떠날 수 없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한여름에도 집에만 갇혀 지내는 자녀들을 걱정한 일부 유대인 부모가 나치에게 이들이 모여서 놀 수 있는 실외 수영장을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다. 어찌된 일인지 더러운 강가이긴 했지만, 입장료를 내면 유대인 청소년들이 모여서 노는 것이 허락됐다. 악취가 나는 강이었지만, 이들에겐 이 물조차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여기서 함께 노닐던 루다 스타들러. 스포츠와 공부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다른 무엇보다 학교를 그리워했던 루다는 글쓰기에 대한 갈증으로 신문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신문 이름은 체코어로 ’뒷말’을 뜻하는 <클레피>. 일단 강가에 노는 아이들 한명한명에 대한 유머에 찬 논평을 모아 낸 신문 1호가 아이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자 다른 아이들도 기자로 끌여들여 2호를 만들어냈다. 물론 발행부수는 단 한부. 스포츠, 만화, 유머 등 가벼운 내용으로 구성돼 집집마다 돌려 읽었지만 이 신문은 점점 유대 청소년들뿐 아니라 이 지역 유대사회의 중요한 생명선이 돼 갔다. 공부도 놀이도 금지당한 아이들이 이렇게라도 살아내려 하는 모습 자체가 그 유대 사회에 큰 희망이 됐기 때문이다. 3쪽으로 시작한 신문은 33쪽으로 늘어났으며, 각종 기고와 참여로 넘쳐났다. 물론 요한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호응이 커질수록 아이들 사이에선 논쟁이 격렬해졌다. 계속 이런 가벼운 내용만 담을 것인가? 위험하더라도 정치적인 발언을 해야 하지 않나?

2년간 22호를 만들어내고 논쟁도 신문도 끝났다. 요한이 11살이 되자 유대인은 모두 옷에 유대인 표식을 달아야 했고 강가도 폐쇄됐으며 죄다 ‘게토’에 갇혔다. 이제 유머로라도 신문을 만드는 건 목숨과 바꿔야 할 일이 돼버렸다. 몇달 뒤 요한은 부데요비체의 모든 유대인들과 함께 ‘테레지엔슈타트’라는 지역으로 이송된다. 여기서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집단 수용되면서 가족과도 헤어진다. 빈대와 바퀴벌레가 들끓었고 식사는 멀건 스프와 곰팡내 나는 빵이 전부였다. 여기가 나치 점령의 마지막 지옥인줄 알았다. 하지만 이곳도 천국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1년이 채 되지 않아 요한은 아우슈비츠로 이송된다. 그리고 18개월간 차라리 죽음이 더 나은 상태로 추락한다. 다행히도 요한은 살아남았다. 나치가 패망하면서. 그러나 어머니는 가스실에 끌려가고 아버지와 형은 총살당한 뒤였다. <클레피>를 함께 만들었던 친구들 중 살아남은 친구는 거의 없었다.

이 책은 나치 점령시대를, 9살부터 15살까지 살아낸 앙증맞은 한 소년의 실화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 중 그들에게 다가올 미래를 잊기 위해서 몰두했던 <클레피>를 만들던 시절에 가장 많이 할애한다. 신문을 만드는 그 순간만큼은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던, 가장 비극적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행복했던 그 시절. (<클레피>는 현재 프라하의 유대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자꾸 떠올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에 다가가게 만든다. 숨가쁘게 진행되는 상황, 깔끔한 번역도 단숨에 읽게 하는 미덕이다.

강김아리 기자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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