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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 한번구원영원구원?(3장-2)-포슨, 네가 중생을 아느냐?

baromi 2007. 7. 25. 11:12

도슨은 구약성경에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의 교리가 없다고 하면서

그 예들로 '언약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일관성이 없다고 하였다

 

그 점을 홀리죠이가 비평하였다. 도슨은 언약신학을 제대로 모르고 있음에 분명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글은 도슨의 무지와 편견이 그것 이상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무슨 말을 두고 그것을 알 수 있는가? :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것의 정당성은 '거듭남'(regeneration)의 교리에서 발견될 것이다. 옛언약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중생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중생하지 않았던 것이다(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계속해서 똑같은 원리가 새 언약에 적용된다).

  그러나 '중생'의 범주는 우리가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사용할 기준으로서는 적절하지 못하다. 구약의 상황 속으로 들어갈 그 중생의 개념을 읽으려는 것은 무시간적이기 때문?공간을 초월한 시대착오적인 그 무엇이다. 새언약에 관한 예언들에는 이 개념에 대한 암시만 있을 뿐이다"(p.69).

 

도슨의 이런 말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이런 문제점을 지적해 낼 줄 아는 식견들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비평을 시도하고 있음을 유의해 주기 바란다. 도슨은 '우리가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사용할 기준'으로서 '중생'이란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한다.

 

도슨의 말은, 그렇다면, '한 번 구원' 얻는 것, 그리고 '영원?구원' 얻는 것이, '중생'과 관계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중생'과 관계없이 '한 번 구원'을 이야기할 수 있고, 나아가서 '영원한 구원'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도대체 그가 '중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니고데모와 같이 유대인의 관헌이요, 똑똑한 지성인이요, 정치적 식견이 뛰어난 그 어떤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중생'함이 없다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또한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셨다(요3). 도대체 '중생'함이 무엇이길래, '중생함'이 있어야만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고, 또한 '들어갈 수 있다'고 암시하시는 것일까?

 

그런데, 도슨은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무색하게 해 버린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이 주장에 있어서, '중생'의 개념은, 이 메시지의 핵심이요 관건이다. 그런데, 도슨은 전혀 무관한 주제라고 제쳐놓으려고 한다. 엉뚱한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그가 과연 '중생'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심히 궁금해 지는 대목이다.

 

과연 구약성경의 본문에 '중생'을 읽어내려고 하는 것은, 무시간적인 것인가?

 

'중생'은 물론,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적 전개에 있어서 핵심으로 떠오른 주제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생'이 그 이전에는 없었다고 보는 것은, '종교개혁'의 의미를 전혀 무시해 버리는 것이고, 종교개혁의 신학이 어디 달나라에서나 외계에서 툭 떨어진 것처럼 여기는 처사이다. 종교개혁이 종교개혁이 되는 것은, 종교개혁의 주장들이 바로 성경에서 원래부터 있어왔다는 것이고, 원래 있었던 것을 새롭게 발견하고, 새롭게 조명하고, 그 새로운 의미, 혁명적 의미들을 인식하게 되었다는데 있다. 도슨은 지금 이것을 송두리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상황 속에 중생을 읽으려고 하는 것이 어떻게 무시간적일 수가 있는가? 신약을 읽을 때에 구약의 빛의 도움을 받고, 구약을 읽을 때에 신약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신구약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구약을 읽을 때에, 신약의 중생의 교리의 빛으로 읽는 것이 왜 잘못인가? 왜 무시간적인 것인가?

 

오히려, 그것이 사도들이 했던 일이 아닌가?

 

바울사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5:6)고 하지 않았던가? "저희(구약백성)에게 당한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11)고 하지 않았던가? 야고보선생이,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 하였을 때의 그 '진리'가 구약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 아니더란 말인가? 베드로사도가 "우리의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시118:22)을 인용하는 것은, 그가 '거듭남'을 구약성경속에 잡아넣고 있는 무시간적인 행위인가?

사도요한이 니고데모에게 '중생'을 설명하실 때에, 구약에 뱀이 들려진 것을 인용하시면서(요3:13-15) 설명하지 않으셨던가?

 

도슨의 거짓을 들춰내기 위해서 또 무슨 말을 더할 것인가?

 

그렇다면, 도슨은, 이 주제,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이 주제에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 그 답이 있고, 그의 오해가 또한 묻어 있다. 읽어보자:

 

"누군가가 중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탈락했다고 말하는 구절이 단 한 구절도 없다. 그들은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으며 자신들을 구원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떨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신약적인 의미로 '한 번 구원받지' 않았기 때문에 탈락했다는 것은 당치 않다. 구약 그 자체의 기준에 의해서 그들은 구원을 잃은 것이다. 한 때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 그 믿음에서  떠난 것이다. 한 때 성령을 소유했던 사람들이 그 성령을 상실한 것이다. 시작은 했지만 마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출애굽한 이들이 다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포로로 잡혀 간 많은 사람들이 모두 다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p.69).

 

그의 말에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 그의 견해에 의하면, '중생'과 '언약'은 거의, 혹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그에게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의 백성들 각 개인들은 도대체 언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도슨은 전혀 질문하지 않고 있다. 구약의 백성들이 언젠가 막연하게 어느 싯점에서 모두 다 언약을 맺은 것으로 전제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육체적, 인종적, 혈통적 관계를 통해서만 맺게 되는 언약과, 영적인 원리,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지는 새언약을 도대체 구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물론, 이런 나의 말은, 신약시대에 주어지는 '새언약'을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과 맺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나갈 것이다!)

 

앞에서도 말하였거니와, 시내산언약과 새예루살렘의 언약을 도슨은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사용한 단어를 이용해서 말하자면, 이 두 언약을 "융합"시켜버리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 있어서의 '언약'이 이렇게 두가지로 구분되는 것은, 너무 중요한 메세지를 담고 있다. 하갈로 대표되는 시내산언약과 사라로 상징되는 새예루살렘의 언약의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곧, 시내산언약에 의해서 언약의 자녀요 백성된 자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새예루살렘의 언약에 의한 언약의 자녀요 백성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위 '언약의 자녀'들이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언약의 자녀들인가 하는 점에서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구약의 '남은 자' 사상의 핵심이다.

 

겉으로는, 혈통적으로는, 민족적으로는, 소위 '언약의 자녀'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참된 언약의 자녀가 '아닐 수'가 있다는 것이다. 유아세례를 받은 자가 '언약의 자녀'라고 불리워질 수는 있지만, 그가 참된 새언약의 자녀가 '아닐 수'가 있다는 사실과 똑 같은 것이다. 믿는 자의 자녀가 '거룩'하다고 할 지라도(고전7:14), 그것이 반드시 '구원받았다'는 의미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언약의 개념이 성경에서는 언제나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도슨이 알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요, 또한 그와 더불어 칼미니스트가 된 사람들도 또한 그렇다. 성경을 말하면서도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혈통과 인종, 육체적 관계를 통해서 맺게 되는 '언약'과

영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함으로 맺게 되는 '언약'을 혼동하게 되면, 너무나 위험한 교리가 나온다

 

'중생'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언약을 맺'되, 혈통과 인종, 육체적 관계를 통해서 맺는 것이 아니고, 바로 영과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함으로 인해서 맺게 되는 그 '언약'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모세가 그의 율법의 요약할 때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고 하였다.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셨는가? 바로 '중생'의 길이 여기에 있다고 역설하셨다(눅10:25이하).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임을 귀있는 자는 들을진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전혀 새로운 어떤 진리를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성경에 기록되어져 있는 원리를 다시 확인하시는 것이다. 이미 주어졌는데도, 왜곡시키고 변질시키고 오염시켜 버린, 그 세대를 비판하시고 책망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이렇게 책망하셨다면, 지금 이 시대에 오셔서 우리들을 향하여 뭐라고 하실까?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너희들이 도대체 중생을 아느냐?"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lyjo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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