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목사님의 십자가 신학 정립을 위해 잘못 끼운 '십자가'라는 첫단추 (십자가신학의 문제점과 수정을 촉구하며)
이근호목사님의 십자가신학(바울의 십자가와 구분해야 함)에서는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습니까?’ 라는 질문에 ‘예 믿습니다’가 안 된다. 혹시 여러분의 교회에 이근호목사님이 말하는 십자가 신학을 따르고 계신분이 있다면 꼭 질문해보라.
‘00목사님! 00형제님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 믿습니다’ 라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십자가신학을 따르고 배우시는 분들이 ‘네 믿습니다’라고 한다면 이근호목사님이 말하는 십자가 신학의 공격 대상이 된다.
이근호목사님의 십자가신학으로는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 없는데 나온다는 것은 제대로 십자가 신학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십자가 신학은 십자가에서 인간이 죽었는데 인간인 자신이 ‘내가 믿습니다(나는 성도다. 나는 기도했다. 나는 구제했다. 나는 사랑했다.....)’가 나오면 인간이 높여지기 때문에 안 된다는 신학이다. 왜냐하면 성도(새 사람이 되었다고 하더라도)까지도 철학적 인간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그 범주에 넣어버리기 때문에 '믿습니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얼마 전 이근호목사님께 11월 7일 부산강의를 마치고 질의를 했다. ‘목사님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습니까?’ 이근호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근호: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나와 하나님만 알면 되지 않습니까?’ 이미 이근호목사님의 십자가 신학에서는 ‘믿습니다’를 대답할 수 없는 신학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주 상식이하 같은 질문을 한 것이다.
그런데 같이 모임에 참석했던 다른 목사님들께서는 저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 이근호목사님의 입장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셨던 것 같다. 이근호목사님께서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 것은 너무 어처구니없는, 그야말로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라서 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해석과는 달리 자유게시판에서 공개된 바와 같이 이근호목사님 스스로 십자가 신학에서는 ‘믿습니다’가 안 되는 신학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근호목사님의 십자가 신학은 무엇이며, 무엇이 문제인가? 십자가신학은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1. 이근호목사님의 십자가 신학이란 무엇인가?
십자가신학이 주장하는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연합하여 그 능력으로 죄에서 해방된 부활한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한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 인간을 죽여 성도 만들 때와 동일하게 성도까지도 인간으로 간주하여(성도까지도 철학적 인간으로 적용하여) 계속적, 반복용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근호목사님은 최근 예수사회 10p 6째 줄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날마다 죽이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날마다 주님께서 분주하게 일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말씀이 성도 안에서 살아나게 하기 위하여 늘 성도를 죽이시면서 말씀 자체의 능력은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만이 증거 되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라고 했다.
요약하면 성도라는 것은 십자가에 계속 반복해서 죽게 함으로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만 증거 하게 하려고 처음부터 있다고 보는 것이다. ‘구원 받게 된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십자가에 죽게 하기 위한 반복용 십자가’란 말이다. 이런 주장을 한 복음주의 신학자가 어디 있는가? 이근호목사님 외에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 문제점 1
이런 신학을 이근호목사님의 혼자 내놓은 십자가 신학, 십자가 복음(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와 구분해야 함)이라고 한다.
위와 같은 십자가 신학을 내어 놓은 성경본문의 근거를 이근호목사님은 고린도전서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말을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여기 바울이 말하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말의 의미는 문맥상 주님께서 성도를 십자가에 날마다 죽이신다는 근거로 말하는 내용이 아니다. 이것이 이근호목사님의 실수였다.
문맥을 보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바울이 여기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말 속에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죽는다든지’ ‘십자가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의미가 그 어디에도 없다.
문맥을 보라.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다른 헬라어 사본 인용 - (나는)죽음의 위협을 당합니다. (나는) 죽음을 경험합니다- 표준새번역 고린도전서15장 아래 페이지)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고전15:30-35)
결국 이근호목사님은 추측과 선입견으로 십자가신학을 정립하기 위해 본문을 재해석하여 조립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 누구도 말하지 않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단번에’ 다 이루신 십자가가 아닌 ‘반복용 십자가’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로마서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히브리서 10: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 반복용 십자가로 만든 십자가신학의 배경과 이근호목사님의 큰 실수
이근호목사님이 십자가 신학을 정립하게 된 것은 한국교회 내에 무분별한 ‘소유주의- 기복적 소유주의, 목사들의 권위소유, 노회, 총회원들의 권력소유, 교회확장과 교회소유, 목사가 교인소유, 율법주의, 행위주의...등.’의 타락한 모습을 보고 이를 극복 하려는 데서 나온 신학이다. 그렇게 하려다 보니 모든 것을 ‘내가’ 소유해서는 안 된다(내가 믿습니다. 내가 행했다. 나는 성도다 라는 것 등....)는 사냥에 나선 것이다.
이것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신학은 반복용 십자가, 즉 성도까지(성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 가게하는 행위까지)도 철학적으로 규정한 인간과 동일화 시켜 십자가에서 계속 죽여야 된다는 십자가 신학 밖에 없었던 것이다.
2.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
바울이 말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은 모든 세상에 대해서 심판을 확정한 것이요, 인간에 대해 저주를 확정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능력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죄에 대해 죽고, 죄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예수와 함께 연합하여 부활한 성도(새 사람)가 의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살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에베소서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αποκαταλλαξη:아포가탈락세 : 헬라어 시상은 제1과거로 되어 있다.)
곧 헬라어에서 제 1과거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1회적 사건의 의미를 담고 있는 시상이다. 곧 단번에 끝났다는 의미다, - 의문이 가시면 네이버 지식검색에서 ‘제1과거’ 검색해보라. - http://blog.naver.com/t016mm?Redirect=Log&logNo=120011267388
즉 십자가로 원수된 것을 반복해서 소멸한다는 말이 아니라, 단번에 십자가에서 소멸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근호목사님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고 십자가신학을 정립하면서 ‘십자가를 반복용’으로- 성경에도 없는- 정립하여 성도의 역사를, 역사속의 교회를, 유기체적 성도를, 성도가 주안에서 사는 삶 까지도, 성도가 고백하는 ‘믿습니다’까지도 철학적 인간이 행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나’를 높이게 되는 것으로 간주하여 십자가에 반복해서 죽여야 하는 것으로 적용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니 십자가에 달려 한발작도 나올 수 없는 ‘죄인임을 알게 된 의인이라는 이상한 의인’으로서 십자가만 자랑해야 된다는 것이다. (바울이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아래 문제점 2를 참조) 여기에는 새로운 피조물의 부르심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자의 삶도 없고, 성령 안에서 행하라는 말도 버리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목적에서 멀어지게 했고, 이근호목사님은 자신의 십자가신학에 근거하여 성깔대로 살아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성경은 성도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고 있다.
에베소서 4:17-20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에베소서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 문제점 2
그러다보니 이근호목사님은 갈라디아서6:14-15절을 해석하기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라고 한 내용까지도 왜곡하게 된 것이다.
예수 사회 8p 22줄에 이근호목사님은 이 부분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즉 사도바울은 십자가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온다. 계속 십자가에 못 박힘을 세상을 향해 증거 하려 했다.’ 고 한다.
지나친 왜곡이다. 바울이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이유가 과연 문맥상 그런 것인가?
바울이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15절 마지막 부분 때문에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문맥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표준새번역 성경을 참고 해보자.
“ 14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15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표준새변역 갈6:14-15)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은 ‘의롭게 됨’ ‘구원됨’이 세상이나 나 자신으로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세상 것으로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요, 자기 자신에게도 안 되고, 할례 받고 안 받고는 아무소용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롭게 됨’ ‘구원’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하다는 것인가? 세상 것이나 인간 자신으로 안 된다는 것이 십자가가 사건이었다. 대충고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지음을 받는 길’밖에 없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 한다.(고린도후서 5:17[개역]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렇다면 옛사람(인간)을 십자가에 죽이고 다시 새로운 피조물(성도)을 만드는 능력이 무엇이었더뇨?에 대해 바울은 ‘십자가의 능력’(1회적 사건으로 단번에)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기에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13:4 [개역]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 문제점 3
이근호목사님은 예수사회 9p 15줄에서도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살아난 성도마저도 철학적 인간의 범주에 놓고 계속 죽어야 된다는 문제점을 보였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이미 구원받은 이상 도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돌아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다음의 성경구절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3) 이들이 이해하기를 , 이미 살게 된 자에게 ‘죽었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그들 식으로 생각하기를 사도가 이렇게 말해야 옳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미 살았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들어 있느니라“ 라고 말이다. 이제 두 번 다시 죽음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가 왜 ‘죽었다’는 표현을 성도에 대해서 써야만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모든 일의 초점이 결코 우리를 ‘살려냄’에 있는 것 아니라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사용하셨음을 말씀하기 위해서이다.” 라고 했다.
그러나 골로새서3:3의 말씀이 정말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을까? 그렇지 않고 이것 역시 십자가 신학의 정립을 위한 왜곡된 해석이었다.
본문의 문맥을 따라가 보자 골고새서3:1-10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위 본문에서 죽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말이지 반복용으로 십자가에 죽어야 된다는 당위성을 제공하는 말이 아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에 강조점을 두고 써내려가는 문맥이다. 이근호목사님께서 사용하고 있는 ‘죽었고’라는 의미로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너희는(성도는) ‘죽었고’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가 되었던 옛사람의 습성인 땅에 것을 향하는 것에 대해 죽었고’라는 말이지 십자가에 계속적으로 반복용으로 죽어야 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위에서 본 골로새서3장1-10절의 의미는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땅엣 것을 향하여 살면 안 돼!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 받는 것이 돼!, 우리가 새사람을 입었으니 창조하신 자의 목적대로 그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라는 것을 잊지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안에서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 성도(철학적 인간으로 간주하면 안 됨)보고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단코 인간 스스로 이렇게 하자는 말도 아니며, 인간보고 이것 지키자는 말도 아니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안에서 성도에게 그 분의 부르신 목적을 좇아 마지막 때까지 주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인간 스스로의 힘으로가 아닌)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세우시고자 하려는 것이다.
골로새서 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에베소서 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결국 앞에서 보았듯이 이근호목사님은 자신의 십자가 신학을 지나치게 합리화 시키려다보니 성경까지 왜곡하고 마는 우를 범하는 대 실수를 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근호목사님께서 십자가신학(십자가복음- 바울의 십자가와 구별되어야 함)에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온다. 계속 십자가에 못 박힘을 세상을 향해 증거 하려 했다.”(예수사회 8p)는 논리를 폈다는 것 차체가 잘못되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는 “성도를 날마다 죽이시는 반복용 십자가”라고 하며 근거를 삼았던 고린도후서15:30의 “나는 날마다 죽노라”나 골로새서 3:3 “죽었고”라는 근거로 삼았던 것부터가 잘못된 출발이었고 잘못된 해석이었다.
그래서 이근호목사님의 십자가신학은 바울이 말하지도 않았던 ‘십자가’로 정립했기 때문에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습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에도 ‘믿습니다’가 안 되는 신학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근호목사님의 십자가신학에서는 ‘인간’=‘나’=‘성도’ 모두 같은 동일선상에 서 있는 인간만으로 보고 있다.
그러다보니 “성도는 있는데 성도는 없고 교회는 있는데 교회가 없고 살았다고 하지만 계속적으로 죄밖에 못 짓는다는 말만하는 인간만 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계속적으로 죽기 위해 성도라고 말만하는 ‘인간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죄 아래에 계속 매여 있을 뿐이다, 이근호목사님께서 정립한 십자가신학에서 말하는 십자가에 계속 맴돌며 죽어야 하니, 기쁨 없이 성깔대로 살아가는 성도라고 말만하는 인간들의 군상만 가득하게 만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새사람으로, 즉 성도로서 부르심의 목적대로 사는 부활의 삶까지도, 성령 안에서 살아가야하는 성도의 그 어떤 행위마저도 의미 없고, 십자가에 반복적으로 죽여야 하는 것으로 만든 신학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들
1. 행하는 것은 의미 없음을 절감 2. 행해도 죄니 안하고 말지식의 삶 3. 스스히 성깔대로 살아가기 4. 십자가 잣대로 정죄하기 5. 삶에 기쁨을 점차적으로 잃어감 6. 방종하는 삶
그 외 신학적 결과는 이미 2000.8.22 박길현 목사님께서 이미 지적한바가 있다.
아직도 나의 바람이 있다면 이근호목사님께서 이 십자가신학의 출발점부터 잘못되었음을 알고 다시 첫 단추부터 수정하여 끼웠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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